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여행에 이충무공 전몰유허에 먼저 들려 봤습니다. 이충무공 전몰유허는 노량해전이 벌어진 관음포 앞바다에서 전사한 곳임을 기려서 꾸며 놓은곳입니다. 원래는 이 고장 사람들이 이락파(李落波:이충무공이 전사한 바다)라고 하다가 이충무공의 유해를 처음으로 안치한 곳을 기려서 공식명칭으로 "이충무공전몰유허"라는 명칭을 갖게되었습니다.

 

▼ 이락사 입구의 모습입니다. 이락사(李落祠)는 한문에서 보다싶이, 절이 아니라 이충무공의 혼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이락사는 공이 순국(1598년, 선조31년)한 후 234년후인 1832년(순조32년) 왕명에 따라서 8대손 이항권(李恒權)이 제단을 설치하고, 비와 각을 세웠으며, 이후 대원군이 전국의 향교와 서당을 철폐하는 과정에서 철거되었다가 박정희 대통령때 다시 재정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관음포는 기다란 모양의 반도로써 이락사를 니나서 20분 정도 더 들어가야 하는곳에는 첨망대가 있습니다.

 

▼ 수원에서 통영으로 가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의 중간에 있는 덕유산 휴게소의 조형물입니다. 잠시 쉬어가기에는 아주 좋은 휴게소입니다.

 

▼ 남해대교(1대교)에 도착해서 잠시 남해대교를 바라봅니다. 여기가 바로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던 노량해전이 있었던 노량해협입니다. 이 남해대교는 경남 남해군 설천면(雪川面) 노량리(露梁里)와 하동군 금남면(金南面) 노량리를 잇는 다리로서1968년 5월에 착공하여1973년 6월 22일 준공되었습니다. 남해대교의 제원은 한국 최초의 현수교(懸垂橋)로 길이 660 m, 너비 12 m, 높이 52 m입니다 .  이로써 남해도가 육지와 연결되어, 한려해상국립공원(閑麗海上國立公園) 지역과 남해도 전체의 개발에 크게 이바지한 대교입니다.

 

▼ 남해대교 중간쯤에서 옆지기에게 한장 찍으라고 부탁했더니, 잘 찍었네요. 다리 끝에서 오른쪽으로 들어 갑니다.

 

▼ 이충무공전몰유허지 입구에 있는 이충무공영상관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냥 지나칩니다.

 

▼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안내판이며 그냥 옮겨 적는것 보다는 그냥 사진으로 올려보는것도 괜찮아아 보입니다.

 

▼ "전방급 진물언아사" 전방이 급하니 내가 죽은것을 알리지마라" ~~~ 이충무공의 그때 그말이 들리는듯 합니다.이 글씨는 전 해군참모총장 유삼남장군이 썻다고 합니다.

 

다음에 가보는 곳은 가천 다랭이 마을입니다. 가천 다랑이 마을은 행정 구역상으로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이며 2005년 1월 3일 국가명승 15호로 지정된 곳 으로 원래는 간천(間川)이었으나, 조선 중기때 가천(加川)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랑이 논은 경사가 심한 산간 지역에서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 산비탈을 깍아서 돌로 받쳐서 계단을 만든 농경지로서 약 100여층의 계단식 논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 언뜻 보기에는 조용한 농촌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마을의 주면에는 온통 다랑이논들 뿐입니다.

 

▼ 섬의 왼쪽방향에서 도로를 따라서 가다 보면 전망터인 가천대를 만나게 됩니다. 가천대에서 마을의 전체 모습을 볼수있습니다.

 

▼ 가천다랑이논의 물은 마을의 뒤에 보이는 응봉산과 설흘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벼농사를 짓는데 물의 양은 아주 많았습니다. . 다랑이논의 벼는 바닷바람의 여향을 덜받는 품종인듯, 키가 작은 품종이었습니다.

 

마을의 앞쪽에는 희미하게 가천암수바위가 보입니다

 

▼ 가천암수바위는 전설에 의하면, 조선 영조 27년(1751년) 이 고을의 현령 조광진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에 묻혔는데, 우마(牛馬)의 통행이 잦아 일신이 불편해서 견디기가 어려우니 나를 파내어 일으켜 세워 주면 필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현령이 현몽에 따라 가천에 가서 땅을 파게 했더니 이 암수바위가 나왔다고 합니다.


다음은 보리암을 들려서 보았던 사진들입니다. 경상남도 남해군에 있는 보리암은, 638년 원효대사가 초당을 짓고 수행하다 관음보살을 친견한 후 초당의 이름을 보광사라 칭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연 것에 감사하는 뜻에서 1660년(현종1년)에왕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 이름을 금산, 절 이름을 보리암이라고 바꾸었습니다.

 

1901년과 1954년에 중수하였고, 1969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전국의 3대 기도처의 하나이며 양양 낙산사 홍련암(강원문화재자료 36), 강화군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힙니다.

 


▼ 보리암에 있는 해수 관음상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관음은 33관음이 있는데 그중에 백의관음으로  아이의 출산과 생명을 보살피는 보살로 그 상징적인 의미는 청정을 뜻하는 흰 연꽃 위에 앉아있어 백처존이라고도 불리는 관음상이랍니다. 

 

▼ 금산은 원래 보광산이었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 개국을 하게되면 산 전체를 금비단으로 둘러주겠다고 기도후에 조선을 개국하게되자 산의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바꾸게됬다는 전설이 있는 산입니다.

 

▼ 대웅전 뒤에 보이는 입석은 참으로 위태스럽게 서있는데 마치 사람이 기도하는듯한 모습입니다. 형리암이고 대장봉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 보리암 주위에는 큰 돌들이 많은데 글씨를 새겨놓은 바위도 많이 보입니다.

 

▼ 보리암의 대웅전은 보광전이라고 합니다. 전국 3대 기도처로 유명한 곳인지라 절의 규모도 크고 산세와 어울리게 지어진 건물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 보리는 산스크리티어로서 깨달음으로 도를 이루었다는 뜻으로 한역(漢譯)하여 菩提인데 보(菩;보살보)는 이해가 가는데, 리는 (提;끌제)로 검색이 되는데 또다른 내용이 있는것 같습니다.

 

▼ 산세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기도처인듯 한데 여기서 해뜨는 바라보며 명상을 하게되면 신선이 따로 없을듯 합니다.

 

▼ 어찌보면 망부석인것 같기도 합니다. 형리암이라고 하는데요...대장봉에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 애처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 보리암 주변의 산을 둘러보면 여러보양의 바위들을 볼수가 있습니다. 왼쪽은 상사암이랍니다.

 

▼ 보리암 보광전을 지나서 해수관음상을 보러 갑니다. 계단 양쪽에 있는 큰 돌에는 여러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보리암 불사(佛事)에 보탬이 되신분들의 이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해수관음상을 보니 손에 약병을 들고 잇는듯한 모습이 약사여래불이 생각납니다. 중생의 질병를 구제하는 부처님이라는데, 해수관음은 아이의 출산과 생명을 보실피는 부처님이랍니다.

 

▼ 해수관음상 앞에는 3층 석탑이 있는데 고려 초기의 모습이고, 비교적 온전한 모습입니다.

 

▼ 유홍문상금산(由紅門上錦山) 즉, 홍문으로 통해서 금산에 올랐다는 뜻일것입니다. 주세붕(백운동 서원을 세운 조선중기 학자)이 금산에 오를때 보았던 쌍홍문을 보고서 이 큰돌에 홍문에서 보는 금산의 경치에 감탄하여 이 글씨를 새겼다고 합니다.

 

▼ 금산의 정상에 바라보는 금빛으로 빛나는 바위들을 마지막으로 보고 다시 산을 내려갑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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