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포천(包川)은 한문을 풀어 보면 물길을 품고 있는 곳이며, 품고 있던 물을 내주는 물길중 하나가 영평천(永平川)입니다. 옛날에는 영평현이었으며, 영평천의 물길이 창수면의 들판을 지나다가 소머리 처럼 솟은 언덕위에 날아 갈듯하게 앉아있는 정자가 금수정입니다.

 

금수정의 내력을 알아 보면 조선 초기 세종때 김명리(金明理;안동 김씨)에 의해 세워졌는데 처음 정자 이름은 우두정(牛頭亭)이였으며, 이후 양사언(楊士彦)이 정자의 이름을 금수정이라고 고쳐 썼다고 합니다.

 

- 지정구분 : 포천 향토유적 제17호(1986년 4월)

- 명     칭 : 포천 금수정

- 시     대 : 조선초기(세종)

- 소 재 지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36-53번지(주차장 있음)

※ 네비로 찾아 갈 때는 "포천안동김씨고가터"로 찾아 가야 합니다.


▼ 금수정을 찾아 가려면 안동 김씨 고가 앞길을 지나야 합니다.

 

▼ 지금의 안동김씨 고가터는 안동 김씨의 종택이었는데, 6.25를 거치면서 없어졌다가 2008년~2010년에 복원한 것 입니다.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고, 또한 문은 닫혀 있어서 들어가 볼 수는 없습니다.

 

▼ 안도김씨 종택의 특징은 다른 종택에 비하면 비교적 크기가 작고, 사랑채를 안채에 비하여 좀 크게 지었는데, 금수정에 놀러 오시는 손님들이 많았는가 봅니다.

 

▼ 주로 외부 손님들이 잠시 머물던 사랑채입니다

 

▼ 옆에서 보면 건물배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 금수정 부근에서 고택을 바라보면 전형인 양반가옥입니다.

 

▼ 고택앞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나즈막한 정자가 보이는데 금수정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건립자는 김명리(金明理)로 처음에는 우두정(牛頭亭)이었다가, 봉래 양사언(楊士彦)에게 물려 주었는데 이때 정자의 이름은 금수정(金水亭)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안동김씨 종가에서 이 우두정을 왜 양사언에게 주었는지는 확인 된 기록은 없느나, 그렇게 전해져 왔던 이야기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차례 중수되며 보존되다가 6·25 전쟁후에는 없어졌다가 1989년 포천군의 지원을 받아 복원하였으며, 1986년 4월 9일 포천시 향토 유적 제17호로 지정되었다.

 

▼ 금수정 주변에는 두개의 시비가 있는데 먼저 척약재 김구용(惕若齋 金九容: 1338-1384)의 시비를 보겠습니다.

검은색의 돌(烏石)위 시비의 이름을 새겼으며, 시비의 제목은 척약재 김구용선생 시비(惕若齋 金九容先生 詩碑)입니다.

 

시의 제목은 범급((帆急)이며, 빠르게 가는 돗단배라고 풀이를 해 봅니다. (한시를 풀어 놓은 글은 인용한 글 입니다)

김구용선생이 이시를 지은때는 명나라에서 뱃길로 유배 가는길에 지은시로 고독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帆急(범급) -金九容(김구용)

帆急山如走(범급산여주) : 돛단배 빠르니 산이 달아나는 듯

舟行岸自移(주행안자이) : 배가 나아가니 언덕이 스스로 옮기는 듯

異鄕頻問俗(이향빈문속) : 낮설은 땅에 이르면 풍속을 묻고

佳處强題詩(가처강제시) : 경치 좋은 곳에선 억지 시를 읊지요

吳楚千年地(오초천년지) : 오 나라 초 나라 천년땅에

江湖五月時(강호오월시) : 양자강과 호수는 오월이구나

莫嫌無一物(막혐무일물) : 내 한푼없다 하여 싫어를 말라

風月也相隨(풍월야상수) : 나에겐 아직도 풍월이 따르니

중국 대리위 유배선상, 기행시중에서

 

유배중 선상에서 시를 지으신 척약재 김구용 선생에 대해서 알아 보았습니다.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김제민(金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 첨의중찬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김묘(金昴)의 아들로서, 1338년(고려 충숙왕 복위 7)에 출생하여 1384년(고려 우왕 10)명나라에서 누명을 쓰고 유배 도중에 병사하였습니다. 척약(惕若)이라는 호는 매사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 김구용 선생시비 옆에는 태산가(泰山歌)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시는 유명한 양사언(楊士彦)선생의 한시입니다, 

 

泰山雖高是亦山(태산수고시역산) : 태산이 높다 하지만 역시 산 일뿐이다

登登不已有何難(등등불이유하난)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

世人不肯勞身力(세인부긍노신력) : 세상 사람들이 힘써서 아니 오르고

只道山高不可攀(지도산고불가반) : 뫼(산)만 높다 하더라.

 
※ [자료] 사언(楊士彦)선생의 생애에 대해서 자료을 인용하여 알아 보았습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이다. 주부인 양희수(楊希洙)의 아들이다. 형 양사준(楊士俊), 아우 양사기(楊士奇)와 함께 글에 뛰어나 중국의 삼소(三蘇: 소식·소순·소철)에 견주어졌다. 아들 양만고(楊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三登)·함흥(咸興)·평창(平昌)·강릉(江陵)·회양(淮陽)·안변(安邊)·철원(鐵原)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의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했다.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 글씨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의 군수로 있을 때는 백성을 잘 보살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받았고, 북쪽의 병란(兵亂)을 미리 예측하고 말과 식량을 많이 비축해 위급함에 대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릉(智陵)에 화재가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로 귀양을 갔다. 2년 뒤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한편,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한시는 작위적이지 않고 표현이 자연스 러워, 더 이상 고칠 데가 없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가사(歌辭)로는 「미인별곡(美人別曲)」과 을묘왜란(乙卯倭亂) 때 군(軍)을 따라 전쟁에 나갔다가 지은 「남정가(南征歌)」가 전한다. 이밖에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미인별곡」은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에 뛰어났으며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4대 서예가로 일컬어진다.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고 전한다. 문집으로 『봉래집(蓬萊集)』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양사언(楊士彦))]

 

▼ [자료:e뮤지엄] 참고적으로 양사언의 글씨를 찾아 보았습니다. 뭐.. 전문가가 아니면, 전혀 알 수가 없는 글씨 입니다

 

▼ 시비와 금수정을 담아 보았습니다

 

▼ 금수정(金水亭)은  6·25 전쟁 때 제1사단 공병대에서 정자를 헐어 사단 관사를 짓는데 사용하여 장초석만 남았으나, 1989년에 복원하였으며 1990년에는 난간 및 진입로 등을 정비하였다고 합니다. 

 

▼ 하늘에서 보니 금수정을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 양사언의 봉래시집(蓬萊詩集) 권(卷) 1에 수록되어 있는 금수정이라는 시 입니다.

단염청풍지(丹染靑渢枝) : 붉은 단풍 푸른 나뭇가지에 들고

천향낙계자(天香落桂子) : 천향은 계수나무 열매에 떨어지는데

불견면중인(不見眠中人) : 눈 앞에 사람도 보이지 않으며

공여석상자(空餘石上字) : 부질없이 돌 위에 글씨만 남기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지대가 낮아서 장초석위에 정자를 얹었습니다. 주위에 지대가 높은곳도 있는데, 왜 낮은 곳에 정자를 지었을까?.

 

봉래(蓬萊)양사언(楊士彦)이 세종때 정자의 이름을 우두정에서 금수정으로 고쳐쓰고 바위에 새긴 글씨인데, 정자 현판의 글씨를 바위 글씨를 탁본해서 만든 현판입니다. 그런데 양사언은 왜 굳이 우두정을 금수정이라고 고쳐 썼을까요?

다른 자료를 찾아 보면 양사언이 남긴 시에 금수정이란 시가 있는데. 여기에는 금수정(錦水亭)이라고 표기되어 있다고 합니다.

 

▼ 봉래(蓬萊)양사언(楊士彦)은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의 4대 서예가중 한 사람으로 글씨를 아주 잘 썻다고 합니다.

 

▼ 오른쪽에는 한음 이덕형의 시(영평우두연)도 보입니다.

 

▼ 금수정 아래에서 바위에 새겨진 글자들을 찾아보려 내려 가서 영평천을 바라보는데, 물속에 잠긴 바위들때문에 분위기는 좋습니다. 다만 주변에 축사들이 많아서 물은 좋지 않습니다

 

▼ 금수정에서 내려와서 바위에 새긴 글자들을 찾아 보았는데, 겨우 하나 찾았습니다 무릉(武陵)입니다.

 

▼ [자료:안동김씨 대종회]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찾지 못했는데 아마도 물길 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양사언의 글씨로 경도(瓊島), 또는 부도(浮島)로 해석 하시는것 같습니다, 구슬옥(瓊)자나, 뜰부(浮)자로 보는데, 해서체의 글자를 보는 차이가 있는것 같습니다. 통상 부도(瓊島) 즉, 옥섬으로 보고 있습니다.

영평천에 물이 많을 때 보면 바위가 마치 떠 있는 섬처럼 보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 금수정 아래 바위면에는 십여개의 글씨들이 있다는데, 찾지 못하였습니다. 나무의 낙옆이 없고, 물이 얼었을 때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존암의 뜻은 술그릇 바위라고 하며, 증 금옹은 금수정의 주인께 드린다는 뜻이라는데, 금옹은 누구인지는 자료가 없습니다

 

금수정의 원래 이름은 우두정(牛頭亭)이었는데, 이는 정자가 위치한 곳의 형상이 소 머리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평천을 끼고 서 있는 금수정과 주변이 참 아름답습니다. 

금수정을 양평천 건너서 보려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승용차로 한참을 돌아야 합니다. 다리가 너무 멀리 있거든요...

 

▼ [자료:e뮤지엄] 정수영-한임강명승도권에서 금수정의 진경산수화입니다. 보통 조선의 진경산수화를 보면 많이 과장되게 그렸는데, 금수정이 있는 곳의 지형이 너무 부풀려져지게 그려졌습니다

 

▼ 금수정앞을 흐르는 영평천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물속에 잠겨 있는데, 금수정을 빛내는 또 하나의 큰 요소들입니다

 

▼ [자료:인동김씨 대종회] 가을에 보면 여름보다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 금수정에서 영평천과 들판을 보는 맛도 좋지만 영평천 건너에서 보는 맛도 훌륭합니다.

 

▼ 암벽에 십여개의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숲이 우거지고, 길이 좋지 않아서 찾는 곳을 포기 했습니다.

 

▼ 양평천 건너에서 당겨 보는 금수정입니다. 금수정 현판은 두개이며, 앞,뒤로 달려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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