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여행은 먼저 내연산 폭포를 먼저 보기로 합니다 .내연산은 육산으로  밋밋하지만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계곡미가 빼어난 12개의 폭포가 이어져 절경을 뽐내고 있는데 이 골짜기를 내연산 12폭포골 또는 보경사 계곡이라 한다. 십리가 넘는 보경사계곡은 관음폭포, 연산폭포, 잠룡폭포 등 크고 작은 수많은 소와 협암,  기와대, 선일대, 비하대, 학소대 등의 기암절벽이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 제 6폭포인 관음폭포 기암 절벽과 현수교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모습이 연출되는 곳 이다. 햇빛이 한창 내리쬐는 시간대라 사진의 명암조절이 쉽지 않았다. 이런 사진은 아침 해뜨기 전에 찍어야 하는데... 많이 아쉽다

 

▼ 보경사 입구에 있는 내연산 등산로와 12폭포 안내도 이며 이날은 등산이 목적이 아닌관계로 연산폭포까지만 다녀왔다. 옆의 사진은 보현폭포 아랫쪽의 계곡이다

 

▼ 보경사를 지나 첫번째 폭포다운 폭포를 만나는데 상생폭포(쌍폭)라 한다

 

▼ 안내 펫말에는 보현폭포라고 써 있는데 가려져 있어서 잘 안보인다

 

▼ 제6폭포인 관음폭포이며 물줄기 옆에 굴은 관음굴이라 한다. 저 현수교를 건너면 연산폭포가 기다리고 있다

 

▼ 시원한 물줄기가 장관인 연산폭포이며 다음 폭포는 여기서는 길을 찾을수 없다. 되돌아서 나와야 한다

 

▼ 상생폭포 아래의 계곡에는 왜 물줄기가 없는가 했더니 계곡에 보를 쌓아 놓고 물줄기를 임의로 돌려서 보경사 앞을 지나 상가로 통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거 정말 너무 하는것 아닌가? 계곡의 식생들은 몽땅 말라죽어도 돼고 절과 상가의 모양새만 좋으면 다인가? 지금 이라도 물줄기 반쯤은 계곡에 돌려줄수는 없는지?, 왜 폭포의 이름에 상생폭포라는 이름이 있는지,,, 군립공원 관계자와 보경사, 상가관계자는 잘 협의해서 계곡의 생태를 살려주는것이 어떠하겠는가?

 

▼ 보경사의 일주문도 어김없이 화려함이 극치를 이룬다.내연산 일대는 군립공원지역이다

 

▼ 보경사는 절 주위에 담장이 없어서 마음이 편안하게 둘러보기 좋은곳이다

 

▼ 보경사 경내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5층석탑

 

▼ 5층 석탑뒤에 자리잡은 적광전

 

▼ 키는 작지만 수령이 만만치 않을것 같은 분재같은 모양의 소나무

 

▼ 대웅전 뒷쪽의 여러 건물들의 모습

 

▼ 대웅전 이 또한 화려하다

 

▼ 7층 석탑인데 특별한 이력이 없는듯 하다

 

▼ 이런저런 모습중 특이하게 당간지주가 눈에 띤다

 

▼ 팔상전등 여러건물들이 일렬로 아담하게 늘어서 있다

 

▼ 팔상전의 모습이며 건물들의 축대는 불국사의 축대모습을 보는듯 하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폭의 그림으로 나누어그린 팔상도를 간직하고 있는 절 안의 건물을 팔상전이라 한다

 

▼ 산신각으로도 불리우는는데 오랜 민간신앙이 어우러져서 생긴 것인듯 하다

 

▼ 원진국사와 고승16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1171∼1221) 신승형의 탑비이다

 

▼ 원진국사탑비의 거북이상인 받침돌인데 많이 마모되었지만 정교한 모습이다

 

▼ 비사리구시라고 하는데 절에서 행사시 밥을 퍼서 담아 놓았던 나무로된 큰 그릇이라 한다.

 

▼ 보경사 경내의 모습들 

 

▼ 범종각

 

▼ 불이문이라 써 있는줄 알았는데...(선설문)

 

▼  일주문의 모습 화려하기가 극치를 이룬다

 

호미곶은 한반도 모형 지형중에서 호랑이 꼬리부분(또는 토끼 꼬리)으로 동외곶(冬外串)·장기곶(長鬐串)이라고도 하며, 원래 생김새가 말갈기와 같다 하여 장기곶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1918년 일제시대때 일본식 표현인 갑(岬)으로 고쳐서 장기갑으로 불리다가 1995년 장기곶으로 변경하여 불리다가 2001년 12월 지금의 이름인 호미곶으로 변경하였습니다.해맞이광장에 왼손과 바다에 조성되어 있는 오른손은 상생의 손이라 한다

 

 

 ▼ 호미곶 민박집에서 일줄을 맞이하면서 담아본 풍경입니다. 때마침 구름도 없고 바다 날씨는 조용해서 큰 행운을 받았던 날이었습니다.

 

▼ 호미곶에 세워져 있는 상생의손이라는 조형물의 모습입니다. 상생의 손 하나는 육지에, 다른 하나는 바다에 세워져 있는데 조형물을 만든 의미는 새로운 밀레니엄(2000년대)를 맞이하여 서로 반목하는 일없이 서로 돕고살자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 호미곶 등대는 조선제국시대인 1901년(광무5년)에 일본수산실업전문대학교 실습선이 대보 앞바다를 항해하다가 암초에 부딪쳐 몰살하였는데 일본은 이 사건이 한국의 해안시설 미비로 발생하였으며, 해난사고 발생책임이 한국에 있다고 주장하여 손해배상을 요구하므로 하는 수 없이 한국 예산으로 일본에게 등대시설을 공사하게 하여 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지은 건물로 건축기술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등탑(燈塔) 내부는 6층으로 각층 천장에는 조선왕실의 상징인 배꽃 모양의 문장이 조각되어 있는 등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등대입니다

 

▼ 호미곶해맞이광장의 모습이며, 상생의손중에서 왼손이 광장에 세워져 있는 모습입니다.

 

▼ 호미곶해맞이광장옆에는 연오랑세오녀상이 있습니다. 이 연오랑세오녀의 전설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지 4년에 동해 해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미역을 따는데 갑자기 웬 바윗돌이 나타나면서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보고 말하기를, “이는 범상찮은 인물이다.”하고 올려 세워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나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역시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바윗돌은 또한 앞서처럼 그녀를 태우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랍고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어 바쳤더니 부부가 서로 만나 그녀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으매 천문을 맡은 관리가 아뢰되,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던 해와 달의 정기가 지금은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생겼사외다."라고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았더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다. 지금에 어찌 돌아갈 것이랴. 그러나 나의 왕비가 가는 생초 비단을 짠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좋을 것이다." 하고 뒤이어 그 생초를 주었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신라로 돌아와 연유를 아뢰어 그의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이후에는 해와 달이 이전과 같았다. 그 생초 비단을 임금의 고방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고방을 귀비 고방(貴妃庫)이라 하고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이라 하였으며 또 도기야(都祈野)라고도 하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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