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릉(昌陵)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으며, 조선 제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으로 동원이강릉으로 조성 되었습니다. 서오릉에서는 처음으로 조성된 릉이라고 합니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이며, 20세에 즉위했지만, 1년만에 승하 하였습니다. 첫번째 부인은 장순왕후 한씨(파주삼릉 공릉)로서 한명회의 3녀 였으며, 인성군을 낳고 산후증으로 세상을 떠나자 두번째로 맞은 왕비가 안순왕후 입니다.

 

▼ 정자각 앞에서 보이는 능의 왼쪽이 예종, 오른쪽이 안순왕후의 능입니다.

 

▼ 서오릉의 배치그림인데, 서쪽의 윗쪽에 창릉이 있습니다.

 

 제8대 예종 · 안순왕후 창릉(昌陵)

- 능의 구성

창릉은 조선 8대 예종과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창릉은 서오릉에서 왕릉으로 조성된 최초의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예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안순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창릉의 두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석물의 상설은 왕과 왕비가 비슷하다. 예종의 능침의 장명등은 지붕돌이 없어진 상태이고,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의 무늬가 도깨비가 아닌 북고리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유일하다.

- 능의 역사

1469년(예종 1)에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70년(성종 1)에 의경세자의 의묘(懿墓, 경릉) 북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 후 1498년(연산군 4)에 안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9년(연산군 5)에 창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 예종(睿宗) 이야기

예종(재세 : 1450년 음력 1월 1일 ~ 1469년 음력 11월 28일, 재위 : 1468년 음력 9월 7일 ~ 1469년 음력 11월 28일)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둘째 아들로 1450년(세종 32)에 수양대군 사저에서 태어났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고, 형인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1457년(세조 3)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68년(세조 14)에 세조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 남이의 옥사를 진압하였으며, 1469년(예종 1)에는 세종의 영릉(英陵)을 여주로 천장하였다. 그러나 재위 1년 2개월 만에 경복궁 자미당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예종은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야사모음집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예종이 부왕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 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 안순왕후(安順王后) 이야기

예종의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씨(재세 : ?년 음력 3월 12일 ~ 1498년 음력 12월 23일)는 본관이 청주인 청천부원군 한백륜과 서하부부인 임씨의 딸로 태어났다. 1463년(세조 9)에 왕세자의 후궁인 소훈(昭訓, 내명부 세자궁 종5품)에 간택되었고,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세상을 떠난 후 원자인 제안대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성종)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성종이 즉위한 후 인혜왕대비가 되었고, 연산군 즉위 후 대왕대비가 되었다. 그 후 1498년(연산군 4)에 창경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 창릉으로 들어가는 길은 소나무가 허리를 깊게 구부린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 이제 금천교를 건너서 신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 창릉의 안내문을 잘 보면 능주의 모든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 예종의 가계도 입니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아들입니다만, 19세에 등극하여, 20세에 승하하였습니다, 안순왕후의 아들 제안대군은 예종이 세상을 떠날때 왕위계승 적장자였으나, 할머니인 정희왕후(세조 비)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의경세자의 들째 아들(자을산군)이 왕위를 이어받았으며, 곧 제9대 성종입니다.

 

성종의 장인은 한명회인데, 정치적으로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깊숙한 뜻에 의해서 제안대군 대신에 자을산군(성종)이 왕위를 이어받게 된것으로 보입니다.

 

 

▼ 창릉의 홍살문 앞에 왔습니다만, 어느 왕릉이나, 기본적인 왕릉의 조성방법은 거의 같아서 다른 릉과의 차이는 잘 모르겠습니다.

 

▼ 서쪽에 보이는 수라간은 최근에 복원한듯이 보입니다.

 

▼ 동쪽에는 수복방과 비각이 있습니다.

 

▼ 정자각의 여러모습을 올렸습니다.

 

▼ 향로와 어로는 정자각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보통은 형로와 어로는 동계로 들어가서 서계로는 어로만 나오는데, 창릉은 전부 막혔습니다.

 

▼ 동계의 운계는 소맷돌의 문양이 꽃잎문양입니다.

 

▼ 비각안의 표석의 자료사진입니다. 영조31년(1755)에 세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 예종의 능침 모습입니다

 

▼ 안순왕후의 능침 모습입니다.

 

▼ 예종의 능침입니다.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인 세조가 병풍석을 두루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아들인 예종의 릉에도 병풍석을 두루지 않았습니다.

 

또한 세조의 유언대로 세조의 광릉을 조성 할 때 부터 재궁을 넣어 두던 석실을 회격실로 조성 하였기 때문에 예종의 창릉 또한 회격실로 하였습니다.

 

▼ 예종의 능침앞에 있는 망주석과 장명등입니다. 장명등은 8각으로 아주 화려합니다

 

▼ [예종능침] 망주석을 자세하게 보는 자료사진입니다. 세호의 모습은 흉내만 낸 모습입니다.

 

▼ 예종의 능침을 지키는 문석인과, 무석인을 석마와 함께 구분하여 보았습니다.

 

 ▼ [예종능침]곡장안에서 봉분을 지키는 석양과 석호의 앞모습이나, 옆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 합니다.

 

 

▼  안순왕후의 능침 모습입니다

 

▼ 안순왕후의 능을 지키는 문석인과 무석인의 석마의 자료사진입니다.

 

▼ 창릉의 모습을 보고 나서 홍살문으로 나갑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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