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2일에 멀고 먼 길을 돌아 113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지광국사현묘탑이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서 조립을 끝내고 일반들에게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 승탑은 고려시대의 고승 지광국사(智光國師, 984~1067)의 묘탑으로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 터에 있던 것인데, 1912년에 일본인이 몰래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발각이 되어 3년 후인 1915년에 되돌려 받아 경복궁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지광국사현묘탑은 지광국사의 사리를 봉안하였던 승탑이며, 일반적인 승탑과는 매우 다른 모양새와,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어서 특별한 존재입니다.
탑의 받침대에 해당되는 기단부(基壇部)에는 여러 단을 두어 꽃, 상여, 신선, 장막 등을 장식하고 탑의 몸체에도 페르시아풍의 창문을 내고 드림새 장식을 하였으며, 지붕과 꼭대기도 불보살상(佛菩薩象), 봉황, 연꽃 등의 화려한 무늬로 장식되었습니다.
※ 자료는 국가유산청 포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의 로비에 들어서면 정면에 대형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데, 이 문양은 지광국사탑비 탑신의 상단에 새겨진 용화수(龍華樹)입니다.
용화수(龍華樹)가 어떤 식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그 아래에서 변함없이 진리를 깨달아 불도(佛道)를 이루었다고 하는 나무이며, 보리수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지광국사현묘탑은 법천사지의 지광국사탑비앞에 있었습니다만, 2024년 11월에 돌아와서 지금은 유적전시관에 있습니다
간절함이 지광국사현묘탑을 환귀본처(還歸本處)하였습니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址 智光國師玄妙塔) |
이 탑은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70)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원래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오사카로 몰래 빼돌려졌다가 반환되었으며, 경복궁 경내에 있다가 보존처리를 위하여 국립문화유산연구원으로 옮겨졌으며, 기단 네 귀퉁이에 있던 사자상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해오다 탑과 함께 옮겨졌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탑이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탑은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바닥돌은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같은 조각을 두어 땅에 밀착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며, 7단이나 되는 기단의 맨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탑신에는 앞뒤로 문짝을 본떠 새겼는데, 사리를 모시는 곳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치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여러 가지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법천사터에는 지광국사의 탑비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탑비를 세운 때가 고려 선종 2년(1085)이므로 묘탑의 조성시기는 국사의 입적 직후인 1070∼10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탑 전체에 여러가지 꾸밈을 두고,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등 자유로운 양식에 따라 만들어졌는데도, 장식이 정교하며 혼란스럽지 않다. 화려하게 꾸민 장식으로 인해 엄숙한 멋을 줄어들게 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다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다._국가유산포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1911년 이전에는 이런 모습이었습니다(자료사진 합성)
▼ 평일에 방문해서 그런지 해설해 주시는분이 없어서 좀 아쉽기는 했는데,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공부 좀 했습니다
이 승탑은 지광국사의 장례 때 사리를 운반하던 가마가 화려한 외국풍의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가마를 본떠 제작된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매우 파격적인 디자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파격적인 승탑은 지광국사현묘탑 하나 뿐 입니다
※ 다음은 국가유산채널에서 인용한 지광국사탑의 험난한 여정에 대한 글입니다
1910년경 한 일본인이 원주 문막 부론면 법천사지 일대를 농장으로 사들였는데, 이 농장주는 조선총독부(데라우찌)의 허가도 없이 또 다른 일본인에 지광국사 현묘탑을 31,500원에 팔아넘겼습니다.
지광국사현묘탑을 사들인 일본인은 1912년 몰래 오사카(大板)로 반출해 버리지만, 조선총독부에 강력한 반환지시로 지광국사현묘탑은 3년 만에 경복궁으로 옮겨집니다.
6.25 전쟁 중에 폭탄(유탄)에 맞아 12,000조각으로 파손된 이탑은 1957년경부터 임천이란 분의 주도하에 복원되기 시작,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 지광국사는 고려 전기(高麗 前期)의 이름난 고승으로 현종(제8대) 임금과 문종(11대)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특히 문종(文宗) 임금은 지광국사를 왕사(王師)로 삼았다가 훗날에는 국사(國師)로 임명하였습니다. 이 승탑은 선종(宣宗) 2년(1085)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지광국사현묘탑의 부위별 명칭을 자료를 통해서 알아보았습니다
▼ 상륜부부터 보면 너무 아름다워서 사람이 아닌 천상의 석공이 내려와서 만든 것처럼 느껴집니다.
▼ 탑신부에도 빈자리가 없는 정도로 각종 문양과 석가모니상등으로 꽉 차 있습니다.
▼ 상층기단갑석은 마치 가마의 가마발 장식처럼 조각하였습니다. 자세히 보면 깨진 부분을 기가 막히게 보수하여 복원시켰습니다.
하층기단석 네 곳의 꼭지에 앉아 있는 석수는 사장이며, 파손상내가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 하층 기단석을 사방에서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식은 우석이라고 하는 마치 용의 발톱처럼 보입니다
▼ 탑신석의 동측면
▼ 탑신석의 서측면
▼ 탑신석의 남측면
▼ 탑신석의 북측면
▼ 상층기단석의 동측면
▼ 상층기단석의 서측면
▼ 상층기단석의 남측면
▼ 상층기단석의 북측면
▼ 하층기단부 동측면
▼ 하층기단부 서측면
▼ 하층기단부 남측면
▼ 하층기단부 북측면
▼ 용의 발톱처럼 보이는데 자료에서 보면 '우석'이라는 탑재이며, 4곳에 설치되어 있으며, 탑의 위엄을 더해주는 느낌입니다.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에는 불교공예 전문가에 의해서 복제된 지광국사현묘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원작과 매우 비슷하게 제작되었으며, 상륜부의 보발이 좀 다르기는 합니다만, 이 또한 큰 작품에는 틀림없습니다.
재질을 보면 틀에 청동을 녹여 부어서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 지광국사현 묘탑은 삼국시대와 조선을 다 뒤져도 없는 단 하나밖에 없는 걸작이어서 이를 탐내는 일본 X들이 많았습니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지광국사현묘탑의 이동경로 및 보수이력을 알아보았습니다.
▼ 연도별로 승탑이 이전된 사진자료를 알아보았습니다
▼ 1911년 9월 법천사에서 무라카미병원 앞으로 이전된 모습 (1년 후인 1912년에 일본 오사카로 반출)
▼ 1923년(조선물산진흥회-조선총독부 미술관 앞)
▼ 1923년
▼ 1923년
▼ 1932년(추정)
▼ 1951년(6.25 전쟁)
▼ 1974년
▼ 1977년(구 중앙박물관)
▼ 1981년
▼ 1986년
▼ 1990년
▼ 1991년
▼ 2015년
▼ 2016년 수리를 위해서 지광국사현묘탑을 해체, 포장하고 있습니다
▼ 옥개석을 보수하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직원(국내 최고의 기술과 정성으로 탑은 감쪽같이 복원되었습니다)
▼ 2023년에 보존처리를 끝내고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 옮겨 놓은 모습이며, 2024년 5월부터 조립작업에 들어가서 2024년 11월에 조립을 끝내고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였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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