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국사탑비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法泉寺址)에 있는 지광국사 해린(智光國師 海麟, 984-1070)의 탑비로서, 입적 후 15년이 지난 고려 선종 2년(1085)에,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안민후(安民厚)가 해서로 써서 이영보(李英輔)와 장자춘(張子春)이 새겨 지광국사의 삶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입니다.

 

지광국사는 해린(海麟)은 원주 출신의 승려로8살의 나이에 출가하여, 21세에 승과에 급제하였습니다. 이후 문종까지 여러 왕을 거치면서 최고의 승려로 활약하였습니다. 역대 왕들은 자주 지광국사를 왕실로 초청해 말씀을 들었고, 임금과 함께 국왕의 수레인 어가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특히 문종 10년(1056)에 왕사(王師)로 추대하여 스승으로 모시었으며, 문종 12년(1058)에는 국사(國師)에 오른 당대 최고의 고승이 되었고, 문종 24년(1070)에 87세의 나이로 법천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 왕사(王師): 왕의 스승이 될 만한 승려라는 뜻으로, 지덕이 높은 승려에게 내리던 칭호, 국사보다 한 단계 낮다.
- 국사(國師): 나라의 스승이 될 만한 승려라는 뜻으로, 지덕이 높은 승려에게 내리던 칭호. 가장 높은 단계이다.

 

※ 인용한 자료는 e뮤지엄, 국가유산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주역사박물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지광국사현묘탑은 법천사지의 지광국사탑비앞에 있었습니다만, 1911년에 일본X들에게 팔리는 등  113년 동안 유랑길에 올랐다가 2024년 11월에 돌아와서 지금은 유적전시관에 있습니다. 간절함이 지광국사현묘탑을 환귀본처(還歸本處)하였습니다


▼ 법천사지의 서쪽에 보면 지광국사현묘탑과 탑의 자리가 보입니다. 남아 있는 유구로 보면 지광국사현묘탑을 위한 별도의 불전(佛殿)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건물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이 유리건판 사진은 아마도 1911년 후반이나,  1920년대 초로 추정이 됩니다. 사진에서 보면 지광국사현묘탑은 이미 서울명동으로 이전된 후라서 탑비만 남아 있습니다.

 

▼ 유리건판으로 보는 자료사진에서는 비신(碑身)이 사선으로 깨져 있는데, 누군가 고의로 깨트린것 같지은 않고, 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깨진 것으로 보입니다. 다행히 지금까지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 지광국사탑현묘탑과 지광국사탑비가 있는 곳에는 여러 건물들이 많았다는 여러 흔적들이 많이 보입니다.

 

▼ 지광국사현묘탑의 수난기록과 귀향의 과정을 알아보면,

- 1911년 9월 : 일본인 골동품상(모리)이 실업가(와다 쓰네이치)에게 매각

- 1912년 5월 : 후지타 헤이로타에게 매각하여 오사카로 반출

- 1912년 10월 : 조선총독부(데라우치)의 반환명령

- 1915년 9월 : 조선물산공진회 전시. 그후 9차례 이전

- 1950년 6월 : 6.25 전쟁때 폭탄에 의하여 12,000조각으로 대파

- 1957년 : 시멘트로 복원

- 2005년 10월 : 국립고궁막물관에 존치

- 20145년 3월 : 보존처리를 위하여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전

- 2024년 11월 : 원주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 안치

 

▼ 지광국사탑비앞의 현묘탑의 자리는 비어 있습니다만,  2024년 11월에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 돌아와서 전시 중입니다.

 

▼ 지광국사현묘탑을 합성사진으로  재현해 보았습니다. 원래는 이런 모습이었습니다만, 너무 아름답다 보니, 1911년 일본 X 놈의 손에 해체되어 오사카로 반출되고 말았습니다.

 

▼ 지광국사현묘탑 자리는 비어 있는 채로 120여 년을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지광국사탑비입니다.

 

▼ 탑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전체 높이는 4.55m입니다.

받침돌에 있는 거북의 얼굴은 용의 머리모양과 비슷하며, 특히 등껍질에 사각형을 여러 개 그리고 그 안에 왕(王) 자를 새긴 장식이 매우 이례적입니다

 

비신의 머릿돌에는 연꽃잎 무늬와 구름 속의 용을 새겼으며 전체적으로는 왕관 모양처럼 보입니다. 귀부와 구름무늬의 이수에 테두리를 당초문으로 잘 엮은 비신이 어울려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이는 비입니다.. 

 

▼ 탑비의 전면

 

▼ 탑비의 후면

 

▼ 자료사진으로 탑비의 지붕돌의 모습을 보면 마치 왕관처럼 보이는데, 매우 세밀하게 다듬어서 비신에 얹었습니다.

 

▼ 지광국사의 속명은 해린(海麟)이며, 시호는 지광(智光), 탑호(塔號)는 현묘(玄妙)입니다.
984년(성종 3)에 원주에서 출생하였으며, 고려전기 법천사, 개경 해안사, 용흥사, 평양 중흥사, 수다사, 현화사 등에서 활동하면서 법상종 교단을 이끌다가 1056년 왕사, 1058년 국사에 오른 승려이며, 1070년(문종 21)에 87세로 사망하였습니다.

 

▼ 지광국사가 입적 후 15년이 지난 고려 선종 2년(1085)에,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안민후(安民厚)가 해서로 써서 이영보(李英輔)와 장자춘(張子春)이 새겼습니다.

 

▼ 탑비의 탑신상단(점선)을 자세히 보면 매우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도솔천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 제액(題額)의 글자는 贈諡智光國師玄妙之塔碑銘(증시지광국사현묘지탑비명)이며, 제액의 상단과 좌. 우로는 도솔천을 종이에 그린 듯이 신들린 솜씨로 새겼습니다. 마치 자개를 수놓은 듯한 매우 뛰어난 작품입니다

 

▼ 무겁고, 어려운 탑비의 내용을 이해하려는 것보다, 탑을 받치고 있는 귀부의 용머리를 보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 탑비의 몸돌 양 옆면에 새겨진 구름 속 용 두 마리의 역동성이 정교하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현재 비신의 옆면에 용을 새긴 탑비는 세 개가 있는데,

하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둘째, 안성 칠장사 해소국사비,

셋째, 개성 현화사 현화사비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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