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일원의 새재를 중심으로. 1981년 6월 4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도립공원이며 면적은 5.3㎢이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조령()이라고도 한다.

 

풀이 우거진 고개[초점-]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峴(이화현=이화령)] 사이에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로 했다는 설과 새로[] 생긴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로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3년 전인 2006년 8월 21일 주흘산 산행 전, 후 찍어 두었던 사진 중 문경새재 부분만 모아서 정리하였으며 제1관문(주흘관)과 제2관문(조곡관) 사이의 내용만 정리가 되었으며 문경새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문경새재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 제1관문인 주흘관은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조선 숙종34(1708년)년에 설관 하였다 3개의 관문 중 가장 예스럽다.

 

▼ 문경새재 홈피에서 가져왔다, 새재길과 주변의 산들로 통하는 길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주흘관으로 통하는 길의 모습이며 아직은 주흘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장승들이 살짝 보인다.

 

▼ 주흘관 앞뜰에는 왕건의 전투장면의 촬영에 쓰였던 전투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 주흘관은 완벽한 상태로 복원이 되었는데 고증에 의한 기록을 근거로 복원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깔끔하다

 

▼ 주흘관 앞의 해치상이 좀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고 누각은 아담한 모습이다

 

▼ 주흘관을 들어서기 전 다리의 앞뒤로 세워진 해치상

 

▼ 주흘관은 앞과 뒤의 현판의 글씨가 다르다

 

▼ 주흘관을 들어서서 옆에서 본모습이며 성곽의 모습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고 현판은 "영남제일관"이라고 쓰여 있다

 

▼ 문화유산을 잘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도 지금 시대의 몫이므로 잘 관리해 주기 바란다.

 

▼ 주흘관 안에서 성곽을 바라보니, 수원의 화성과 비교가 되는데 번잡한 것이 없어서 마음이 편하다.

 

▼ 주흘관 외부의 오른쪽의 성곽모습.

 

▼ 이제 본격적인 새재라고 표시하는 새재비

 

▼ 선비의 상, 선비란 유교적 학식이 뛰어나며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재야의 학자를 말한다라고 하는데 선비집단이 커져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당파싸움을 하는 등 조선시대 내내 권력의 핵심층이었다.

 

▼ 아마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비석을 한 곳으로 모아서 정리한 듯하다(문경 선정비 군이라고 쓰여 있다)

 

▼ 신, 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곳, 호젓한 냇가 옆에서 업무 인수인계하는 맛이란 어떨까?

 

▼ 사람을 희롱하는 구구리가 살았다니 엄청 큰 놈이었겠다. 우리 표준어로 동사리라고 하며 내 기억으로는 모내기철에 저수지에서 많이 잡아서 수제비 매운탕 해 먹던 기억이 난다.

 

▼ 머리 모양이 구구리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 참고로 구구리는 동사리라고 하는데 물이 좋은 강에 사는 동사리는 주로 얼룩동사리다, 참고로 자료를 캡처한 사진이다. 

 

▼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길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聞喜)"기쁜것을 듣게 된다"는 말은 곧 장원급제일 것이다

 

▼ 용추(龍湫)는 용소(龍沼)와  뜻이 같은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용추라는 곳이 여기저기다.  여기는 KBS드라마"왕건"에서 궁예가 왕건 앞에서 최후를 맞는 장면을 촬영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 원터란 원(院)이란 지금의 여관과 같았다. 화봉원에서 고려의 유희가 시를 읊는 것을 보아 고려 때부터 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근의 기문(記文)에 의하면 나라의 들에는 10리 길에 여(廬-초막)가 있고 30리 숙(宿-여관)이 있었으며, 후세에는 10리에 장정(長亭-쉬는 집) 5리에 단정(短亭-쉬는 작은 정자) 하나씩이 있었는데 모두 나그네를 위한 것이었다.

 

산골짜기 외딴곳에서 해는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고 사람과 말은 지치고 범이나 표범의 두려움, 도둑의 염려 등 길손의 걱정은 이에 더 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조령산성 안에 조령원(鳥嶺院)과 동화원(桐華院)이 있고 현의 서쪽 15리인 이화령 아래 요광원(要光院)이 있었다. 하늘재 밑에 관음원(觀音院)이 있고 현의 북쪽 4리에는 화봉원(華封院)이 있었다고 전한다.-출처(문경새재 홈피)

 

▼ 조령원터 안의 정자와 연못

 

▼ 조산(造山), 말 그대로 인위적으로 만든 산이다.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곳을 보강하고자 하는 의식이 담겨 있으며 문경 지방에서는 골맥이 서낭당으로 불리며 마을 입구나 경계지점에 세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다.

 

그런데 지금 힘 좀 쓴다는 종교단체에서 이러한 조상들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던 돌탑(조산)을 미신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떼로 몰려가서 싹 없애버리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다.

 

그분들 부모님들도 옛날에는 장독대 위에 정화수 떠 놓고 자식들의 무사안일을 빌었을 텐데 그럼 그분들의 부모님도 미신을 숭배했다고 이라고 자기 인생의 기록에서 싹 없애야 하는 것 아닌가?. 내 생각에는 종교는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보면 사람들의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했던 친근한 어감의 주막

 

▼ 새재에서 묵다, 류성룡의 시로 알려져 있으며 율곡이이의 동일한 제목의 "새재에서 묵다"라는 시도 있다

 

              宿鳥嶺 (율곡 이이)

 登登涉險政斜暉   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기우는데

 小店依山汲路微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희미하네   

 谷鳥避風尋樾去   산새는 바람 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村童踏雪拾樵歸   시골 아이는 나무 지고 눈 밟으며 돌아가네

 羸驂伏櫪啖枯草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있고

倦僕燃松熨冷衣    지친 종은 솔가지 지펴 차가운 옷을 다리네   

夜久不眠羣籟靜    잠 못 드는 깊은 밤 적막하기도 한데   

漸看霜月透柴扉    차가운 달만이 점점 사립문으로 뚫고 들어오는구나 

- 아래 사진의 시는 류성룡의 시 "새재에서 묵다"

 

▼ 기름방아돌

 

▼ 다듬지 않은 돌(높이 183㎝, 폭 75㎝ 정도)에 "산불됴심"이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퍽 오래된 조선조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정조 때 별장이 잡인의 통행을 단속할 때 역시 관방(關防) 유지를 위해서는 산불조심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고 일반서민이 잘 알도록 한글 비를 세우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연보호의 시금석(始金石)이고 「조심」을 고어(古語)인 「됴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기 드문 한글 비이며 지방문화재 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출처(문경새재 홈피)

 

▼ 선조 27년(1594)에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이라고도 한다. 숙종 때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 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 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그 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鳥谷關)이라 개칭하였다

 

▼ 성문 앞의 다리는 그 옛날에는 나무다리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성문 앞에 적들이 쉽게 넘을 수 없도록 깊게 판 것을 해자라고 하는데 지금은 그 효용성이 없어졌으므로 돌로 된 다리로 대체하였다

 

▼ 다리 앞뒤로 설치되어 있는 해치가 참으로 익살스럽다. 하나도 안 무섭다~~

 - 끝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