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길상면에는 단군의 세 아들(부여,부우,부소)이 성을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三郞城)이라고 부르는 산성이 있는데, 다른 명칭은 정족산성(鼎足山城)입니다.

 

마니산 참성단과 더불어 단군과 연관된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해지는 귀한 역사 유적입니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명의 사내가 쌓은 성이라는 뜻으로 삼랑성(三郞城)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정족산성(鼎足山城)은 3개의 봉우리를 이어서 성을 쌓은 산의 모양이 다리가 세개인 솥을 닮았다고 하여 정족산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의 둘레는 대략 2,3km입니다  _참고 자료와 사진은 강화군청에서 가져왔습니다.


 ▼ 하늘에서 보는 삼랑성의 모습인데, 참으로 기가막힌 산성의 모습입니다.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지형을 이용한 산성입니다. 산성안의 사찰은 전등사 입니다._자료사진

 

▼ 일반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등사는 잘 알아도 정족산성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전등사도 보고, 정족산성을 걸어보는 것도 강화의 역사와 나아가 조선말기의 역사를 공부한다는것이 지금의 우리나라가 처해진 상황을 보는것만 같습니다.

▼ 강화도의 방어시설의 그려넣은 지도인데 강화도에는 크게 외성과 내성인 강화산성과 정족산성이 있습니다. 외성은 배들이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가서 한양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강화해협에 집중되어 방어시설들이 설치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_문화콘텐트닷컴에서 가져왔습니다

 

▼ 조선 고지도에서 보는 정족산성(삼랑성)의 모습입니다. 성문은 동서남북으로 4개가 설치되어 있는데, 문루가 있는 문은 남문(종해루)뿐이며, 동문과 서문은 홍예식문이고, 북문은 평거식 암문으로 되어 있습니다.정족산성(鼎足山城)의 이름은 발리 3개가 달린 쇠솥의 모양과 같다하여 정족산성이라고 하였답니다

 

▼ 정족산성 1부는 남문에서 정족산까지의 사진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 정족산성(삼랑성)의 정문인 종해루 입니다.  원래는 문루가 없었던 것을 영조 15년(1739)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라고 이름을 지었고 1976년에는 무너진 문루를 보수한 것이 현재의 종해루 입니다. 

 

▼ 일제시대때 삼랑성 남문앞의 모습이라는 사진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성곽의 윤곽만으로 짐작이 될뿐입니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 일제강점기때의 정족산성 동문의 모습입니다.(출처는 중앙박물관)

 

▼ 보수하기전의 종해루 안쪽 모습입니다(1968.11,출처 경기도)

 

▼ 문루를 지날때 천장을 보니 뭔가 허전한 느낌입니다. 종해루를 보수할 때 천장을 나무로 복원하지 않고 그냥 시멘트로 만든 느낌이 납니다. 그리고 보통 천장에 문을 수호하는 동물들의 그림을 그려 넣는데, 누락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없었는지 아리송 하기만 합니다.

 

▼ 성문 안쪽에서 바라보는 종해루 입니다. 사실 종해루가 정문 역활을 하기 시작하기 전에는 동문이 정문 역활을 하였으며, 남문 앞에 대형 주차장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남문이 정문 역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삼랑성의 성곽길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합니다. 시작 부터 가파른 성곽길입니다.

 

▼ 남문를 보수 할 때 남아 있던 돌들이 별로 없었는지 화강암을 기계로 반듯하게 가공된 돌을 쌓아서 옛스러운 맛은 별로 없는데, 성곽의 성돌은 할석 그대로 복원을 해서 보기가 좀 낫습니다.

 

▼ 아침 일찍 성곽길을 도는데 햇살이 부드럽게 퍼지기 시작하면서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한층더 옛스러운 분위기를 만듭니다

 

▼ 멀리 강화해협을 굽어보는 소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어 갑니다.

 

▼ 멀리 보이는 성곽은 동문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이며, 가운데 보이는 건물은 전등각입니다.

 

▼ 동문에 도착하였습니다. 동문의 모습은 벽돌로 홍예를 둘렀고, 문루는 원래 부터 없었던 문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동문이 정문 역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 동문안쪽의 느티나무에 대한 설명입니다

 

▼ 보기에도 아주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는 성문이며, 정족산성의 홍예문은 동문과 서문이며, 문루가 없는 구조 입니다.

 

이 동문은 역사적으로 아주 의미있는 문인데, 고종3년(음력;1866년 10월 14일 ~11월 10일) 병인양요때 양헌수 장군과 조선군 병사들이 성곽안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동문앞에서 프랑스군들에게 기습 사격을 가해서 프랑스군 3명 사망 35명 부상(자료마다 차이가 있음)을 입고 프랑스군이 철수하였던 사건을 보고 있었던 성문입니다.

 

성문에 홍예를 할때 보통은 돌을 다듬어서 문을 만드는데, 벽돌로 홍예문를 만든것은 흔히 볼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럼 벽돌홍예문은 언제 만들어졌는가는 자료를 보면 영조때 강화도의 외성을 보수할 때 전돌(구운 벽돌)를 사용한 흔적을 볼수있는데, 이때 삼랑성의 동문과 서문을 보수 하면서 전돌로 홍예문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 합니다

 

▼ 자료사진에서 보는 동문의 옛날모습입니다.옛날에는 동문이 정문이었답니다_ 1968년 11월(출처 경기도)

 

▼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각입니다. 승전비는 고종10년(1873년) 강화군민들이 만들었다고 하며, 전투에서 승리한 동문 안쪽에 세워졌습니다.

 

 

▼ 병인양요의 핵심인물인 조선의 양헌수 장군과 프랑스의 로즈제독, 그리고 프랑스 함대가 일본에 정박하고 있을때 사진과 수병들의 사진입니다.

 

▼ 동문에서 또 다시 가파른 성곽길을 오릅니다

 

▼ 동문성곽 밖에는 고만고만한 한옥건물들이 보이는 전등각이라고 합니다. 이 전등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여관을 했었고, 유명하신 김구선생과 윤보선 전대통령이 묵었다는 곳이며, 지금은 전등사에서 매입하여 불교문화체험장소로 이용한다고 합니다.

 

▼ 성곽길은 느릿느릿 이어지고 있습니다.

 

▼ 성곽길을 올라오다가 내려다 보는 동문방향입니다.

 

▼ 북문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은 가파러지고 있습니다.

 

▼ 멀리 초지대교를 당겨보았습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습니다

 

▼ 온수리방향입니다.

 

▼ 멀리 바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 성곽의 상태는 부분적으로 보수한 곳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군데군데 무너진 곳이 많아서 위험한데, 문화재 복원이라는것이 비용이 많이 드는것이라 시간이 지체될 수 밖에 없는것은 알지만 무너지고 있는 성벽을 보면 마음이 안좋습니다.

 

▼ 외진곳을 보면 성돌이 축성 당시 그대로 쌓여 있는 모습이며, 현대의 기계로 가공된 성돌로 복원된 성곽을 보는 기분은 많이 다릅니다

 

▼ 봉우리가 정족산 정상입니다.

 

▼ 암문형태인 북문에 가까이 왔습니다

 

▼ 암문은 적이 멀리서 출입문의 형태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유사시 성밖의 물자를 들어오거나 적진에 기습을 하기 위해서 은밀히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한 작은 문입니다

 

▼ 한사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아주 작게 문을 만들었습니다

 

 지나온 동문방향 성곽입니다. 온수리 방향은 아주 조용한 느낌입니다

 

▼ 서쪽으로 보는 방향입니다. 지금 보고 잇는 들판은 원래 갯벌이었는데, 꾸준히 갯벌을 메워서 논으로 만들었는데, 조선시대때 많이 간척을 하였다고 합니다

 

▼ 마니산이 있는 화도면 방향입니다. 화도면과 길상면 사이에도 논이 있는데, 조선 숙종때 섬이었던 화도와 강화도 사이의 갯벌을 메웠고 1960~1970년대에 경지정리를 해서 반듯한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 정족산의 정상인데 해발 220m입니다.

- 1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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