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태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세번째 왕비인 문정왕후의 릉(陵)입니다. 태릉(泰陵)은 잘 몰라도 태릉선수촌은 잘 알고 있는 곳 입니다. 원래 태릉과 강릉(康陵)-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쌍릉)은 한 능역 안에 있는 동원 이강릉이었는데, 중간에 태릉선수촌이 들어 오는 바람에 능역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조선왕릉전시관을 보고 나와서 여유 있게 둘러 보면 됩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 백과에서 인용 하였습니다 >>>

 

이제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인 금천교를 건너서 신들의 영역인 홍살문 앞에 왔습니다. 왕릉 앞에 서 본지도 수십년은 지난 것 같은데, 지금의 왕릉를 보는 감회는 남다른 것 같습니다.

 

서울 태릉과 강릉의 지도입니다. 태릉과 강릉을 합쳐서 태강릉이라고도 했는데, 지금은 서울 태릉과 강릉이라고 부릅니다.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었는데, 중간에 태릉 선수촌이 능역을 갈라 놓았습니다. 태릉에서 강릉으로 직접 가는 길은 10월 부터 태릉 선수촌 뒷길로 갈 수 있답니다.(※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한 능역 내에 있지만,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석물을 배치한 능)

 

 ▼ 능의 역사

 - 1565년(명종 20)에 문정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 산릉자리를 중종의 정릉(靖陵) 부근으로 하였다가(신정릉(新靖陵)), 명종의 반대로 산릉자리를 다시 정하였다. 이후 현재의 자리로 산릉이 결정되면서 능의 이름을 태릉(泰陵)이라 하였다.

 

원래 문정왕후는 남편인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을 소원하여,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하여 장경왕후(두 번째 왕비)의 능 옆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현재의 선릉 동쪽부근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나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는 자리였기 때문에 문정왕후는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문정왕후(文定王后) 이야기

문정왕후 윤씨(재세 : 1501년 음력 10월 22일 ~ 1565년 음력 4월 7일)는 본관이 파평인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부인 이씨의 딸로 1501년(연산 7)에 태어났다. 1515년에 중종의 두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517년(중종 1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경원대군(명종)이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국은 불안정하여 매관매직이 빈번하였고,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문정왕후는 불교에 관심을 두어 불교부흥에 앞장서 선교양종 및 승과제도를 부활시켰고, 보우를 가까이 하여 봉은사의 주지로 임명하였다.

 

8여년의 수렴청정을 끝내고 명종이 친정하였으나, 실질적인 권세는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그 후 1565년(명종 20)에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 신정왕후는 조선 11대 중종의 세번째 왕비 입니다. 세번째 계비 였지만, 중종 사후에는 13대 명종의 어머니로서, 섭정를 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왕비였습니다. 중종과 문정왕후의 계보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태릉에 가는길은 신들의 정원답게 능원이 아름답게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금천교를 건너면 홍살문 앞에 다다릅니다.

 

▼ 조선왕릉에 유난히 소나무가 많은 까닭은 소나무가 주술적인 의미가 있어서 능 주위에 많이 심었다고 합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들어가는 길은 박석으로 곧게 뻗어 있습니다만, 좌,우의 높이가 다릅니다. 왼쪽의 길은 향로(香路)라고 하며 향과, 신위를 모신 제관들이 걷는 길이고, 오른쪽은 왕이 걷는 길입니다. 왕릉을 보러 갈 때에는 향로를 걷지 말아야 합니다.

 

정자각입니다.월대 위에 잘 만들어진 정자각은 고무래 정(丁)자 형태로서 제례는 왕릉 앞에서 지내지 않고 정자각에서 지냅니다. 기둥만 있고 삼면이 비어 있는 곳이 배례청이며, 모든 제관들이 여기서 제례를 진행 합니다.제실 북쪽으로는 신로(神路)를 통해서 혼이 내려오고, 올라가도록 만든 돌다리가 있습니다.

 

정자각은 맞배지붕이며, 비람을 막을 수 있도록 바람막이(방풍널) 설치되어 있습니다.

 

서쪽에서 찍은 사진인데 계단이 하나 있습니다 서계(西階)라고 하는데, 제관들이 축문을 태우러 내려 오거나, 제례를 마친 왕이 내려 오는 계단 이라고 합니다.

 

동쪽에서 보면 계단이 두개가 있는데, 모두 동계라고 하며 각각 모양이 틀립니다. 오른쪽 큰 계단은 신계 또는 운계라고 하면 소맷돌에 구름이 양각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향로와 신위가 오르는 계단이고, 오른쪽 계단은 어계라고 하며, 왕이나 제관들이 오르는 계단입니다.

 

정자각의 배례청에서 보는 정면의 모습입니다.

 

정자각에서 홍살문을 바라보며 담은 모습입니다.

 

정전의 여러 모습입니다.

 

정전의 북쪽문을 열면 능이 곧바로 올려다 보입니다.

 

정자각의 정전 북쪽 문 앞에는 돌길이 보이는데, 사초지까지만 길이 있습니다. 신로(神路)라고 하며, 혼이 정전으로 내려왔다 올라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태릉의 능침에는 올라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조선왕릉 사이트에서 몇장 인용하였습니다.

 

병풍석의 문양은 참! 아름답습니다. 12개의 병풍석에 각각 12지신를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앞에서는 볼 수 없는 석물들과 곡장 부분의 자료사진 올렸습니다.

 

망주석과 장명등의 모습인데, 장명등은 8각으로 화려한 모습입니다.

 

▼ 양쪽의 망주석만 자세하게 자료사진으로 봅니다.

 

문석인과 무석인의 대표사진을 골라서 편집해보았습니다.

 

곡장안에서 봉분을 지키는 석양과 석호의 모습입니다만, 석호의 모습은 참 재미난 모습입니다.

 

왕릉 주위에는 소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비각주위에는 아주 오래된 향나무가 몇 구루가 보입니다.

 

비각 아래는 수복방이라고 하며, 능지기가 거처하던 곳 입니다. 난방을 위해서 인지 아궁이와 구들방이 있습니다.

 

왕릉 아래 오른쪽에 있는 비각입니다. 모든 능의 오른쪽에는 비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표석의 앞면에는 능주의 묘호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능주의 생애가 새겨져 있습니다.

 

신들을 모시는 왕릉의 간소하고 절제된 건물과 신들의 정원인 만큼 잘 꾸며진 천상의 후식처로써 후세의 산 사람들도, 그 음덕으로 번잡함을 잊고 잠시 마음의 짐을 내려 놓고 머물다 갑니다.

 

능지기가 머물던 수복방의 모습입니다. 수복(守僕)이라는 직책은 능,원,묘등이나, 제사일을 수행하던 말단 구실아치라고 합니다.

구실아치는 관청에 딸려 있는 말단 관리였는데, 양민보다도 낮은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횡포가 대단하였다고 합니다. 민란이 일어나면 수복들을 먼저 처단하였다고 하니, 수복들이 지방관리 밑에서 못된 짓을 많이 했던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지금의 모든 수복방은 발굴 조사를 거쳐 다시 지은 건물입니다.

 

수복이 기거하던 방은 구들이 있어서 기본적으로 난방이 되는 구조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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