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은 6.25전쟁 이전만 해도 38선이 지나는 지역으로서 북한군과 직접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던 최 전방 지역으로서
가끔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와서 탐색전을 벌이기도 하던 곳이었습니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하고 있는 상태에서 북한군의 침략이 예상되던 1948년에 주요 방어선에 진지를 4개소에 설치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현재의 포천방어벙커 입니다. 나머지 3개의 벙커는 훼손되었습니다.
- 지정구분 :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제578호(2013-12-20)
- 명 칭 : 포천 방어벙커 (抱川 防禦벙커)
- 시 대 : 1950년 6월 25일
- 소 재 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45
▼ 4차선 도로 옆에 벙커가 보입니다. 앞에서 보면 콘크리트 구조물만 작게 보이는데, 내부는 매우 넓습니다.
▼ [자료사진] 벙커의 외부를 정비하기전의 모습입니다.
▼ 지금 이 진지는 포천의 만세교리에 있으며, 6.25 전쟁 전에 북한군의 침투 예상 지점에 미리 설치한 콘크리트 구조물의 진지입니다.
▼ 6.25 전쟁 개전 첫날에 벌어진 방어전투를 만세교리 지연전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북한군과의 전투가 어떠했는지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공격 : 북한군 제1군단 예하 3사단 7 연대
방어 : (구)수도사단(현 제7보병사단) 제9 연대 9대대
상황 : 제 9 연대장(윤춘근 중령)은 전쟁 하루전에 전방의 2대대는 남고 1,3대대만 외출/외박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전방에 전차가 수시로 목격되는 등 적정이 워낙 수상해 1, 3대대 병사들의 외출을 금지하고 영내에서 휴무하도록 조치시킴으로 개전 당일 그나마 지연전투를 할 수 있었으며 약 4시간 정도의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결과 : 개전 당일 국군 9연대 주력을 괴멸시키고 포천을 조기 점령하려던 북한군 3사단은 전방을 맡은 국군 9연대 2대대에 막혀 시간이 지체되었고, 그 사이 제 9 연대의 나머지 대대는 가랑산과 천주산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해 시간을 추가로 벌 수 있었다. 한편 국군 9연대 1대대의 잔여 병력들은 태릉에 집결해 그곳의 사관생도들과 함께 내촌, 태릉 전투를 치릅니다.
▼ [자료:위키백과] 만세교리 전투 상황도를 인용해 보았습니다. 북한군 3사단 7연대가 남하 하는데 맞서서, 국군 9연대 2대대가 만세교와 만세교리에서의 전투상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 만세교를 돌파한 북한군은 08:00경 방어 벙커를 점령합니다.
▼ 벙커에서 전사한 제 9 연대 2대대 장병들의 혼을 위로하는 태극기와 꽃이 놓여 있군요...탱크의 철갑탄을 맞은듯 여기저기 구멍들이 많이 보입니다.
▼ 북한군 T-34 탱크와 맞서기에는 무기가 너무 빈약하였던 국군에게는 콘크리트 벙커도 크게 도움이 안 되었을 것입니다
▼ 벙커 위에서 포천 만세교리 주변을 바라보았습니다. 저 멀리 고개가 보이는데, 저 고개로 탱크를 앞 세운 북한군이 넘어왔으며 사진에서는 안 보이지만, 진지와 고개 사이에는 포천천이 흐르는데, 포천천을 넘으려면 만세교를 지나야 하는데, 국군 제 9 연대 2대대는 만세교에서 북한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시간은 벌었습니다
▼ 벙커는 막아 놓았지만, 그래도 살짝 들어가 보았습니다.
▼ 방어벙커는 철근을 촘촘히 배치하여 약 90cm 두께의 철근콘크리트 벽체를 형성하였고, 여러 가지 모양의 총구가 있으며, 안쪽에서는 총구를 넓게 하여 시야를 넓혔습니다.
1948년에 만든 벙커이지만 70년이 지났는데도 무너지지 않고 튼튼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6.25 전쟁 초기의 교전 흔적을 보는 마음은 많이 아쉽지만, 벙커 안에서 탱크포의 공격에 빈약한 무기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장병들의 공포감은 엄청 심했을 것을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 끝 -
'▣ 마음으로 가는길 > 한국전쟁(6.25)'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평 영연방 참전기념비 (0) | 2022.06.16 |
---|---|
포천 태국군 참전기념비 (0) | 2022.06.11 |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 기념공원 (0) | 2022.05.11 |
연천UN군 화장장 시설 (0) | 2022.04.22 |
오산 스미스 평화관[죽미령평화공원] (0) | 2021.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