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지역은 한국전쟁(6.25 전쟁) 때 중공군의 춘계공세 때 가평지역과 함께 영국군과 영연방 1사단의 방어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입니다.

그중에서 영국군인의 군인정신의 끝장을 보여준 전투가 파주 설마리에서 벌어졌었는데, 그곳에서 중공군 65군(3개사단)과 전투에서 전사한 영국군 제29연대(글로스터셔연대) 제1대대의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공원을 만들고, 기념비도 세웠습니다. 기념공원의 이름은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 기념공원( Gloucester Hill Memorial park)입니다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영국군의 설마리전투와 프랑스군의 지평리 전투를 보면, 당시의 한국군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용맹한 군인들이었습니다.

 

※ 여기에 인용된 자료사진은 국가보훈처, 근대사 아카이브, 위키백과, 영국박물관, 영국BBC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영국군 설마리전투 추모공원은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112-1번지에 있고, 공원은 2014년 4월 23일에 만들어졌습니다. 현재의 기념공원 주위 고지가 대부분 적성전투(설마리전투)지역입니다.

 

▼ 조형물인 자유의 문에는 FREEDOM(자유), FRIENDSHIP(우의), PEACE(평화)의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 설마리 전투의 세부내용을 위키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1951년 4월 22일 일명 ‘4월 공세인 제1차 춘계공세를 개시

. 21시경 글로스터대대와 벨기에 대대 주전지를 탐색 공격 직후 전방 3개 대대 공격 개시

. 글로스터대대는 148 고지에서 적의 도하를 저지하였지만 인해전술과 파상공격으로 진지 일각이 와해.

. 퓨질리어 대대와 벨기에 대대도 중공군과 격전, 중공군은 후속부대를 투입하여 3면에서 글로스터대대 집중 공격

 

- 4월 23일 11시 글로스터대대는 대대장 칸(J. P. Carene) 중령의 명령으로 철수

. A중대와 D중대는 설마리의 235고지로, B중대는 316고지로 철수

. 퓨질리어대대 후방진지로 철수, 벨기에대대는 화산리로 이동

. 중공군은 316고지의 글로스터대대 B중대 기습

. B중대 백병전으로 맞서 싸웠으나 사상자 속출함에 따라 235고지로 철수

 

- 4월24일 07시 30분경 필리핀대대를 투입하여 글로스터대대 구출작전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 벨기에대대의 지원 아래 제2차 구출작전 실패

. 글로스터대대는 설마리 고지에 사주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수차에 걸친 중공군의 공격 격퇴

. 글로스터대대 대대장 칸 중령은 외부 지원이 불가하다는 무전을 받은 후 남쪽 계곡만 통과하면 좌인접의 한국군 제 1사단으로 철수 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철수 명령 하달

 

- 4월 25일 10시에 대대장을 비롯하여 군목과 군의관, 의무요원 등은 50여 명의 부상자와 함께 고지에 잔류한 가운데 D중대 엄호를 받으며 하산을 시작하였다.

. 남쪽으로 철수한 대대주력과 235고지에 잔류한 요원들은 중공군에 포로가 되거나 사살되었고, 북쪽으로 철수한 D중대원 39명만 한국군 제 1사단에 의해 구출되었다.

. 제 29여단은 군단 명령으로 벨기에대대 엄호 하 덕정으로 철수

. 중공군은 전과확대를 노려 추격전 시작

. 제 29여단은 철수 과정에서 다수의 인명 및 장비의 피해를 입고 의정부에 재집결하였다.

 

결과적으로 영연방 제29여단은 적성 전투에서 글로스터대대 D중대를 제외한 전 대대가 포로가 된 것을 포함하여 전체 병력의 1/3에 해당하는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이 희생으로 적성-설마리-동두천으로 돌파하려는 중공군을 3일간이나 저지시켜 군단 주력부대들의 안전한 철수는 물론 서울 방어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 제29여단(글로스터대대)이 임진강전투에서 패하였지만, 제27여단은 가평에서 중공군을 격퇴하여 몇 갑절로 원수를 갚아주었습니다.

 
 
▼ 영국군의 전투기념비(파주)와 별도로 영연방참전기념비(가평)도 있습니다

 

▼ 자유는 누가 거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땅에서 스러진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로 지켜낸 땅이므로 꼭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 기념공원의 내부에서 보는 영국군의 동상들입니다.

 

▼ 조형물의 공간에는 화강암처럼 생긴 구조물을 병풍처럼 두르고, 그 안에 기념비, 베레모 모형의 기념물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 기념 조형물은 영국군을 상징하는 베레모와, 영국군의 글로스터셔 연대(Gloucestershire Regiment)의 베레모 뱃지인데, 특이하게 이집트 글씨에 스핑크스 모양이 들어 있습니다.

 

▼ 글로스터 연대는 영국의 서남부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로 보이며, 오른쪽 사진은 베레모 앞에 부착하는 글로스터 연대를 상징하는 뱃지입니다. 보통은 사단을 대표하는  뱃지나, 마크를 부착하는데, 영국은 좀 특이합니다.

 

▼ [자료사진_외교부] 2013년 12월 3일, 영국 런던에서 한국전 참전기념비 준공식을 하고 있습니다. 기공식은 2013년 11월 5일 당시 영국을 방문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였으며, 준공식은 당시 외교부 윤병세 장관이 참석하였습니다.

▼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 기념공원 조형물 옆에는 16장의 사진을 파병 출발, 전투 장면, 포로생활, 귀향 등의 순서로 배치하였는데, 현실적인 그때의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 사진을 보면 아랫부분에 설명이 있는데, 글씨가 잘 안 보여서 글자 그대로 적어 보았습니다

 

▼ 두 번째 파견대인 영국 부대가 유엔군 일원으로 한국전 참전을 위해 사우스햄튼항에서 병력 수송선 ‘엠파이어 윈드러쉬’에 승선하고 있다. 첫 번째 파견대는 리버풀에서 병력 수송선 ‘엠파이어 프라이드’에 승선해 한국으로 떠났다.

사진에 나온 배는 ‘엠파이어 윈드러쉬’ 호이며 , 숄스베리 평원의 루거셀에서 온 왕립공병대 55야전 중대가 사우스햄트항 부두에서 승선대기중이다.

 

▼ ‘엠파이어 윈드러쉬’ 호에서 작별인사를 하는 영연방군. 이들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으로 참전했으며, 세계전사에 유례없는 영웅적 투혼을 발휘한다.

 

▼ ‘엠파이어 윈드러쉬’ 호에 승선한 제임스 칸 중령과 대원들이 기념 촬영한 사진들이다. 이들은 명예로운 대대원으로 한국전쟁사에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 1951년 글로 스터 부대 원들이 적군의 공세를 대비 235고지에 진지를 구축한 모습. 이 고지에서 마지막 한발까지 최선을 다해 적군의 공세를 차단하여 중공군의 진격을 늦춘 영광스러운 29여단 글로스터대대 부대원들. 이들은 이곳에서 젊음을 산화했다.

 

▼ 영연방군 29여단에 배속된 벨기에대대. 임진강 북쪽 금굴산에 배치되어 경계(보안)부대로서 임무를 수행 중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다.

 

▼ 제8왕립 후사로 기갑부대원들과 쎈추리온 탱크. 이들은 임진강전투에서 보병을 지원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 제29여단 로얄아리쉬 경기갑부대 대원이 본국의 가족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참혹한 전쟁터에서 가족을 생각하는 그의 표정과 부상당한 손으로 편지를 써 내려 가는 모습이 감동스럽게 느껴진다.

 

▼ 진지를 구축하고 비커스 기관총으로 저항하는 영연합군. 비커스 기관총은 우수한 무기이나, 많은 중공군을 대항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으며, 수냉식으로 산악지형의 고립된 지역이나, 물이 없는 곳에서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 왕립 포병대 제170독립포대(호주) 대원이 지원사격을 준비하고 있다. 표정은 밝지만 바로 다가올 불안과 긴장의 그늘이 얼굴 한편에서 읽힌다.(설명자료가 잘못되었습니다, 포병대는 제45포병연대이고, 제170부대는 박격포대대 입니다).

※ 참고로 영국은 포의 크기를 파운드로 구분하였는데 사진에 보이는 포는 25파운드(11.3Kg)이고 구경은 87.6mm, 사거리는 최대 약 12Km입니다. 지금은 영국도 포 구경 표준단위(mm)로 쓰는 듯합니다.

※ 25파운드 포 앞에 있는 포병들은 마오리족(호주 원주민)입니다

 

 

▼ Royal Ulster Rifles와 Northumberland Fusilsers대대 병사들의 엄격한 군기가 돋보인다.

 

▼ 제170 경박격포대 C소대원이 1951년 5월 22일~25일 설마리 전투에서 1개 사단의 중공군을 맞아 끝까지 저항하며 박격포를 발사하고 있다.(81mm박격포로 보입니다)

 

▼ 1951년 5월 9일 글로스터연대 1대대 대원들이 전세가 불리한 가운데 방어선을 구축하고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다.

 

▼ 설마리전투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대원들 모습이다. 1951년 중공군 춘계대공세를 맞아 이곳 235고지에서 마지막까지 전투를 치른 글로스터대대는 대대원 750명중 622명(전사,포로,실종)이 돌아오지 못했다.

 

▼ 한국전쟁 중 임진강에서 포로가 된 칸 중령이 포로생활 중 십자가를 만드는 모습을 재현한 밀랍 인형 사진이다. 제임스 칸의 돌 십자가 조각 진본은 현재 글로스터 대성당에 전시되어 있다.

 

▼ 한국전쟁에 소총수로 참전한 ‘로날드 그린‘이 포로 송환으로 풀려나 1953년 사우스햄튼항에서 아내인 캐서린과 4살난 어린 딸과의 감격적 재회다.

 

▼ 1953년 글로스터셔 연대를 영예롭게 지휘한 대대장 제임스 칸 중령과 참전용사들이 한국전쟁에서 영예로운 전투로 글로스터 도시의 명예를 기린데 대한 대성당에서의 행사. 이후 글로스터시 웨스트게이트 거리를 통과하며 행진 중이다. 그들 모두 훈장을 수여받았다

 

▼ 추모공원과 설마리전투비 사이에는 다리가 놓여 있으며, 글로스터교라고 합니다.

 

▼ 글로스터교를 건너면 카렌중령이 포로생활 중에 만들어서 의지했다는 돌 십자가의 모형이 세워져 있습니다.

 

※ 여기서 카렌중령(James Power Carne)과 그가 북한에서 포로생활중 만든 십자가에 대한 자료사진을 보겠습니다.

 

▼ [자료사진_BBC] 카렌중령(1906년 4월 11일 ~ 1986년 4월 19일)입니다.

 

▼ [자료사진_BBC]  돌 십자가를 1953년 글로스터 대성당에 넘기는 모습입니다.

 

▼ [자료사진_BBC] 복제품은 설마리전투 65주년 기념일에 한국의 새 박물관에 인도될 것이라고 합니다.

 

[자료사진_BBC] 카네 십자가의 복제품들은 글로스터 대성당의 석공 위슬로우 소드가 딘의 숲에서 가져온 사암을 사용하여 조각하였습니다.

 

▼ 1957년 6월 29일 영국 글로스터연대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설마리 전투비를 건립하였다. 설마리 전투비는 2008년 1월 등록문화재 제407호로 지정되었다. 엘리자베스 영국여왕도 방한 시 이곳을 방문했으며 매년 4월 마지막 주 일요일마다 전적비 앞에서 영연방의 참전 기념행사가 열린다. 1968년 국군 8022공병부대가 이곳에 설마리 영국군 전투비 공원을 조성했으며, 유엔기를 중앙에 두고 좌우로 태극기와 영국기가 펄럭이는 넓은 광장이 있다. 전적비로 가는 길목에는 2000년 파주시에서 건립한 글로스타샤교가 놓여 있다._위키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임진강격전약도를 보면, 영국군 제29여단은 글로스터(Gloucester) 연대 제1대대를 적성 부근에, 푸실리어(Royal Northumberland Fusiliers) 연대 제1대대를 감악산 북쪽에, 그리고 배속 받은 벨기에 대대를 금굴산에 배치하고, 얼스터 소총(Royal Ulster Rifles) 연대 제1대대를 봉암리에 예비로 확보하여 있었습니다.

각 대대의 배치상태를 보면 4개의 중대에 박격포 소대가 하나씩 배속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후퇴 시기를 놓친 글로스터 1대대는 중공군에 완전포위되었으며, 1만5천명대 700여명이 3일간 고립작전으로 지옥의 전투를 벌였습니다.

 

▼ [자료사진_근대사 아카이브] 전투가 벌어진 지역을 자료사진으로 보겠습니다

 

- 마지리에서 적성면으로 넘어가는 고지(234고지로 추정)

 

- 글로스터대대 B중대가 처음 주둔했었던 캐슬 고지(148m)이며, 중성산이라고 하며, 산 중성산 정상은 고구려의 칠중성이 있습니다.

 

▼ 칠중성(캐슬 고지)은 해발 147m로 크게 높지는 않아도 주위에 높은 산이 없어서 임진강 주변이 훤히 보이는 고지여서, 고려가 당나라와 전투에서, 신라와 당나라의 전투, 한국전쟁 때도 중요한 고지였습니다.

 

▼ [자료사진_보훈처] 글로스터대대의 격전지 전투 과정을 자료 그림으로 보겠습니다.

 

주한영연방군(British Commonwealth Forces Korea(BCFK)은 한국전쟁 중에 영연방 제1사단으로 창설하게 됩니다.

인도는 비전투부대를 파병하였으며,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영연방은 아니지만 글로스터대대에 배속되었습니다

특이하게 한국도 영연방 1사단에 배속이 되어 있는데, 미군에 배속되어 있는 미군의 카투사처럼, 주한 영연방 1사단에 파견된 한국 육군으로 카트콤(Korean Augmentation Troops to Commonwealth Division)이라고 합니다.

영연방
1사단
참전국명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인도 한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파병구분 전투지원 전투지원 전투지원 전투지원 의료지원 영연방배속 영연방배속 영연방배속
파병인원 56,000 8,407 3,794 25,687 627 약1000 6498 83
전사자 1,078 339 23 312 - 자료없음 99 2
실종자 179 3 1 1 - 자료없음 4 -
부상자 2,674 1,216 79 1,212 - 자료없음 336 13
포로 997 26 - 32 - 자료없음 1 -

 

※ 참고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서 파병된 전투지원부대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양국이 통합된 1개 보병 대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하면서 벨룩스 대대가 편성되었다. 벨룩스 대대는 여러 전투에서 탁월한 전술 능력을 보여줬다. 특히, 51년 중공군 2월 공세 당시 임진강 북쪽 금굴산에 주둔하던 벨룩스 대대는 이틀간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해 내면서 영국군 제29여단의 철수를 지원하고 벨룩스 대대 역시 큰 인명피해 없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인해 미국 대통령, 미 8군 사령관, 벨기에 국방장관 표창을 수상했다. 룩셈부르크는 2차례에 걸쳐 100명을 파병하였다. 절대적인 숫자는 크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룩셈부르크는 세계 최소 국가 중 하나로 1950년 당시 인구가 약 29만여 명에 불과했음에도 총 100명을 파병하면서 인구비례로 보면 참전국 중 가장 많은 병력을 보냈다. 벨룩스 대대는 총 3,598명이 참전하여 사망 101명, 부상 349명, 실종 4명 등 총 455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_위키디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참고자료] 한국전쟁 전투지원 파병국 현황을 보겠습니다.

파병 국가
파병인원
전사자
실종자
부상자
포로
미국
1,789,000명
36,940명
3,737명
92,134명
4,439명
영국
56,000명
1,078명
179명
2,674명
997명
캐나다
25,687명
312명
1명
1,212명
32명
터키
14,936명
741명
163명
2,068명
244명
호주
8,407명
339명
3명
1,216명
26명
필리핀
7,420명
112명
16명
229명
41명
태국
6,326명
129명
5명
1,139명
-
네덜란드
5,322명
120명
-
645명
3명
콜롬비아
5,100명
163명
-
448명
28명
그리스
4,992명
192명
-
543명
3명
뉴질랜드
3,794명
23명
1명
79명
-
에티오피아
3,518명
121명
-
536명
-
벨기에
3,498명
99명
4명
336명
1명
파랑스
3,421명
262명
7명
1,008명
12명
남아프리카
826명
34명
-
-
9명
룩셈부르크
83명
2명
-
13명
-

 

▼ 기념비의 이름은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비(坡州 英國軍 雪馬里戰鬪碑)입니다. 1957년에 건립되었습니다.

 

▼ [자료사진_BBC] 글로스터부대의 이런 저런 모습을 흑백사진으로 보겠습니다

 

▼ 영국군이 쉬면서 차를 끓이고 있는데, 영국군은 홍차를 좋아해서 항상 티타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 적성지구에서 임진강을 보는 모습입니다.

 

▼ 글로스터부대가 센츄리온전차를 따라서 북진하고 있습니다.

 

▼ 적성전투(설마리전투) 10일 전에 고지의 참호안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글로스터 대대의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 [자료사진_위키디아] 영군군의 보병들이 주력으로 쓰던 소총은 리-엔필드소총으로 연발식 볼트액션 소총입니다. 연발사격이 불가능 할 것 같지만, 미군의 M1 소총과 비교해도 연발사격 능력은 비슷했다고 합니다. 빠른 장전을 위해서 방아쇠는 세 번째 손가락(중지)으로 당겼다고 합니다.

 

▼ 글로스터셔 연대는 1951년 4월 임진강 전투에서 영광의 글러스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 전투지원 포병대 및 박격포 부대의 전투지원 모습입니다(설마리 전투 당시의 사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 설마리 전투에서 탈출에 성공한 부대원들이 점호를 받고 있습니다.

 

▼ 글로스터대대의 전투가 끝난 후 5주 후에 다시 고지를 찾아 와서 고지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 설마리 전투비는 글로스터 1대대 병사들의 최후의 격전지 고지 아래에 만들어졌는데  이 전적비를 디자인 한 분은 1957년에 한국에 파병되었던 영국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세계적 산업디자이너로 알려진 아널드 슈워츠먼(1936~ )이 디자인하였습니다.

 

▼ [자료사진]  1959년 6월 23일의 모습입니다.

 

▼ [자료사진] 잘 안 보여서 자료사진으로 보겠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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