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시의 죽미령평화공원에는 두곳의 기념관이 있는데, 초전기념관과 스미스 평화관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스미스 평화관에 들어가서 1950.6.25 전쟁초기 북한군과 유엔군(미군)이 처음으로 전투를 벌인 죽미령에서의 전투상황과 전투이후에 전개되는 상황에 대해서 알아 봤습니다.

 

▼ 스미스평화관은 2층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 찰스 브래드포드 스미스(Charles Bradford Smith, 1916.5.7~2004.5.27)의 자료사진으로 보는 모습입니다. 왼쪽은 일본에서의 모습으로 추정되며, 왼쪽은 1987년 7월 5일에 (신)초전기념비 준곤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는 스미스 예비역준장 입니다.

 

▼ 1층 구역에는 가족끼리 산책하기 좋게 꾸며져 있습니다.

 

▼ 여기서 잠깐 6.25전쟁의 발발직후 스미스 부대의 파병일정과 죽미령에서의 초전 상황을 알아 보았습니다. 시간대별로 보면 무척 급박하게 파병이 결정되고, 신속하게 전투지역에 배치가 이루어집니다.

- 1950.6.25 04:00, 북한군 남침

- 1950.6.29, 맥아더 태평양 사령관 전쟁지역 시찰

- 1950.6.30, 맥아더의 미제24사단 파병 명령에 따라 보병 제21연대 1대대(406명)와 포병52포병대(134명) 파병 결정

- 1950.7.1 08:45, 일본 이타즈케 비행기지에서 C-54(6대)에 나누어 타고 이륙.(1.2번 수송기 부산지역 안개로 이타즈케로 회항)

- 1950.7.1 15:00, 한국 부산 수영비행장에 착륙(오전 11시 부터 착륙하여 오후 3시경 마지막으로 스미스중령 탑승 수송기 도착)

- 1950.7.1 20:00 부산역에서 대전역으로 이동

- 1950.7.2 08:00 대전역에 도착

- 1950.7.2, 일본 후쿠오카항에서 일본 수송선(어선을 개조)에 52포병대(알파포대)와 105mm곡사포, 군용차량등 장비 선적후 출항

- 1950.7.2, 스미스중령 오산 죽미령 정찰 및 진지구상

- 1950.7.4, 스미스 부대  평택에서 제52포병대(알파포대,108명과 105mm곡사포)와 합류후 오후에 평택 출발

- 1950.7.5 03:00, 스미스 부대 죽미령 도착, 진지구축 및 포대 방렬(평택에서 6문의 포중 차량고장으로 5문만 끌고 와서 배치)   


▼ 2층의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모습이며, 좌,우로 6.25한국전쟁에대한 유엔결의 장면과 날자별로 스미스부대가 파견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복도 바닥에는 6.25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 규모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 전쟁이 발발한 이틀후인 1950년 6.27일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안을 상정하여 투표를 하는 장면 입니다

 

▼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10개국이 참석 하였는데, 7개국가는 찬성, 1개 국가는 반대, 2개 국가는 기원을 하여 재제 결의안이 통과 되었습니다. 그런데 찬성 국가에 중국이 있었다니, 좀 놀라운 일입니다

 

▼ 스미스 특임부대에 선택된 미 제24보병사단의 장병들은 코리아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수송기에 몸을 실었을 것 입니다.

 

▼ 스미스특임부대는 미제24사단 제21연대, 1대대의 2개중대(B중대,C중대) 406명은 1950년 7월 1일 08시 45분에 일본 이타즈케(후쿠오카) 공군기지에서 미군 수송기 C-54(6대)에 몸을 실었습니다

 

▼ 1950.7.1 일본의 이타즈케((板付),후쿠오카공항)) 비행기지에서 대기중인 스미스특임부대원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 입니다

▼ 일본 이타즈케(板付) 비행기지에서 이륙한 6대의 C-54수송기는 부산의 수영비행장에 오전 11시에서 오후 3시경에 나뉘어서 착륙합니다. 일본 이타즈케 공군기지에서 아침에 이륙한 첫번째 수송기는 부산에 깔린 안개 때문에 다시 이주다케 비행기지로 회항 하였다가 다시 수영비행장에 내렸습니다. 사실 이타즈케(板付) 비행기지는 6.25 발발 직후 우리공군이 미군으로 부터 F-51D전투기를 인수받고, 교육을 받던 곳이었습니다.

제52포병대는 후크오카 항구에서 수송선에 포병, 105mm곡사포와 포탄, 트럭등을 싣고 출항 하였고, 1950.7.4일 평택에서 보병들과 합류 하였습니다.

 

▼ 전쟁직후 고단했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산시민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 입니다

 

▼ 스미스특임부대는 부산역에서 전투에 필요한 물자와 무기를 기차에 싣고 대전으로 출발 합니다.

 

▼ 대전역에 내려서 평택방면으로 이동하려는 스미스부대 입니다. 

 

▼ 건물앞에 "육군★본부, 대전지구군사철도수송부" 라고 쓰인 반원형의 간판이 보입니다. 전쟁 발발후에 급조한 철도수송부입니다

 

▼ 7월 5일 07시경 적의 전차 선두 발견, 08시16분 첫 전투가 시작됬습니다. 전투는 약 7시간 후에 스미스 부대가 후퇴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 스미스특임무대의 무장상태를 알아봤습니다.

- 75mm 무방동총 2문

- 60mm 박격포 4문

- 4.2인치 박격포 2문

- 2.6인치 바주카포 6문

- 개인탄약 120발

- 105mm곡사포 5문, 포탄 1200발(곡사포는 6문이었으나, 평택에서 차량고장으로 5문만 끌고 와서 배치)

 

※ 스미스테스크포스 부대의 배치상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 1번 국도 좌측고지는 B중대 1개 소대

- 1번 국도 우측능선에는 B중대 2개소대, 75mm무반동총 2문 배치

- B중대 후방 약 350미터(400야드) 지점에 4.2인치 박격포 1문 배치

- 경부선 철로방향으로 C중대 2개소대, 무반동총 1문 배치

- 경부선 철로방향 ,C중대 1개 소대는 철로 방향으로 길게 배치

- 보병진지 후방 2000야드(1.8Km)후방에 5문의 105mm 곡사포 배치(1문은 전진배치, 4문은 약간 뒷쪽에 배치)

- 52포병대의 탄약은 총 1200발인데, 고폭탄(HE탄)이 대부분이고, HEAT탄(대전차용 성형작약탄)은 고작 6발

 

※ 전투피해상황

- 북한군 : 전사(42명), 부상(80명), 전차 4대 완파, 2대 반파

- 유엔군 : 전사(150명), 실종(31명)

 

▼ 죽미령에서 보는 수원방향(좌측)과 상공에서 보는 죽미령의 고지사이로 1번 국도가 보입니다. 스미스부대 B중대, 1개소대는 도로 건너 고지, B중대 2개 소대는 앞쪽 고지에, C중대는 사진에는 안 보이는데, 철로 주변에 배치하였습니다.

 

▼ 처음 전투시 75mm무반동총이나, 2.36인치 바주카포탄(22발)을 쐈지만 T-34에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하였습니다

 

▼ 북한군의 T-34전차가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있습니다. 북한군은 서울에서 3일 지체후 한강을 건너서 수원을 점령후 오산의 죽미령에서 미군과 첫번째 전투를 벌입니다.

 

▼ 북한군의 T-34전차에 대항하여 2.36인치 바주카포를 쏘는 스미스부대의 병사들입니다. 그날 비가 와서 판초우의를 입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의 위력이 너무 약했습니다.  일본에서 오산 죽미령까지 쉬지 않고 달려와서 쉬지도 못하고 북한군과  곧바로 맞붙은 전투경험이 별로 없는 어린 병사들이었지만,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다만 무기의 성능이 너무 약했습니다.

 

▼ 북한군은 주력소총으로 러시아의 걸작 M1891모신나강소총과, PPSH-41(따발총)입니다. 6.25전쟁 초기의 주력부대는 조선족으로 구성된 모택동의 공산군 소속으로, 김일성의 요청에 의해 북한으로 와서 남침의 선봉에 섰던 부대로서 북한으로 올때 모신나강 소총을 지니고 그대로 들고왔을 것 입니다. 

 

모신나강 소총은 만주에서 독립군들이 많이 쓰던 소총으로 일본군을 상대해서 큰 전과를 올린 총입니다. 영화 암살에서 여자 주인공 전지현이 들고 쏘던 총이 모신나강소총인데, 명중율이 좋아서 2차 대전때 저격소총으로 많이 쓰였다고 합니다._사진은 네이버 무기의 세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미군의 M1개런드 소총과 M1카빈 소총입니다만, 모신나강은 나름대로 훌륭한 소총으로 6발 탄약을 장전하지만, 볼트액션 방식으로 한발 쏘고 손으로 노리쇠를 후퇴,전진시키는 방식으로 8발 클립의 반자동 소총인 M1개런드에는 연사속도에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사격 속도가 느린 소총이었습니다. 

 

북한군에게 연발사격이 가능한 따발총 PPSH-41이 있다면 미군과 한국군에게는 M1카빈이 있었습니다. PPSH-41이 권총탄을 쓰는데, M1카빈은 30구경탄을 쓰기 때문에 M1카빈이 더 파괴력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군은 성능이 우수한 국산 소총으로 무장하였고, 변변한 총이 없어서 일본군들이 버리고 간 구식 소총으로 무장했던 국군은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됬습니다.

 

▼ 미군은 2.36인치 바주카포가 북한군의 T-34에는 너무 약하는것을 알고 더 강력한 3.5인치 바주카포를 미군에게 배치 합니다. 아랫쪽이 3.5인치 바주카포 입니다

 

▼ 북한군 T-34에 대항 하였지만, 별다른 피해를 주지도 못한 75mm무반동포(총)입니다. 단 2문반 배치되었습니다.

▼ 4.2인치 박격포와 사격을 하는 미군의 모습이며, 죽미령전투와는 관련이 없는 참고 사진입니다. 오른쪽은 60mm박격포 입니다. 박격포중에서 제일 작은 60mm박격포이며 사거리는 약 1.5km정도 입니다. 60mm박격포는 한국전쟁중 참호전투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가볍고 2명이서 운용하며 몇발 쏘고, 분해해서 참호 내부에서 잽싸게 도망 다니기 때문에 중공군의 대응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 미군의 105mm곡사포의 사격 장면이며, 죽미령전투때의 모습은 아니지만, 대부분 포사격은 이런 모습입니다. 105mm포 1문에는 6~7명의 병사가 필요 합니다. 105mm 사거리는 대략 11~12Km정도 됩니다. 

 

▼ 스미스 부대는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첫번째로 맞 붙어서 전투를 벌였지만, 스미스부대의 임무는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는 임무이기 때문에 실패한 전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약 7시간의 전투로 공산군의 지휘부는 미군의 참전 사실을 알고 무척 당황 했을 것이고, 그 사이에 국군과 미군은 부대를 재정비 할 시간을 벌어서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지연작전이었다고 합니다.

 

▼ 죽미령에서의 전투는 2시 30분에 끝났지만, 기억은 영원할 것 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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