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릉(隆陵)은 추존 장조의황제와 헌경의황후 홍씨의 능으로 합장릉의 형태입니다. 융릉은 1789년(정조 13)에 동대문구의 배봉산(수은묘->영우원)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고 원을 다시 조성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고종이 다시 장헌세자의 시호를 장조로 격상시키고, 능호도 융릉이라고 높혔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동원이강릉의 융릉과 건능은 나무숲 건너로 서로 사이 좋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조의 효심이 지금의 융건릉을 남겻습니다.
▼ 능의 역사
1762년(영조 38)에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묘의 이름은 수은묘(垂恩墓)라 하였으며,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1815년(순조 15)에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16년에 현륭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하였다. 그 후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년에 사도세자가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하였다.
▼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이야기
장조의황제(재세 : 1735년 음력 1월 21일 ~ 1762년 음력 윤5월 21일)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1735년(영조 11)에 태어나 1736년(영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3세가 되었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였으며,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다양한 방면에서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에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그를 경계하는 노론 벽파 대신들이 왕세자를 모함하여 영조와 왕세자 간의 갈등이 비롯되었다. 특히 1762년(영조 38)에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는 상서를 올리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왕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왕세자가 명을 따르지 않자 영조는 왕세자를 폐서인 한 후 뒤주에 가두었다.
결국 뒤주에 가둔지 8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1899년(광무 3)에는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장종이라 하였다가 곧 바로 황제로 추존되어 장조의황제라 하였다..
▼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가계도를 참고로 만들었습니다
▼ 금천교를 건너서 신들의 정원으로 들어 갑니다.조선왕릉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확실히 합니다.
▼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다는 뜻이 있는 곤신지입니다. 풍수적 논리에 의해서 만들어진 연못입니다
▼ 융릉의 홍살문 앞입니다. 대체로 수라간,수복방이 복원되어 있으며, 조선왕릉의 기본구조는 똑 같습니다.
▼ 검은 전돌로 만들어진 배위 입니다. 왕이나 제관이 능에 와서 처음으로 4배를 하는 곳입니다
▼ 홍살문 너머로 수라간이 보입니다. 현재 조선왕릉의 수라간이나, 수복방들은 한국전쟁중에 모두 불타버리고 장기간 방치 되었다가, 최근에서야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 한 건물입니다. 수라간은 제례에 쓰이는 음식물들을 간단하게 데우는 곳 이라고 합니다.
▼ 정자각과 능침이 보입니다만, 왕릉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들어가 볼 수 가 없습니다.
▼ 향로와 어로의 양 옆으로 박석길이 보이는 변로라고 하는 길입니다. 제례에 참석하는 신하들이 양 옆으로 걷는 길인듯 합니다. 대부분 왕릉에는 향로와 어로만 있는것이 대부분이지만 드물게 변로가 있는 왕릉도 있습니다.
▼ 배위가 검은 벽돌로 덮혀져 있는데 원래는 박석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 수라간의 옆모습입니다. 굴뚝이 보입니다
▼ 정자각의 여러 모습들 입니다.
▼ 능침으로는 올라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조선왕릉 사이트에서 자료 사진들을 인용하였습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는 융릉의 인석(병풍석을 고정하는 만석을 지지하는 돌)은 연꽃모양으로 참 아름답습니다
▼ 융릉의 표석은 2개입니다 왼쪽은 조선시대때의 표석이고, 오른쪽은 대한제국때의 표석입니다.
▼ 표석에는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릉원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추승비에는 "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추승비는 고종때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로 하고 3년째(광무3년)에 세웠습니다
▼ 멀리 능침을 바라봅니다.
▼ 정조의 능침인 건릉으로 넘어가는길에서 보는 소나무 입니다. 정조가 여름에 현릉원에 능행차를 왔을때 송충이가 하도 많아서 그냥 씹어서 죽였더니, 그 다음 부터 송충이가 없어졌다는 전설은 참 유명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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