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이 되면 어김없이 1950년의 6월 25일이 돌아옵니다. 그날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같은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전쟁을 했어야만 했는지 , 또한 이 땅이 아직도 휴전이라는 것을 가끔 잊고 살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태국군 참전 기념비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태국군을 기리기 위해 1973년 10월 1일 세운 현충시설이자 기념비로 준공되었습니다. 태국군 참전기념비가 세워진 포천시 영북면은 태국군의 마지막 주둔지였기 때문에 이곳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 주소는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호국로 3748입니다.
※ 주차장은 참전비 앞 공터 입니다.
▼ 태국군(타일랜드) 참전기념비는 언덕에 있어서 좀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 태국군 참전기념비는 1974년 10월 1일 국방부에 의해서 건립되었으며, 태국군은 1950년 11월 7일에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내용 중에 전사 인원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전사와 부상자를 합한 숫자인 듯합니다
▼ 태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내용을 알아보았습니다
- 참전 경위
태국은 가끔 쿠데타가 일어나서 정권이 바뀌는 일이 있는 나라인데, 1950년도에도 쿠테타 정권이 미국 등 서방국들에게 2차 대전 때 친일, 친나치 주위를 했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있었는데, 그때 정권을 잡은 총리가 친미, 반공주의로 돌아서면서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 초기 태국 왕립 21 연대를 파병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으나, 유엔군이 반격을 하면서 곧 전쟁이 끝나는 것으로 예상되어 파병 규모가 1개 대대로 축소되었습니다
- 참전 현황
1950년~1952년까지 3년 동안 태국군은 전쟁 중 3650명이 참전하여 전사 129명, 부상 1139명, 행방불명 5명 등의 희생을 감내하며 우리를 도왔고 이후 22년간 유엔군으로 주둔(1개 중대)했으며, 1972년에 완전히 철수하였습니다.
- 전투지원현황
태국군은 "왕립 태국 한국 원정군"이라는 부대 이름으로 한국 전쟁에 당시 1개 대대 규모의 육군과 해군, 공군을 파견하였는데, 육군은 연천지구 전투, 폭찹 고지 전투, 김화 351 고지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습니다.
해군은 프리깃함 2척과 수송선 1척을 파견하여 초계 작전이나 호송 임무 등을 수행하였으며, 공군은 1개 수송기 편대를 파견하여 긴급 보금품과 환자 후송 등의 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 왕립 태국 한국 원정군의 견장입니다. 6.25 전쟁의 발발로 태국은 전 세계에 반공주의를 표방하고 미국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함께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파병을 결정하였습니다.
당시 태국군은 10만 명이었는데 그중 1만 5천 명이 지원자 중에서 1천4백91명이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하니 정예부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태국 참전용사들에게는 한국땅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역시 겨울의 추위였습니다. 열대국가인 태국과 평균 섭씨 40도 이상의 차이가 나는 한국의 기후는 파병 초기 태국의 병력들이 걷기는커녕 일어서기도 힘들어할 정도로 가혹했다 합니다.
사실 한국전쟁에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국제정세에 따라서 파병을 하였던 나라도 있었습니다만, 그런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태국은 미국을 제외한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파병을 결정하였고 한국전 발발 4개월 만에 전선에 투입되어 뛰어난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 [자료:위키백과,UN뉴스] 부산으로 떠나는 수송선에 오르는 왕립 태국 한국 원정군의 모습입니다. 태국군은 11월에 참전을 하였는데, 생전 처음 겪는 추위에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소총을 보면 1차 대전 때나 쓰던 소총인 듯합니다. 이러한 복장과 무장은 미군에 배속되면서 미군식으로 바뀌었습니다
▼ 부산항에 도착한 태국군입니다.
1950년 11월 7일 끄리앙끄라이 아따난 중령이 이끈 태국 보병 제2사단 제21연대 제 1대대 소속 병력이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사진속의 지휘관이 끄리앙끄라이 아따난 중령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6·25 당시 태국군을 지휘했던 '끄리앙끄라이 아따난' 중령은 2016년 국가보훈처가 지정하는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태국군은 처음에는 제187공정연대전투단에 배속되었습니다만, 휴전 때까지 여러 번 배속부대가 바뀌었습니다
태국군은 21 연대 제1대대로 참전을 하였으며, 매년 부대가 교체되었는데, 교체될 때마다 부대 이름은 제2 대대, 제3대대... 이러한 순번으로 대대 이름을 정했다고 하며 1972년 철군할 때의 부대는 제23대대였습니다.
폭찹 전투에서 용맹하게 중공군과 싸웠던 부대는 제3대대였습니다.
▼ 한국 도착 직후인 11월 20일 대구에 위치한 UN군 보충대에서 현지 적응 훈련 중인 태국 제21연대 병사들. 사진으로 봐서는 M1개런디 소총의 분해, 조립 훈련을 받는듯합니다. 처음 겪는 한국의 겨울에 엄청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전쟁기념관 홈페이지]
▼ 태국 해군은 1950년 10월 22일 프리깃함 2척과 수송선 1척으로 구성된 태국 해군 함대는 지상군 1개 대대와 병력과 적십자 의무요원들을 싣고 방콕항을 출항하여 16일간의 항해 끝에 11월 7일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태국 함대는 프리깃함 프라세호와 방파콩호와 수송선 시창호와 덴마크 선적의 허트메르스크호로 편성되었습니다.
1951년 1월 7일(07시) 동해안에서 작전중에 풍랑에 표류하다 해변에 좌초되었던 프라세호(Prasae).이며, 태국에 전시용으로 남았습니다
프라새는 처음에는 삿타히프 해군 기지에 기념물로 보존되었다가 라용 주 프라새 강 하구로 예인되어 2003년 12월 27일 프라새 강 공동체 위원회에 의해 "HTMS 프라새 기념물"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 태국 해군은 프라세호의 좌초 이후 미 해군으로부터 2척의 프리깃함을 이양받았고 이를 프라세||호와 타 친호라고 각각 명명했다. 타친호(Tachin)와 프라세 ||호(Prasae ||).
▼ 왕립태국공군은 수송기 C-47를 지원하였는데, 주로 전쟁물자등을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대구공군기지에서 주둔하였습니다. 조종석 아래에 Alley cat(길냥이)를 마스코트로 새겼습니다
▼ [자료사진] 태국군이 38선 표지석에서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자료사진] 휴전회담이 지지부진할 때, 고지전으로 피아간에 무수한 인명이 죽어 나가던 때의 연천, 철원지역의 작전지도입니다. 백마고지와 멀지 않은 곳에 폭찹 힐이 보이는데, 폭찹 힐에서 태국군은 중공군을 맞아서 엄청난 용맹을 보여주고 리틀 아이거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태국군의 전과는 수없이 많지만 그중 아마 가장 유명한 전투는 중공군을 상대로 1952년 10월 31일부터 11월 11일까지 펼쳐진 "폭 찹 힐"(Pork chop hill) 사수전일 것입니다.
태국군과 중공군이 벌인 전투에서 중공군은 정찰 2회를 포함한 총 5회의 공세를 펼치며 태국군 1개 대대가 점령한 지역을 탈환하려 하였지만 태국군의 무용으로 500명이 넘는 전사자와 350여 명의 부상자를 내며 번번이 가로막히고 말았습니다.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싸워 고지를 지켜낸 태국군의 용맹은 이 고지전에서만 1명의 Legion of Merit 훈장, 12명의 은성 무공훈장 (Silver Star), 26명의 동성 무공훈장 (Bronze Star) 수훈자를 배출함으로써 널리 알려졌고 작은 체구의 병사들이 호랑이처럼 무섭게 싸운다는 의미로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리틀 타이거" (Little Tigers)라는 별칭을 붙여주기도 하였습니다.
돼지갈비같이 생겼다 하여 (돈폭찹 언덕)으로 부르는 255 고지는 1951년부터 휴전이 될 때까지 중공군에 대항하여 미군, 태국군, 콜롬비아군, 한국군 등 참여한 다국적군에 의해 십여 번의 뺏고 뺏기는 전투 끝에 결국은 미군에서 포기하고 말았으며, 폭잡힐(255)의 위치는 지금의 연천군 천덕산 부근이며 비무장지대에 있다고 합니다.
▼ [자료사진] 태국군이 50mm(?) 박격포 사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은 산악전이 많아서 저런 작은 박격포가 위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2명이 잽싸게 쏘고, 도망가면 위치를 찾기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 [자료:위키리스트] 태국군은 아니지만, 폭찹 힐 사진을 참고적으로 보겠습니다. 철원지역의 고지 전투는 워낙에 오랜기간동안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여러나라의 군인들이 뒤섞여 중공군을 상태로 전투를 벌였습니다. 사실 고지전투는 그야말로 사람을 소모시켜 버리는 불랙홀같은 전투였습니다.
▼ 폭찹힐 전투는 워낙 유명하여 1959년 미국의 배우 그레고리 펙의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 전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의 사진인데. 펜스 부통령의 아버지 에드워드 펜스(1929~1988)는 한국 전쟁 당시 미 육군 소위로 참전하여 폭찹 힐 전투에서 치열하게 싸운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 포천에서 주둔하던 때의 태국군입니다. 자료를 인용하여 태국군이 UN군으로 남아서 포천에 주둔하게 된 이유를 알아보았습니다
- 6·25 끝나고도 20년 더 한국에 남아 UN군 방어작전 수행
- 3년에 걸친 6·25 전쟁이 끝났지만 태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태국군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이후 햇수로 20년, 1972년 6월 11일까지 경기도 포천시 운천면, 강원도 철원 일대에서 UN군의 일원으로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미국군을 제외한 모든 외국 군대가 철수했지만 태국군이 20년을 더 남았던 이유는 우선 UN군의 요청 때문으로 전해진다. 당시 UN군 사령부의 위상 때문에 미국 외의 연합군 병력이 필요했는데, 6·25 전쟁 동안 ‘리틀 타이거’로 불리며 용맹함을 보여주었던 태국군에게 중부전선의 경계임무를 요청한 것이다.
이와 함께 당시 태국은 필리핀과 함께 아시아의 양대 선진국으로 막강한 군대를 보유했던 만큼 장기간 한국 파병으로 국가적 위상을 높이고 군사훈련 차원에서 한국 주둔의 필요성도 작용했다고 한다.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 [자료:국방부] 주한 태국군의 정식 철수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1972년)
▼ 태국군 참전기념비의 향상은 소총의 개머리판 세개를 겨쳐 놓은 듯한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 기념탑의 형상은 마치 소총의 개머리판처럼 생겼습니다.
▼ 포천의 참전기념비와 똑같이 생긴 기념비가 태국 촌부리에 있습니다 촌부리의 태국 참전기념비는 1974년에 세워졌습니다
▼ 참전기념비 옆에는 태국식 사원이 있는데, 이 태국식 사원이 세워진 이유는 건립비에 있습니다. 처음부터 태국식 사원이 있었는데, 1994년 6.25일 한국을 방문한 릭파이 수상이 기존 사원을 보고 태국식 전통양식으로 다시 지으라고 하면서 지금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 중인 태국의 릭파이 수상이 1994년 6월 25일 태국 국방장관 겸 태국 재향군인 위원회 의장인 위치 쑥막 대장에게 태국 국왕 전하의 즉위 50주년을 기념하여 본 건물을 태국 전통양식에 따라 전면 개축할 것을 지시함.
이에 국왕전하의 후원을 받는 태국 재향인회가 본 건물 개축 및 대한민국 정부에의 이양을 책임짐.
▼ 내부의 부처님 모습입니다. 한국의 부처님과는 많이 다르게 보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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