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에 있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남한산성의 중심부에 있는 지수당을 찾아보았습니다.

지수당(池水堂)은 조선 후기 현종 13년(1672년)에 광주 부윤(지금의 시장급) 이세화(李世華)가 연못가에 지은 정자라고 하며, "지수당(池水堂)" 이란 뜻은 "지수당기"에서  "백성을 포용하고 기른다" 라는 내용이라고 하였습니다.

 

▼ 지수당(池水堂)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서,현종 13년(1672년) 광주부윤 이세화(李世華:1630∼1701)가 연못을 파고 건립한 정자로서, 지수당의 앞과 뒤에는 연못이 있어서 당시 고관(高官)들이 낚시를 즐기던 연못이었으나 지금은 아래쪽의 연못 하나가 매몰되고, 두 개의 연못과 정자 지수당이 남아 있으며 매몰된 못지는 현재 밭이 되어있습니다.

 

▼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쓰여진 글씨 같지만, 나름대로 힘차고 재미있게 보이는 지수당 현판 글씨입니다.

 

▼ 남한산성의 누정의 위치를 표시하였으며, 화살표가 지수당입니다

 

▼ 자료에서 보면 연못은 본래 3곳이었다고 해서 포털 지도에서 지수당과 연못의 위치를 찾아보았습니다. 메워진 연못은 현재 밭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메워진 연못은 1925년의 대 홍수 때 메꾸어졌는데, 복구하지 않고 그냥 농사를 짓는 땅으로 남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경기도] 지수당이 그려진 옛 지도인데, 왼쪽 17세기 전반에 그려진것으로 보이는 그림에는 연못이 4개입니다. 오른쪽의 17세기 후반에 그려진 그림에는 지수당 앞뒤로 연못이 보이고, 한문의 이름이 止水堂(지수당)으로 돠어 있습니다.

지금은 메꾸어진 연못의 모습을 보면 연못 가운데에 길이 있었습니다.

 

▼ [사진자료:광주시] 현재 이세화 선정비의 비문은 잘 안 보여서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지수당 앞,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비는 광주부윤 이세화의 선정비입니다.  앞면에는'부윤이경세화청덕민선정비(府尹李卿世華淸德民善政碑), 뒷면에는 '숭정후87년 갑오년 3월일립(崇禎後八十七年 甲午年 三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숭정 후 87년이면 1714년이고 조선(朝鮮) 숙종(肅宗) 40년이 됩니다. 그런데 이세화는 생몰이 1630년∼1701년인데 사후 14년 후에 선정비를 세웠다는 것이 좀 이상 합니다 보통은 관리들이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쯤 선정비를 세우는데, 비문이 잘 못 읽힌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 선정비는 보통 지방관리들이 이임할 즈음에 그 지방에서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세워주는데, 못된 관리들은 선정비 욕심에 지방 부호들을 괴롭히기 때문에 미리 선정비를 세워서 아부를 했다고 합니다.

 

※ 숭정[崇禎]의 연호는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1628~1644) 때의 연호였습니다만, 조선은  1637년 청나라에 무참히 깨졌을 때도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 연호(숭정)를 쓰다가, 명나라가 1644년에 망했는데도 당분간 숭정 연호를 썼습니다.

 

조선은 명나라가 망했어도 청나라를 오랑캐 취급하고 명나라의 정통성을 조선이 어어 받았다는 생각에 빠진 위선적(僞善的)인 선비들은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미쳐서 현실인식에 어두웠고, 청나라는 개방적인 정책으로 이미 서양에 문을 열고 발전해 가고 있었지만, 조선은 수백 년 동안 명나라에 대한 환상에 젖어서 썩어빠진 사상에 세계 물정에 어두워지다가 결국은 일본에 나라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또한 6.25 전쟁 때 인민지원군이라는 명찰을 달고 통일의 꿈을 박살 낸 중국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 이세화는 조선 숙종 15년(1689)에 계비인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정주로 유배를 갔다가 풀려났고, 인현왕후의 복위 후에는 세자빈객, 공조, 형조, 공조·형조·병조·예조 판서 등을 지낸 청백리였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함경도 무산군 풍계면의 충렬사에 배향되었으며, 고향에 충신 정려문이 세워졌습니다.

 

▼ 일제강점기 때 찍은 유리건판 사진인 듯합니다.

 

▼ 정조실록에 의하면 1779년(정조 3) 정조가 여주 영릉(세종, 효종)을 다녀오는 길에 남한산성에 들러 이곳 지수당에 올랐다고 합니다. 지수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통칸 구조 건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 조선시대의 정자는 보통 선비들의 풍류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정자 주위에는 대개가 주변의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다운 곳이 많아서, 정자를 나쁘게 보는 분들은 기생들을 불러다 술이나 먹고, 노는 곳이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성 안에 있는 정자에서는 관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자를 짓고 지방수령들이 가끔 쉬기도 하고 정사를 논하던 곳이었습니다.

지방에 있는 정자들을 보면, 현실 정치에서 밀려났거나, 늙어서 낙향한 선비들이 정자를 짓고 소일거리로 책을 읽고 후학을 가르치기도 하며, 친한 벗들과 함께 시국을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던 곳이었습니다.

 

▼ [자료사진:송풍수월] 자료사진으로 지수당의 모습을 봅니다. 1950년대 후반으로 추정이됩니다

 

▼ 정자가 연못 안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 [자료:남한산성관리소]  야경의 모습입니다

 

▼ 지수당 위쪽에 있는 연못이며, 관어정 터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연못 가운데 둥그런 섬이 보이는데, 이곳에 1804년 김재찬이 '관어정'이라는 정자가 지었다고 하는데, 정자는 없어지고  관어정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석만이 세워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연못을 만들 때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해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위가 있다고 해서 모서리를 반듯하게 만들었습니다.

 

▼ [자료:송풍수월] 1920년대의 산성마을의 모습이며, 관어정터의 모습이 담겼습니다. 이 사진자료는 "전선명승고적"에 실여 있다고 합니다.

 

▼ 하늘을 나타내는 둥근 섬에 관어정이 있어서 작은 배로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 일제강점기때 찍었던 관어정터의 모습입니다. 설명에는 지당(池堂)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 거북 모양의 비좌와 설명문이 있습니다.

 

▼ 시멘트로 된 평면에 글씨를 새겼는데, 알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옮겨 보았습니다.

 

"이 거북대좌는 남문 올라가는 길 옆에 있던 것이다. 홍태윤이 광주 부윤으로 있을 때 사심 없는 선정을 베풀어서 임기후에 성내의 주민들이 스스로 놋쇠붙이를 내어서 녹여 만든 선정비가 있었는데, 비는 일제가 군수용품으로 거두어 가서 빈 대좌만 남게 되었다.

애민선정 네자가 새겨진 최선의 선정비였다. 홍태윤은 민비 시해시 항거하다 순식한 홍계훈의 아들이다"

 

※ 홍태윤(洪泰潤)은 양주 출생으로 본관은 남양홍씨이며,  궁궐을 지키는 관속일 때,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민비를 여주까지 피신시켜주었으며, 이로 인해 발탁되어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낸 인물입니다

홍태윤은 대한제국군의 강제 해산에 반발하여 순국 자결한 박승환(朴昇煥)[1869~1907]의 외삼촌이었으며, 박승환은 외삼촌인 홍태윤에게 한학과 궁술, 총술 등을 배웠다고 전합니다.

 

▼ 거북대좌 옆에는 서흔남묘비로 알려진 두기의 비가 있습니다. 안내문에는 서흔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 손상이 심한 서흔남의 묘비인데, 한씨부좌(韓氏袝左)가 쓰인 것으로 봐서 부인은 한 씨였으며, 서흔남과 합장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광주문화원 자료에 의하면 앞 면에는 大夫同知中樞府事(대부동지중추부사) …… 徐欣男之墓(서흔남지묘) …… 韓氏袝左(한씨부좌)라 하여 묘주(墓主)를 적고, 뒷면에는‘…… 五?八月十五日’이라 하여 건립 시기를 적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 온전한 묘비는 1667년(현종 8) 3월 13일에 건립한 것으로 앞면에는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徐公之墓’(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서공지묘)이며, 뒷면에는‘康熙六年丁未三月十三日立’(강희6년정미3월13일립)이라 하여 건립 시기를 적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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