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최북단 연천군은 지금도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접경지역이고 가끔 북쪽에서 철책을 넘어오기도 하는 알게 모르게 긴장감이 살아 있는 군사도시입니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는 쌍방 간에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며, 국군은 물론 유엔군으로 참전한 전투병들의 쏟아지는 전사자를 처리하기 위해서 지은 유엔군 화장장이 있어서 한번 찾아가 봤습니다.
전쟁 중에 화장장은 두 곳이 운영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1951년도에 만들어진 화장장으로서 연천군 마거리에 있었는데 실태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두 번째는 1952년도에 만들어진 지금의 연천군 마당면 동이리에 있는 화장장 시설입니다
▼ 도로에서 보면 유엔군 화장장 시설의 안내 표지판이 크게 보이며, 승용차를 타고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들어가는 길이 'S'자로 되어 있어서 혹시 마주 오는 차가 있을지 모르니 미리 확인하고 들어 가셔야 합니다
※ 연천 유엔군 화장장 시설은 국가지정문화재 입니다.
지금의 동이리 유엔군 화장장 시설은 이 마을의 김태완(2005년 타계)씨과 여러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서 확인이 되었는데, 전쟁기간중에는 물론 휴전 후에도 얼마 동안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곳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주민들도 증언하게 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답니다.
. 지정구분 : 국가지정문화재
.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408호(2008-10-01)
. 명칭(한자) : 연천 유엔군 화장장 시설 (漣川 유엔군 火葬場 施設)
. 유형분류 : 등록문화재
. 소 재 지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610, 산77-2번지
▼ 도로 옆에서 바라보면 알 수 없는 서너 구루의 나무와 산벚이 하얗게 피어 있는 것이 우연은 아닌 듯싶습니다. 한국전쟁 중 유엔군은 연천지구와 파주지구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는데, 대표적으로 알려진 전투가 설마리 전투와 금굴산 전투입니다.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전사자가 쏟아졌고, 전염병을 우려한 유엔군 지휘부는 전사자를 화장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첫 번째는 1951년도에 연천군 중면 마거리에 화장장 시설을 지었고, 화장장 시설이 부족해지자 1952년도에 지금의 마산면 동이리에 추가로 화장장 시설을 지었는데, 영국군이 시설을 관리하였다고 합니다.
▼ 높게 쌓은 언덕에는 화장장 시설이고, 아래는 주차장이며, 8대 정도 주차 가능합니다.
▼ 화장장 시설은 건물의 벽체 부분은 거의 허물어졌고, 굴뚝만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입니다.
▼ 화장장 시설의 건물의 형태를 유리창에 그렸는데, 건물의 형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 [자료사진] 연천군청의 자료 그림에서 화장장 시설의 건물 모습을 재현하여 본 모습입니다.
▼ 화장장 앞에서 잠깐 추모의 시간을 갖고 먼 나라에 와서 숨져간 젊은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생각해 봅니다.
▼ 건물의 형태는 거의 무너졌으며, 화장장의 시설물들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 화장장 시설에 대한 설명을 추가로 알아 보겠습니다(지역N문화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연천 유엔군 화장장은 서부전선 전투에서 6・25전쟁 당시 사망한 유엔군 전사자들을 위해 화장시설로 건립된 것이다. 돌과 시멘트로 쌓은 10여 미터 높이의 시설 일부가 숲 속에 남아 있다. 전쟁 당시 화장장 시설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유엔군 참전 상황에 대한 실증적 자료로 6・25전쟁사의 생생한 현장으로 그 보존 가치를 인정받는 시설이다.
▼ 한국전쟁 기간 중에 전사한 유엔군의 수는 공식적(국방부)으로 37,902명(한국군은 137,899명)입니다. 전사자 대부분이 휴전을 앞두고 고지전이 치열할 때 발생하였으며 1952년에 금굴산전투에 투입된 영국군과, 벨기에군의 전사자가 급증하자, 전사자의 유해를 화장하기 위하여 영국군이 지었다고 합니다.
▼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유엔군 시신을 처리해야 할 화장장을 추가로 건립해야 할 정도로 연천, 파주지역의 치열한 격전을 실감케 합니다.
휴전회담이 길어지면서 고지쟁탈전이 치열해지고 당시 수많은 유엔군의 전사자가 생겼는데 전사자의 유해를 화장해서 본국으로 보내기 위해 영국군이 마련한 화장시설이었습니다.
전사한 장병의 시신을 이곳으로 옮겨와 화장하기 전에는 반드시 예의를 갖추는 의식이 행해졌고 이러한 사실은 이 마을의 주민 김태완(2005년 타계)씨와 여러 주민들에 의해서 증언되었다고 합니다.
▼ 화장시설은 남은 것이 하나도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굴둑은 하나이고, 화장로(火葬爐)는 여러 개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쓸쓸하고 허전한 모습을 보면서 머나먼 타국에서 숨져간 젊은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크지만, 부디 편안하게 잠드시기를 바랍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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