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말씀이 샘솟는다는 이름을 가진 법천사는 명봉산(鳴鳳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말 고려 초기 대표적인 법상종(法相宗) 사찰이며, 고승이었던 지광국사가 젊은 시절 승려의 길로 들어선 곳이자 말년에 입적한 곳이기도 합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이곳을 방문한 뒤 『유원주법천사기』를 썼는데, 그 책에 따르면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법천사지는 조선중기에 폐사되었지만, 조선말기까지는 당간지주와, 지광국사현묘탑과 지광국사탑비는 남아 있었으며, 그중에서 빼어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던 지광국사현묘탑은 일본 X들이 1912년에 오사카로 반출하였다가, 3년 후인 1915년에 경복궁으로 돌아왔습니다

발굴조사가 끝난 법천리를 보면 동네 전체가 절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척 넓어서 법천사의 크기를 짐작하게 합니다.

 

법천사지 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과 196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지광국사탑비의 불전에 대한 조사를 하였으며, 2001년 ~ 2004년까지 4차에 걸쳐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하였습니다.

법천사의 가람배치 양식을 보면, 남한강과 연결된 법천(法川)을 끼고 사찰이 크게 조정되어 있는데, 남한강의 흥원창까지의 거리는 약 1.5km, 당간지주와 사찰의 가람이 집중적으로 배치된 권역과의 거리를 보면 직선으로 약 450미터 정도여서 아마도 자체적인 행정, 종교, 생활등 자급자족이 가능한 집단 생활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의 거돈사, 흥법사, 그리고 여주의 고달사(고달원)와 같은 시기에 크게 번성했던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는 국가유산포털, e뮤지엄, 지역N문화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당간지주가 있는 곳부터 법천사지는 시작됩니다. 저 멀리로 법천사지 건물터와 지광국사탑비가 있습니다. 

 

▼ 법천사지를 하늘에서 보면, 동네 전체가 절터였나? 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로 엄청 넓습니다. 앞으로 더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아마도 당간지주가 있는 곳은 법천사의 중심지가 아니고, 법천사의 입구라는 상징적 의미만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 법천사지에 주민들이 아직 살고 있을때의 사진입니다

 

▼ 주민들이 이전하고 발굴조사가 사찰터의 발굴조사가 끝난후의 모습입니다

 

▼ 1910년~1920년대로 보이는 유리건판사진이며, 조선총독부는 수많은 사진사를 양성하여 조선으로 보내 전국의 모든 것을 촬영하여 사진으로 남겼으며, 해방 후에는 다행히 남겨놓고 갔습니다.

 

조선총복부의 유리건판 사진은 일반적인 미국이나, 유럽의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보다, 구체적이며, 체계화되어 있어서 얼마나 치밀하게 식민지의 정보를 만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법천사지 전시관이 지어지기 전의 당간지주

 

▼ 법천사지 유적전시관 앞에 세워져 있는 당간지주이며, 당간은 철당간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원래 지역주민들이 살던 집을 방문자센터로 꾸며서 운영한다고 하는데, 평일이서 그런지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주차장은 방문자센터 옆에 있습니다.

 

▼ 별원권역 II-가구역은 발굴조사가 완료되어 보호 차원에서 흙이 덮여 있습니다만, 실제로 보면 엄청난 규모였던 사찰이었다는 알게 됩니다.

 

▼ 법천사지의 발굴조사가 끝난 권역의 항공사진입니다.

 

▼ 우물터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데, 아마도 절터에서 살았던 주민들이 물을 길었던 우물이었을 것입니다

 

▼ 발굴조사가 끝나고 유구들은 정리하여 쌓아 놓았으며, 없어진 초석은 제작하여 설치하였습니다. 법천사지는 남. 북으로 길게 되어 있는데, 남쪽방향으로 보는 모습입니다.

 

▼ 북측으로 보는 모습입니다.

 

▼ 법천사의 건물들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며, 마치 회암사지를 보는 듯 매우 넓습니다.

 

▼ 얼마나 오래된 나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살아온 세월이 혹시 500년은 되지 않았을까?

 

▼ 서원이 있었다는 표지석인데, 어떤 서원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알 수 없는 건물지

 

▼ 좀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법천사지이며, 금당, 강당등이 보입니다.

 

▼ 중문지를 지나면 금당지이며, 석탑은 2기, 공양보살상(혹시 석등?)도 2기로 되어 있어 전형적인 신라의 사찰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회랑이 감싸고 있는 금당지와 강당지를 옆으로 보는 모습입니다. 

 

▼ 별원권역 서쪽으로는 지광국사탑비가 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탑비도 유적전시관 내부로 옮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금당지 부근에서 유적전시관을 당겨봅니다. 아직도 발굴조사할 구역이 남았는지 굴삭기 두대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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