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에는 유난히 참전기념비가 많습니다. 가평을 여행하면서 보니 6.25전쟁(한국전쟁)때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특히 영연방연합군(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의 신들린 방어전투가 눈길을 끕니다.
가평전투가 벌어졌던 가평시 북면에는 호주군,뉴질랜드군의 참전기념비가 함께 있어서 찾아가 봤습니다
대부분의 격렬한 방어전투는 1951년 봄(4월)에 중공군의 춘계공세 때, 국국6사단이 사창리전투에서 패하고 꽁지 빠지게 후퇴를 하면서 영연방군이 후퇴작전을 지원하게 되면서 발생했다는 알게 되었는데, 그때 국군 6사단이 사창리에서 영국군이나, 호주군처럼 죽자고 싸웠다면, 전쟁의 상황은 훨씬 좋았겠다 싶습니다.
▼ [자료사진] 길옆에 전투기념비가 있으며, 주차장도 있습니다.
▼ 호주,뉴질랜드,프랑스군의 참전기념비의 위치 지도입니다.
▼ 호주군참전기념비와 뉴질랜드군의 참전기념비는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호주군참전기념비는 1963년(1983년 재건립), 뉴질랜드군 참전기념비는 1963년에 건립되었다가 1988년에 재 건립되었습니다.
▼ 가평전투(1951.4.23~25)에서 중공군(제118사단)은 만만하게 가평천을 따라서 서울방향(양평)으로 내려오다가 영연방군에게 걸려서 1만명 이상이 죽었으며, 가평전투에서 호주 3대대는 전사 32명, 부상 59명의 피해를 보았습니다.
▼ [자료:나무위키] 오스트레일리아군 참전과정을 알아보았습니다.
1950년 6월2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안이 결의되었는데, 이때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이 안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고 즉각적으로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다.
호주 정부는 6월 30일 영연방 극동해군사령부(홍콩)에 파견되어있던 2척의 구축함을 미국 극동해군사령부(일본)에 파견하였고 뒤이어 7월 1일 제77전투비행대대를 미 극동공군사령부로 급파하였다.
- '50.06.30 : 해군 구축함 '바탄 호(Bataan)'와 프리깃함 '숄헤븐 호(Shoalhaven)'(홍콩 ---> 오키나와로 이동)
- '50.07.01 : 공군 77전투비행대대(일본 이와쿠니(Iwakuni) ---> 7전투비행대대를 미군의 제5공군에 배속
-'50.09.27 : 보병 1개 대대(제3대대,960명)가 먼저 부산항에도착, 이후 2대 대대로 전투임무 수행(총 2,282명)
▼ 전투기념비는 먼저 1963년 4월 24일 유엔한국참전국협회에서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1983년 2월 27일 가평군에서 재 건립하였습니다.
▼ 가평전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영연방 제27여단이 1951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가평 일대에서 중공군 제118사단의 공격을 방어한 전투.
영연방 제27여단은 1951년 4월 22일 국군 제6사단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하여 가평 일대로 진출하였다. 여단은 캐나다 대대를 가평천을 감제할 수 있는 좌전방 내촌(內村) 부근의 677고지에, 호주대대를 가평 계곡을 통제할 수 있는 우전방 죽둔리의 504고지에 배치하는 한편 아질 대대를 예비로 가평 부근에 집결 보유하였다.
그리고 여단에 배속된 미 전차 제72대대 1개 소대를 죽둔리에 배치하였다.사창리를 돌파한 중공군 제118사단이 4월 23일 야간공격을 재개하자, 국군 제6사단은 경계부대인 미들섹스 대대와 함께 철수하여 가평 북쪽 가평천변에 배치되었다.
중공군은 호주대대의 배치 상황을 모르고 신속히 가평을 점령할 목적으로 종대대형을 유지한 채 도로와 계곡을 따라 내려 왔다. 우전방 호주대대는 대대의 화력은 물론 지원된 전차 및 포병화력을 기습적으로 집중하여 적을 격퇴하였다.그러나 중공군은 4월 24일 01:00경 전방에 배치되었던 전차소대가 재보급을 위해 철수하자 즉시 2개 대대로 포위공격을 기도하였다. 반면 호주대대는 통신이 두절되어 전방중대와 연락은 물론 포병의 화력지원도 요청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후방의 대대지휘소와 박격포진지마저 피탈되어 최악의 상황에서 근접전투를 펼치게 되었다. 대대는 포위된 상황에서도 일부 진지가 피탈되면 즉시 역습으로 회복하면서 새벽까지 504고지의 방어진지를 고수하였다.
날이 밝아 아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이 집중되자, 중공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다수의 사체를 유기한 채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즉시 추격작전을 펼친 영여단 수색대는 죽둔리 부근에서 중공군 40명을 생포하였다.전반적인 상황을 분석한 영 여단장은 적이 일시적으로 철수하였지만 이 지역에서 장시간 체류하면 오히려 피해만 증가할 것으로 판단하고, 호주대대를 미들섹스 대대 후방으로 철수토록 하였다.
대대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하여 오전에 연료 보충과 장비 점검을 완료한 미 전차 소대가 복귀하여 화력으로 중공군의 추격을 저지하였고, 제16포병연대도 연막탄과 고폭탄을 사격하여 적의 시계를 차장하고 대대의 철수를 지원하였다.중공군은 23일과 24일 양일 동안 비교적 기동이 용이한 가평천 골짜기를 따라 진출하여 서울∼춘천도로의 차단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여단의 강력한 저지작전과 포병의 화력지원에 많은 인명 피해를 입게 되자 25일 새벽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따라서 적의 유엔군 전선 분할 기도는 완전히 좌절되고, 아군은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다.
영연방 제27여단은 3일간의 혈전을 종료하고 25일 밤에 양평으로 철수하였고, 부대명칭도 영연방 제28여단으로 개칭하였다. 아군은 사창리가 돌파되면서 가평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으나 영 제27여단의 선전으로 가평을 고수하여 중공군의 전선분할 기도를 좌절시켰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가평지구전투(加平地區戰鬪))]
▼ 일본에 주둔해 있었던 왕립호주 3연대(3대대,960명) 병사들이 1950년 9월 27일 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곧바로 북진중인 미군을 따라서 전투에 참여하게 됐으며, 사리원 전투(북한 황해도)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 [자료:호주전쟁박물관] 가평전투가 벌어진 계곡의 모습이며, 호주군이 방어전투 배치를 하였던 죽둔리 고지의 모습입니다 사진자료에 설명을 기준으로 3대대의 중대별 추정 배치위치를 보겠습니다.
▼ [자료:호주전쟁기념관] 전투상황도를 보면 중공군의 진격로(붉은점선)를 사이에 두고 호주군(녹색)과 캐나다군(주황색), 그리고 후방에 영국군(청색)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3일간이나 중공군을 맞아서 작살내버렸습니다
▼ [자료:가평의회] 호주군은 죽둔리 504고지에서 중공군을 맞아서 신들린 방어전을 치러 냈습니다.
▼ [자료:호주 전쟁기념관] 전투배치를 마친 호주군(가평전투가 아닐 수 도 있음)
▼ 호주군 3대대의 방어전투 모습입니다(가평전투가 아닐 수 도 있음)
▼ 가평전투의 영웅들을 보겠습니다. 이제 거의 다 돌아가시고 살아계신 분이 몇 분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평생 가평을 잊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3 RAR)의 3대대, B중대, 4소대
-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3대 대원들에게 대통령을 표창을 수여할 때의 모습입니다(소장은 미군 존 오다니엘 소장)
- 가평전투의 영웅이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으로부터 미국 대통령 표창장을 받고 있습니다.
▼ 지옥에서 중공군들을 물리친 왕립 호주연대 제3대대 1소대의 영웅들입니다.
▼ [자료:연합뉴스] 1963년 4월 24일 가평 호주 전투기념비 제막식의 모습입니다. 이때 뉴질랜드군 참전기념비도 같이 세워집니다. 지금과는 많이 다릅니다.
▼ 호주군 참전기념비 뒤에 주차장이 있습니다.
▼ [자료사진] 탑의 꼭대기에 있는 동판의 그림을 자료에서 찾아 보았습니다_호주국장(Coat of Arms of Australia)
▼ 오른쪽에 보이는 八자 모양의 낮은 기념비가 1963년 처음 세울 때의 기념비입니다
▼ 호주군의 피해현황을 보면 자료마다 숫자가 많이 틀려서 정확한 근거의 의한 숫자를 확인하여 보았습니다
※ 호주군 루빈 본부대장의 설명이랍니다(오마이뉴스), 참전한 재향군인의 자료이니 정확할 것으로 보입니다.
- 호주 육해공군이 3년 동안 기록한 사상자 : 전사 339명, 부상 1216명, 실종 43명, 포로 30명. - 가평대대(3대대)가 3년 동안 기록한 사상자 : 전사 198명, 부상 892명, 실종 38명. - 가평대대가 '가평전투'에서 기록한 사상자 : 전사 32명, 부상 59명, 포로 3명. |
▼ 1963년 에 처음 세웠던 기념비의 모습(처음에는 왼쪽 한 개)입니다. 검은 돌(烏石)이라서 반사광도 있고, 조금만 더러우면 글씨를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 [자료] 초기에 세웠던 3대대의 가평전투 기념비 기념비입니다. 뒤에는 가평전투시 영연방 부대의 배치도입니다. 영연방 연합군(영연방 1사단)은 호주,뉴질랜드,카나다,영국군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호주.뉴질랜드 참전비의 위치가 1951년 4월 23~25일에 있었던 가평전투의 현장인 듯합니다.
▼ 동판은 좁고, 새겨 넣을 내용은 많고, 예전에는 바탕색이 검은색이었는데, 바탕색을 붉은색으로 칠하니까 더 안 보입니다. 2000년 6월에 만든 호주 재향군인들의 기념비도 있습니다. 호주 재향군인들에게는 한국전쟁, 특히 가평전투는 무지막지한 중공군을 상대로 2박 3일 동안 전투를 별여 승리한 전투여서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 [자료:가평군] 호주 및 뉴질랜드에 한국전 참전기념비의 현황을 보면 여러 곳에 참전기념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기념비들은 가평군에 지원한 가평석으로 세워졌습니다.
▼ 호주군 참전비와 마주 보고 있는 뉴질랜드 참전기념비입니다. 호주군 참전기념비에 비해 크기가 많이 작습니다.
▼ 뉴질랜드군의 한국전쟁 참전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 1950년 06월 27일 :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전투 지원 요청에 따라 1950년 6월 29일에 참전을 결정한다
- 1950년 07월 03일 : 순양함(프리깃함)_푸카기(Pukaki)호/투티라(Tutira)호) 오클랜드(Auckland) 군항을 출발
- 1950년 07월 30일 : 순양함 두척 한국해역에 도착 및 작전개시
- 1950년 07월 27일 : 한국전쟁에 파병할 포병부대를 창설후 훈련 및 교육(5,982명 지원, 1,000명 선발)
- 1950년 11월 30일 : 25파운드 포를 비롯한 중장비를 화물선인 겐지스(Ganges)호에 실어 출발
- 1950년 12월 10일 : 포병부대(16야전포병연대)를 한국으로 파병,포대명은 Korean Force (약칭 K-Force)
※ 16야전포병연대는 웰링턴(Wellington) 항에서 여객선 오몬드(Ormonde) 호 편으로 대한민국 부산항으로 출발
※ 16야전포병연대는 본부 및 근무 포대(장교 38명과 사병 640명)와 본부포대 및 4개 포대/25파운드 포 24문
- 1954년 11월 : 지상군 철수
- 1954년 03월 02일 : 해군철수
▼뉴질랜드는 지상군으로 보병을 파병하지 못했고 대신 포병(제16포병연대)을 새로 구성해서 파병했습니다.
제16야전포병연대는 장교 38명과 사병 642명으로 본부 포대와 3개 포대로 편성된 중령이 지휘하는 대대급 규모였으나 연대로 호칭되었습니다. 제16야전포병연대는 영연방군이 주력으로 사용하는 25파운드 포로 무장하였는데, 특이하게 포의 구경으로 표시하지 않고, 포탄의 무게로 구분한 것이 특이합니다.
▣ 25파운드 포의 제원은...
- 구경(87.6mm), 사거리(12km), 포탄중량(11.3kg), 운용인원(6명)인데, 미군의 구경 105mm에 해당하는 포인데, 발사속도가 무지 빨라서 적들은 자주포인 줄 알았답니다.
▣ 참전 연인원(3,794명)
- 포병 (1,389명)
- 해군 함정 2척
▣ 피해현황
- 전사(23명), 부상(79명), 실종(1명)
▼ 뉴질랜드 참전비는 처음에 1963년 4월 24일에 건립하였으나, 1988년 9월 23일 가평군이 재 건립하였습니다.
▼ 뉴질랜드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의 주요 전투 활동
1951년 4월 가평전투에서 영국군 미들섹스(Middlesex) 연대 제1대대와 아길(Argyll) 연대 제1대대, 호주연대 제3대대에 대한 화력 지원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중공군 공세를 저지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후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는 마량산 전투, 제임스 타운선 방어 작전 등에서 영연방 제28여단에 화력 지원을 수행하면서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 가평전투에서 뉴질랜드군은 신들린 포술로 중공군의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 [자료] 뉴질랜드군의 제16포병연대를 사진자료로 통해서 보겠습니다.
- 1950년 12월 10일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먼 싸움을 위해 웰링턴항에서 출항하려 하고 있습니다.(여객선 오몬드호)
- 제 16 포병연대(K-Force) 부대원들의 기념사진 입니다(1952년)
- 제16야전포병연대 본부
- 제16 야전포병연대 소속 포병들이 1953년경 주한 연대 본부 키위 힐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 뉴질랜드 왕립포병 16 야전포병연대 소속 마오리족 포대원들입니다.
▼ 임진강에서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입니다. 영연방군은 모두 25 파운드 포를 운용했습니다만. 1980년대에 필드에서 사라졌습니다
▼ 맹렬한 포사격 중인 25파운드 포 (뉴질랜드군 제16포병연대)
▼ 한바탕 쏴 댔는지 포탄 운반상자가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포탄이 작아서인지 6발들이 포탄 상자입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지원사격을 하는데 제16 포병연대는 보통 하루에 4000~5000발을 쐈다고 합니다.
▼ 머나먼 땅에서 스러져간 젊은 뉴질랜드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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