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대에서는 사용하지 않지만, 상여(喪輿)는 사람이 죽으면 마지막으로 타는 이동수단이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상여를 단순히 죽은 사람의 육체만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혼이 함께 간다고 생각하여 상여를 화려하게 만들었는데,  이승에서는 평생 고생만 하였다고 생각하고 저승으로 갈 때는 화려하게 해서 보내드렸습니다.

 

※ 자료사진은 e뮤지엄,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이 상여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장례때 숙종원년(1675년)에 하사한 상여이며, 이후 춘천 안보리의 상여막에 보관하여 오다 2002년 국립춘천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상여 앞에서 혼백을 모시는 작은 가마인 요여(腰輿)가 상여와 같이 전시되어 있는데, 죽은 이의 이름(姓名)을 써서 거는 명정대(銘旌帶), 고인(故人)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글을 써서 거는 만장대(輓章帶), 그리고 상여를 앞뒤에서 호위(護衛)하는 데 사용했던 표지물(標識物) 등은 따로 보관되어 있는 듯합니다.

 

김우명 상여는 현재 남아 있는 상여중에서 가장 오래된 상여이며, 일반인 상여보다는 꾸밈의 격이 좀 있어 보입니다

 

김우명 상여는 조선 현종의 장인이었던 김우명(金右明/1619~1675)이 사망하자 나라에서 제작하여 하사(下賜)했던 장의용구(葬儀用具)입니다.

 

부원군이란 왕의 장인을 뜻하는데, 김우명은 조선 현종의 장인이며, 숙종의 외조부가 됩니다. 김우명이 세상을 떠나자 숙종은 장례비와 상여를 하사하여 장례를 지원하였습니다

숙종이 하사(下賜)한 김우명의 상여는 배를 타고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하며, 김우명은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옆에 합장하였다고 합니다.

 

김우명의 시신을 태우고 왔던 상여는 묘역에 상여막을 짓고 보관하여 오다가 2002년 춘천박물관이 개관하면서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 전시되고 있습니다.

 

▼ [자료사진]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부인의 합장묘이며, 춘천시 서면에 있습니다

 

▼ 안내판의 글자가 너무 작아서 잘 안 보입니다.

 

▼ 안내문이 잘 안 보여서 그대로 옮겨보았습니다

청풍부원군 김우명 상여(국가민족문화재)
숙종(1674~1720)이 그의 외할아버지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1619~1675)의 장례 때 내린 상여로, 전해 오는 상여중 가장 오래 되었습니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 지은 김우명의 묘지명(墓誌銘)에는 장례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대궐에서 대었고, 초상이 났을 때부터 매장할 때까지 전 과정을 관청에서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우명의 상여는 장지(葬地)인 춘천 안보리의 상여막(喪輿幕)에 보관되어 오다가 2002년 국립춘천박물관 개관 때 기증되었습니다. 상여는 고인의 영혼과 관련된 신주(神主), 명기(明器)등을 싣는 작은 가마 형태의 영여(靈輿), 고인을 장지까지 모시는 대여(大輿), 불삽(黻翣), 운삽(雲翣) , 명정대(銘旌帶), 만장대(輓章帶)등의 부속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김우명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현종(1659~1674)의 왕비 명성왕후(明聖王后(1642~1683)의 아버지입니다. 1642년(인조 20)에 진사시에 합격해 *강릉참봉 등을 지냈습니다. 외손자인 숙종(1674~1720)이 즉위한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습니다.

※ 강릉참봉은 아마도 조선 제13대 명종과 왕비 심씨의 능인 강릉(康陵)의 능참봉(陵參奉)인 듯합니다.

 

▼김우명은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한 김육(金堉)의 둘째 아들로서 본관이 청풍(淸風)이며, 1619년(광해군 11)에 태어나, 1642년에 진사가 되고 현종의 국구(國舅:임금의 장인)로서 청풍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 김명우는 청풍김씨이며, 김유명 초상화입니다(나무위키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아주 오래전에는 사진과 같은 상여행렬을 가끔 구경했던 추억들이 있는데, 지금은 자료사진으로만 봐야 합니다. 자료사진에서 보면, 상여 앞뒤로 각종 표지물등이 보이고, 모든 동네 주민들이 함께 상여행렬을 따르고 있습니다

 

상여가 나갈 때 상두꾼들이 부르던 상여가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북망산천이 멀다더니,

이제 가면은 언제 오나,

오는 날이나 일러주요,

청사초롱불 밝혀라,

잊었던 낭군이 다시 온다.

 

// 허어 허허 허야 허어허어허이//

 

▼ 상여의 구조와 명칭을 알아보겠습니다(kokdumuseum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상여행렬은 기록사진으로 조금 남아 있는데,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나는 망자에 대한 행렬을 볼 수 있는 귀한 사진이며, 제 기억으로 1980년에도 시골에서는 상여로 운구를 해서 장지까지 가거나, 거리가 멀면 버스로 이동한 후에 상여로 옮겨서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일제강점기 때 유리건판 사진들입니다.


※ 참고로 국왕의 국장행렬을 보겠는데, 영월에서 행해진 단종의 국장행렬을 재현 모습입니다.

 

- 영친왕비 장례식

 

▼ 1960년대 강진에서 상여행렬(강진일보에서 인용)

 

※ 현대의 상여 행렬을 자료사진으로 보겠습니다(2008년 고양시 상여행차 재현한 모습입니다)_고양신문에서 인용

 

※ 부여 용정리 상여


※ 산천이 많은 땅에서 상여가 물을 만나면, 어떻게 건너는지 잘 보여주는 사진이며, 공주 봉현리 상여행렬 재현 모습입니다 

 

※ 영주 무심천을 건너는 상여행렬의 재현 모습입니다


▼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상여를 보면 크기가 일반인 상여들과 별 차이가 없아 보입니다

 

상여의 크기를 보면 상여를 받치는 쟁강 에 24명이 어깨에 메는 구조로서 평민들의 사용하던, 보통의 상여처럼 보입니다.

 

청풍김씨(김명우 집안)에서는 김명우의 장례를 치르고 임금이 하사한 상여를 재실에 보관하였다가, 나중에 일반인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상여막을 짓고, 보관하였는데, 김명우 묘소와 재실을 관리하시던, 청품김씨 집안의 각별한 정성으로 지금까지 상여가 남아 있었습니다

 

상여 앞의 작은 가마는 요여(腰輿) 또는 영여(靈輿)라고 하며, 고인의 영혼과 관련된 신주(神主), 명기(明器), 평소 아끼던 물건 등을 싣고 장지까지 앞장서 갔다가, 장례가 끝나면 신주만 싣고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 춘천 서면 안보리 김우명 묘소 근처 상여막에 있을 때의 상여 모습입니다(2002년 이전)

 

▼ [자료사진]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중인 김우명 상여이며,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상여막에서 보관중인 상여와 요여(일제강점기 함경남도)

 

▼ 현재 남아 있는 상여 중에서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을 연천에서 예산으로 이장할 때의 상여입니다



▼ 상여 앞의 작은 가마는 요여(腰輿) 또는 영여(靈輿)라고 하며, 고인의 영혼과 관련된 신주(神主), 명기(明器), 옷, 평소 쓰던 물건 등을 싣고 어깨에 광목끈을 X자로 메고 장지까지 앞장서서 갔다가, 장사가 끝난 후에는 망자의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요즘에는 요여(腰輿) 대신 고인의 사진을 들고 갑니다

 

▼ 상여에는 각종 장식이 달리는데, 나무로 만든 인형등을 꼭두라고 합니다

 

▼ 상여장식에 시용되는 꼭두입니다(더 중앙에서 인용)

 

▼ 붉은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 매듭 형태의 끈으로 아래 부분에 술을 늘어트리는데, 유소(流蘇)라고 합니다

 

▼ 상여 겉에 붉은 매듭인 유소(流蘇)와 같이 달린 넓은 천은 진용(振容)이라고 하며, 상여가 흔들리거나 바람에 불 때 같이 흔들립니다.


※ 아름다운 이별(?)을 위한 호사스러운 상여를 박물관에서 인용하여 전시 중인 상여를 몇 개 보겠습니다

 

- 영동 신항리 상여


▼ 청풍부원군 김우명도 살아서는 이런 가마를 타고 다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남여(藍輿)라고 합니다.

-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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