파주삼릉의 영릉(永陵)은  영조와 정빈이씨 사이의 아들 효장세장와 세자빈 효순왕후의 능침이며 합장릉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영조는 정식적인 왕비(원비 정성왕후 서씨, 계비 정순왕후 김씨)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효장세자는 후궁 이었던 정빈이씨의 소생으로 6세에 경의군으로 왕세자로 정해졌고, 8세때 효순왕후(12세)와 결혼하였습니다만, 효장세자가 10세 세상을 뜨고 나서 효순왕후는 세자빈 신분으로 3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조는 효장세자가 묻힌 현재의 능옆에 효순왕후의 능을 쌍릉으로 만들고, 영릉이라고 능호를 지었습니다. 효장세자의 배다른 동생은 사도세자이며,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여서 조선 22대 국왕으로 등극 시켰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파주삼릉 영릉의 위치지도 입니다만, 조선왕릉에서 영릉은 3곳이 있는데, 여주의 세종왕릉(영릉;英陵)과 효종왕릉(영릉;寧陵)이 있으며 파주의 진종(효장세자 추존)의 영릉(永陵)이 있으니, 한문으로 구분하여야 합니다.

 ▼ 네모안이 영릉입니다. 그림으로 봐도 쌍릉의 모습입니다.

 

▼ 소현세자가 죽을 당시 세자였기 때문에 왕의 무덤이 아닌 세자의 봉분(원)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봉분에는 난간석과, 무석인이 없습니다. 세자나 세자빈으로 죽었을때 만들었던 원은 나중에 왕릉으로 추존되어도 봉분의 기본 석물들은 그냥 놔두는것이 조선의 법칙이었다고 합니다.

 

- 능의 구성

영릉은 추존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 조씨의 능이다. 영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진종소황제, 오른쪽이 효순소황후의 능이다.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검소하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영릉의 비각은 총 2개로 비각 안에는 세 기의 능표석이 있다. 1비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비, 2비는 진종대왕(眞宗大王)의 비, 3비는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의 비로 진종이 추존될 때마다 능표석을 새로 세웠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1쌍씩 배치하였다. 문석인은 관모를 쓰고 양손으로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한 편이다. 관복의 소매는 길게 늘어져 있고, 팔꿈치 부근에는 세 줄의 주름이 새겨져 있다.

 

- 능의 역사

진종소황제(재세 : 1719년 음력 2월 15일 ~ 1728년 음력 11월 16일)는 영조와 정빈 이씨의 아들로 1719년(숙종 45)에 창의궁에서 태어났다. 1724년에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가 이듬해인 1725년(영조 1)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728년(영조 4)에 창경궁 진수당에서 10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왕세자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1776년(영조 52)에 영조의 명으로 이복동생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양자로 입적이 되자 효장승통세자(孝章承統世子)라 하였고,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그 후 1908년(융희 2)에 진종소황제로 추존되었다.

 

-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 이야기

효순소황후 조씨(재세 : 1715년 음력 12월 14일 ~ 1751년 음력 11월 14일)는 본관이 풍양인 풍릉부원군 조문명과 완흥부부인 이씨의 딸로 1715년(숙종 41)에 숭교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27년(영조 3)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1729년(영조 5)에 진종이 세상을 떠나자 1735년(영조 11)에 현빈(賢嬪)에 봉해졌다.

 

이후 1751년(영조 27)에 창경궁 건극당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왕세자빈에게 효순(孝純)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세손 정조가 진종의 양자로 입적되자 효순승통세자빈(孝純承統世子嬪)이라 하였다.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효순왕후로 추존되었고, 1908년(융희 2)에 효순소황후로 추존되었다.

 

 

▼ 파주삼릉 영릉 능주의 생애를 적어 놓은 안내문입니다. 진종은 세자로 10세에 죽었지만, 영조가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정조때는 왕으로 추대되어 진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며, 순종때는 황제가 되었습니다

 

▼ 효장세자를 가계도를 알려면 영조의 가계도를 봐야 하기 때문에 영조의 가계도를 올렸습니다. 

 

 

▼ 효장세자(진종)의 참로는 향로밖에 없습니다, 어로와 변로는 원래 부터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왕릉의 격식에 맞게 정자각등은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 동계(東階)의 향계(운계)와 어계의 모습입니다. 향계는 임금도 못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오른쪽 어계로만 다녀야 합니다. 향로와 어로의 높낮이가 없이 박석이 깔려 있는 모습입니다.

 

▼ 운계의 문양인데, 구름문양이 아니고 꽃문양으로 보입니다.

 

▼ 제상과 다른 상들을 보면 전부 노란색입니다. 노란색은 황제의 상징을 나타내는데, 황제로 추존받지 못한 왕릉에 있는 정청의 제상의 색갈은 붉은색입니다.

 

▼ 정자각안에서 바라보는 홍살문입니다.

 

▼ 진종의 영릉에는 비각이 두개이며, 표석은 3개가 있습니다. 비각 앞에까지 박석이 깔려 있습니다.

 

▼ 사초지에 솟아 있는 돌인데, 무슨 의미가 있는 돌은 아닌것으로 보이며, 사초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원래 있었던 돌을 파내지 않고 그냥 두었던 돌인듯 합니다.

 

▼ 예감입니다.

 

▼ 능의 오른쪽 사초지에 있는 산신상석입니다. 모든 산신상석에는 구멍이 있는데, 설명이 없어서 그 정도만 알고 갑니다.

 

▼ 능침을 보는데, 일반인들은 올라가서 볼 수 없으므로 참고사진을 꾸며서 올렸습니다.

 

▼ 자료사진으로 영릉의 상설를 보고 갑니다. 추존진종은 세자(효장세자)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봉분에는 난간석은 두루지 않고, 석물만 배치 하였습니다.

 

▼ 망주석의 세호 모습이 사실적으로 조작되어 있습니다.

 

▼ 진종의 영릉(永陵)에는 무인석은 없고, 문인석만 있는데, 세자시절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능이 아닌 원으로 꾸몄기 때문입니다.

 

▼ 석호의 얼굴모습은 눈망울이 크게 묘사 되어 있어서 크게 무서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 비각앞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 효장세자가 묻혔을 당시의 표석을 두었던 비각의 모습입니다.

 

▼ 첫번째 비각 아래에는 두개의 표석이 들어 있습니다.

 

▼ 세개의 표석의 사진과 앞면/뒷면의 비문내용입니다.

 

▼ 첫번째 표석의 비문은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의 비문입니다. 앞면에는 "조선국 효장세자묘/효순현빈부좌"라고 되어 있습니다.

 

▼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돼서 추가로 만든 표석입니다 앞면에 " 진종대왕영릉 효순왕후부좌"라고 되어 있습니다.

 

 ▼ 진종이 황제로 추존되어 추가로 만든 표석입니다. "대한진종소황제영릉 효순소황후부좌"라고 되어 있습니다.

 

▼ 이제 영릉을 나와서 다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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