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산(홍성)에는 과거 90여 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할 만큼 불교기운이 충만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대표적인 용봉사만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용봉산에서 수암산까지 포함하여 산사가 그만큼 많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용봉사의 언제 누가 창건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유물로 볼 때 백제 말기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하고 있으며, 여러 불교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역사 깊은 산사입니다.


▼ 용봉산용봉사의 일주문옆으로 자동차가 드나드는 길이 있고, 산사로 드나드는 옛길은 그대로 좁고 구불구불하게 올라갑니다.

 

▼ 일주문을 조금 지나 면 왼쪽 암벽에 마애불(마애여래입상)이 보입니다. 여름에는 자세히 찾아봐야 합니다

 

▼ 멀리서 보면 어느 아마츄어 석공이 바위면에 대충 감실을 파고, 마애불을 새긴 것처럼 허술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마애불은 799년에 조성하여 1220년이 지난 통일신라말기의 작품이며, 어쩌면 용봉사가 창건되기 이전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귀중한 문화재입니다. 

 

▼ 자세히 보면 전형적인 석가여래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가사는 통견으로 보이는데 하반신은 생략한 것인지 마모된 것인지 알아볼 수 가 없습니다.

 

▼ 좌측 어깨 옆을 보면 흔하지 않게 마애불조성 명문이 보이는데, 다른분의 해석을 인용하여 보겠습니다.

 

 

 

※ 마애불조성명문은 3행 31자이며 몇글자는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자료를 보면...

 

- 貞元十五年己卯四月日仁符(入村?) / 정원 15년 기묘 4월일 인부(인촌?)

- 佛願大伯士元烏法師 / 불원대백사 원오법사

- 香徒(行?)官人長珎大舍 / 향도(행?) 관인장진대사

대략 뜻을 보면 정원15년(799년) 4월에  원오법사가 발원하고, 향도 장진대사가 시주(?)하였다 

 

▼ 마애불의 얼굴을 보면, 눈은 가늘고, 귓불은 길에 어깨에 닿아 잇고, 볼살은 두툼하여 상대적으로 입술이 들어가 보이는데, 너무 작아 보입니다. 대체로 잔잔한 미소 띤 얼굴처럼 보입니다.

 

▼ 우측으로 보이는 두기의 승탑(부도)이며, 왼쪽의 부도는 최근 조성된 부도로 보이며, 중화대선사라는 명패를 새겼고, 오른쪽의 부도는 원래의 용봉사 터에서 옮겨 온 것입니다.

 

안내문은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었으며, 부도단이 꾸며진것은 1980년대 전후로 보입니다

 

▼ 원래의 용봉사는 18세기 후반(1905년 추정) 평양조씨(平壤趙氏)가 절을 폐사키고 그 자리에 묘를 썼는데, 용봉사는 원래의 터에서 조금 아래 지금의 자리에 1906년에 재 창건한 것입니다.

 

흥선군(나중에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전하려고 가야사를 불태운 행태와 똑같은 짓을 평양조씨가 했는데, 그 당시의 사대부들이 명당터를 차지하기 위해서 절집하나 없애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안성의 칠장사도 원래의 터는 사대부에게 빼앗기고, 현재의 자리에 재창건한 것입니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용봉사는 조선말에 페사되었다가 1906년에 지금의 자리에 재창건하여, 1980년 무렵에 중창되었고, 대웅전은 1982년에, 1988년에는 축대를 새로 쌓고 극락전, 산신각등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 조선시대에는 용봉산의 옛 이름이 팔봉산이었는데, 절집의 이름은 그때도 용봉사였습니다

 

[자료사진] 1980년대로 추정되는 사진을 보면,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보이는데 지금의 적묵당과 대웅전은 새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뒤쪽에는 용바위 입니다.

 

▼ 용봉사 적묵당

 

▼ 원래의 절터(평양조씨 묘)에서 옮겨온 석조(물통), 석구(절구), 마애(맷돌)이 적묵당 앞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 대웅전은 1982년에 새로 지은 것입니다. 9층석탑은 8각 원당형으로 4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습니다.

 

[자료사진] 용봉사 대웅전의 수미단의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관세음보살상입니다.

 

▼ 괘불지주가 높게 세워져 있는데, 용봉사의 지장전에 있는 영산회괘불탱을 거는데 쓰이는 괘불지주로 보입니다. 그런데 석탑이 가리고 있어서 괘불이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 이 석탑도 풍양조씨 묘 부근에서 에서 옮겨온 석탑일 수도 있겠습니다

 

▼ 용봉사의 배롱나무꽃이 한창입니다

 

▼ 약사여래불은 불두에 맞추어 불신을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 지장전에는 자세하게 알아볼 영산회괘불탱이 있습니다. 지장전(地藏展)은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전에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지옥으로 내려간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며, 보통 시왕전, 명부전의 편액을 달고 있습니다.

 

[자료사진] 지장전의 지장보살입니다(출저는 충남공주불자연합회)

 

▼ 옆문에서 지장전 내부를 보겠습니다.

 

▼ 지장전 내부에서 보이는 이 둥그런 쇠는 쇠북이라고 하는데, 스님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법구이며, 두두리면 징소리처럼 매우 강한 소리가 납니다.

옛날 가요 수덕사의 여승의 가사에서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가 이 쇠북입니다

금고(金鼓) 또는 금구(金口)라고도 합니다

 

▼ 정면에 붙어 있는 보물 영산회괘불탱입니다. 이 그림은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는 모습이며, 대부분의 오래된 사찰에는 영산전이라는 건물 안에 보관을 하며, 절에서 큰 설법행사 있을 때 이 그림을 괘불지주에 걸어놓습니다.

 

용봉사의 영산회괘불탱은 1690년(조선 숙종 16)이 승려화가 여러 명이 그렸으며, 1725년(영조 1)에 일부 고쳐 그렸습니다.

 

이러한 불화는 대부분 그림을 그리는 화승(畵僧)들이 사찰마다 돌아다니면서 그렸으며, 남아 있는 영산회괘불탱은 대부분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옛날 용봉사터(지금의 평양조씨 묘)로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보는 지장전입니다.

 

▼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약병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약사여래입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이 불상을 조각한 석공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으나, 머리 위에 지불돌을 얹어서 생뚱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으로 가는길에 평양조씨묘가 있습니다.

 

▼ 여기는 현재의 용봉사에서 서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이며, 원래의 용봉사터이고 지금은 평양조씨의 묘입니다. 이터가 그렇게 명당이라는 것인가?

 

▼ 묘의 주인은 조선말기 공조참판 평양조씨 趙義純(조의순)과 그의 부인의 합장묘입니다. 아마도 조의순의 자식들이 묘를 쓰려고 용봉사를 페사시켰을 것으로 보이는데, 흥선대원군 생각이 납니다

 

▼ 평양조씨묘에서 바라보는 용봉사입니다.

-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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