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2014년 6월 22일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1번째이며, 경기도에서는 수원화성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남한산성의 천흥사 동종각의 뒤편의 돌계단길을 오르면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고 넓은 곳에, 앞면 7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큰 건물이 있는데 침과정(침괘정)입니다.

 

침괘정(枕戈亭)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591-1번지)입니다.


▼ 지금의 건물은 영조27(1751년)에 광주유수(廣州留守 ; 광주지역을 관리하던 사람)겸 수어사(守禦使)였던 이기진(李箕鎭)이 다시 짓고 ‘침과정(枕戈亭)’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침과(枕戈)의 뜻은 '창을 베게로 삼은다'라는 뜻으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두번 다시 당하지 않겠다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정확한 한자음은 침과정(枕戈亭)인데, 왜 '침괘정’으로 부르는지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 침과정 일대는 옛날부터 백제 온조왕의 궁궐터였다는 이야기가 전래되고 있으며, 침괘정의 우측에는 과거에 군기고(軍器庫)가 있어 명나라의 사신 부총병(副摠兵) 정룡(程龍)이 총융무고(摠戎武庫)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 일대에 당시에는 무기고나 무기 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침과정의 위치는 붉은색 화살표입니다.

 

▼ [자료:송풍수월] 일제강점기(1920년대 추정)때의 유리건판사진을 확대한 사진인데, 산성리 마을 우측에 침과정이 보입니다. 왼쪽으로 행궁자리가 보이는데, 이미 행궁은 흔적도 안 보이고, 청량산에는 수어장대가 희미하게 보입니다.

 

▼ 일제강점기(1920년대 추정)때 유리건판입니다. 방치된 지 십수 년이 지난 것처럼 보이고, 자세히 보면 왼쪽에 ㄱ자 모양의 돌담을 높게 쌓은 부속건물이 보입니다만, 지금은 복원되지 않았습니다.

 

▼ [자료:공유마당] 1971년의 봄에 찍은 침과정의 뒷 모습입니다. 벚꽃이 피는것을 보니 4월인줄 알겠습니다.

 

▼ 침과정 건물의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약 31평가량 되며,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전체 건물의 평면 중 5칸에 12평가량의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정면 2칸, 측면 3칸에 8평가량의 마루방이 있으며 그 반대편으로 약 5자(尺) 너비로 퇴칸을 회랑(廻廊)처럼 둘러 놓았다. 현재의 건물구조로 보아서는 이 건물은 집무실로 쓰였고 무기고나 무기 제작소는 침괘정의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경기도GGC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침과정을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는데, 『남한지(南漢志)』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남한산성을 쌓을 때 수어사(守禦使) 이서(李曙, 1580~1637)가 울창한 숲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였을 때, 주변은 백제 온조왕의 왕궁터라고 전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군기고(軍器庫)가 있었다고도 하므로, 이서가 발견한 흔적은 군기고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 군기고(軍器庫)터가 발견된 후 127년이 지난 1751년(영조 27)에 광주유수(廣州留守) 이기진(李箕鎭, 1687~1755)이 건물을 짓고는 침괘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침괘정은 무기 제작소의 총괄업무를 보던 곳이며, 실제 무기를 만들던 곳은 침괘정의 오른쪽 공터로 보입니다.

 

▼ 4면 중 삼면은 툇마루를 깔았으며, 중앙에는 온돌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 커다란 관청을 보는듯한 방앞에 이어진 툇마루입니다

 

▼ 방의 구조를 보면 커다란 사무실을 보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러 개의 방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업무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침과정의 온돌의 연도인 굴뚝은 벽돌로 쌓았으며, 규모가 꽤 커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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