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용주사의 천왕문을 지나면 왼쪽에 용주사 효행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부분 오래되고 큰 절집에서는 성보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박물관을 공개하지 않는 절집도 있지만 화성 용주사는 연중무휴로 열고 있습니다.
성보박물관을 운영하는 목적은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의 도난 방지와 취약한 화재로부터 보호에 있습니다. 화성 용주사의 문화재 현황을 보면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에 대한 불교 장엄구와 효에 대한 서적 등이 대부분입니다.
효행박물관은 연중무휴로 열기 때문에 09:00~17:00시 사이에 들어 가서 보시면 됩니다
▼ 효행박물관에 들서면 보이는 강렬한 색깔의 입구 표지판입니다. 시계 방향으로 둘러보시면 되며,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주의해야 합니다.
▼ [자료사진] 용주사 매표소 앞의 주차장 옆에 있는 안내판에 있는 효행박물관 소장 불교문화재의 사진입니다.
※ 참고로 화성 용주사의 문화재를 알아 보겠습니다.
※ 국보나 보물의 이름 앞에 부여된 일련번호는 문화재청의 방침에 의하여 폐지되었습니다.
- 국보
1.국보 용주사 범종(동종)
2.국보 용주사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
- 보물
1.보물 용주사 대웅보전(2022년에 경기도 문화재에서 보물로 격상됨)
2.보물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및 복장전적일괄
3.보물 안성 청원사 건칠아미타여래불좌상 복장전적일괄
- 경기도 유형문화재
1.경기도 유형문화재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전적수사본)
2.경기도 유형문화재 화성 용주사 전답양안
3.경기도 유형문화재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 상량문
4.경기도 유형문화재 화성 용주사 나무대성인로왕보살번
5.경기도 유형문화재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좌상
6.경기도 유형문화재 화성 용주사 지장전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일괄(동자상 포함)
7.경기도 유형문화재 화성 용주사 삼장보살도
8.경기도 유형문화재 화성 용주사 4폭(4곡)병풍
9.경기도 유형문화재 화성 용주사 중종
10.경기도 유형문화재 화성 용주사 금동향로
11.경기도 유형문화재 화성 용주사 청동향로
12.경기도 유형문화재 화성 용주사 오층석탑(세존사리탑 아님)
- 경기도 문화재자료
1.경기도 문화재자료 화성 용주사 천보루
2.경기도 문화재자료 화성 용주사 목조불패
3.경기도 문화재자료 화성 용주사 목조소대
4.경기도 문화재자료 화성 용주사 청동시루
▼ 용주사 효행박물관 홈페이지에서는 소장 문화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올려져 있습니다.
▼ 불설대부모은중경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부모님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새긴 경판으로 불교 경전 중에서 유교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전파된 경전입니다.
이 경판은 정조가 특별한 지시에 의하여 주자소에서 만들어졌는데, 상당히 상세하고 정밀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목판을 비롯하여 동판과 석판이 같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은 당대 최고의 장인과 예술가와 문장들이 참여하였으며, 특히 변상도는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문은 당대의 명필이던 오수(寤修) 황운조(黃運祚, 1730~1800) 서풍(書風)의 명품 글씨로 만든 경판(經版)입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은 정조 20년~23년(1796~1799년) 사이에 조성되었으며, 총 73이 남아 있습니다. 목판과 동철판은 인쇄용이지만, 석경판은 인쇄용이 아니고 자체가 경전입니다
- 목판(42판) : 변상도(6판), 한문본(11본), 국문본(25판) 등이 양면으로 양각
- 동철판(7판) : 동철판은 변상도 7판이 단면에 양각
- 석경경(24판) : 한문판, 한글판으로 단면에 음각(인쇄용이 아님)
[사진자료:용주사 효행박물관]
▼ [사진자료:경기관광포털] 용주사상량문(龍珠寺上樑文)은 용주사가 거의 다 지어질 즈음 정조 14년에 정조의 명으로 좌의정 채제공이 중국산(소주) 비단위에 묵서로 쓴 두루마기 형태의 상량문이며, 내용은 용주사의 창건 배경과 국왕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습니다.
길이가 무척 긴데, 비단 원단 끝까지 글을 썼습니다. 그 당시 채제공의 나이가 70이고 비단이라서 미끌거릴 텐데 거리낌 없이 써 내려간 글씨 솜씨도 대단합니다. 너비는 77㎝, 길이는 15m입니다.
- [자료] 금강신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御製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는 전적수사본(典籍手寫本, 경기도 유형문화재, 2책)이라고도 하며, 2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적수사본(典籍手寫本)이란 원본을 보고 베낀 책이라는 뜻입니다
조선 정조 19년(1795)에 왕이 직접 써서 내린 불교식 가사(歌辭)를, 손으로 옮겨 적은 본으로 , 화산의 용주사에 부처를 모시고 복을 기원하는 글이라는 뜻입니다. 필사본인 기복게는 2책인데, 종이로 꾸민책과 비단으로 꾸민책이 각 1점씩 있습니다
용주사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전적수사본)외에도 현재 3종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데, 정족산성본(鼎足山城本)‚ 오대산성본(五臺山城本)‚ 태백산성본(太白山城本)이 있으며, 세 본 모두 표지 서명은 ‘어제화산기복게(御製花山祈福偈)’이며‚ 크기 등 모든 면에서 동일하지만, 규장각 소장본은 책이 아니라 31폭의 장첩으로(長帖:긴 종이를 접어 책처럼 한 장씩 낱장으로 볼 수 있게 한 것), 글씨체도 다르게 보이며 한 행의 글자 수도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 용주사본은 책으로 만들어졌고, 규장각 소장본은 장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가사(歌辭) : 하소연하듯이 길게 말을 늘어놓은 노래말이며, 시보다는 좀 더 길고, 시조는 단가(短歌)라고 하며, 가사는 장가(長歌)라고 합니다
※게송(揭頌)은 시의 일종이며, 수행을 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든지, 법문을 설할 때 시로 자신의 감흥을 읊는 것입니다.
- 이상은 문화재청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 [자료사진]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는 여러 번 필사되었는데, 규장각 소장본은 접을 수 있는 장첩(長帖)으로 되어 있습니다
▼ [자료:문화재청] 용주사병풍 (龍珠寺屛風)은 4곡병풍이며, 정조가 용주사에 하사한 병풍입니다.
각 그림의 크기는 가로 65.5㎝, 세로 222.5㎝ 이며, 원래는 8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 폭의 그림이 연속성이 없어 보이는 것으로 봐서 4폭은 분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단원 김홍도(1745∼)의 그림으로 정조가 용주사 창건시 하사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단원의 화풍과 많이 다르며, 민화적 형식을 가진 작품입니다
▼ 금동향료(金銅香爐, 경기도 유형문화재, 2개)
정조(재위 1776∼1800)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용주사에 청동향로와 함께 내려준 향로이며, 청동향로와 함께 호성전에서 왕실의 안녕을 위해 향공양을 하던 향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개가 아니고 똑같은 형태로 두개이며, 주물로 만들어졌습니다
명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4면으로 된 몸체의 각 면에는 순금으로 덩굴무늬를 만들어 부착했고, 사각으로 된 뚜껑에도 금장식을 하였습니다. 향로는 4개의 높다란 다리에는 용모양이 조각돼 있습니다.
▼ 청동향로(靑銅香爐, 경기도 유형문화재)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용주사에 금동향로와 함께 하사한 청동향로입니다.
팔각형의 중국제 향로이며, 용주사 금동향로와 함께 호성전에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부분에는 각 면의 중앙에 만세토록 즐겁기를 바란다는 의미의 ‘만세락(萬歲樂)’이라는 축원문이 새겨져 있으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향공양을 올렸던 향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용모양이 조각된 반원모양의 손잡이가 2개 달려있고, 짧은 4개의 다리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밖으로 벌어져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 [자료사진] 몸체는 8각형이며 각 면마다 꽃모양의 창을 만들고 그 안에 산과 물, 나무들을 도드라지게 새겨 넣었습니다.
▼ [자료사진:경기관광포털] 화성 용주사 중종(華城 龍珠寺 中鐘)
용주사에는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는 두개의 동종이 있는데, 하나는 대붕보전앞에 있으며, 또 하나는 효행박물관에 있는 중종(中鐘)입니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동종은 보물이며, 효행박물관에 있는 동종은 경기도 유형문화재입니다
용주사 효행박물관 중앙에 있는 종은 용주사가 창건하던 1790년(정조 14년)에 만들어져서 대웅보전 안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종신의 사면에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축원패를 새겨서 이 종이 왕실의 안녕을 위하여 발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종(中鐘)의 형태를 모면 고리는 두 마리의 용이 엉킨 모습인데, 음통이 없어지고 두 마리의 용이 엉켜 있는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종신을 자세히 보면 전패가 보입니다. 종의 표면에 위패나 전패를 새기는 종은 가끔 보는데, 중종은 왕실의 안녕을 축원하는 전패를 새겼습니다
종의 표면에 새긴 전패(축원패)는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전패인데, 중종에는 4개의 전패가 새겨져 있습니다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세자저하수천추(世子低下壽千秋)
자궁저하 수만세(慈宮邸下壽萬歲)_특이하게 헤경궁홍씨(정조의 모친)의 전패도 새겼는데, 주상전하와 같은 격으로 새겼습니다.
대부분의 사찰의 범종(동종)은 여러 명으로 이루어진 주종패의 스님들이 주로 만들었는데, 용주사의 중종은 당시 용주사 중창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사일(獅馹)스님이 총 감독격인 감역(監役)을 맡고, 주종은 18세기 전라도를 중심으로 크게 활약한 장인들인 전라도 장흥의 주종패가 만들었습니다
종의 몸체 하단에는 명문이 남아있어, 제작 연대와 주종 장인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 윤씨 주종패가 제작한 범종은 문헌 기록 1건을 포함하여 모두 12점 정도 알려져 있으며, 용주사 중종은 현존하는 유물 가운데 마지막 작품에 해당되며, 전라도를 벗어나 경기도 사찰에 봉안하기 위해 만든 유일한 종입니다.
이들 윤씨 주종패는 종의 하대에 전라도 장흥편수(全羅道 長興片手) 윤덕칭(尹德稱), 윤덕흥(尹德興), 윤계원(尹啓元)의 이름을 새겨 넣었고, 숭정기원후 163년을 새겨서 중종(中鐘)이 정조 14년(1790년)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몽금척 족자(1795년)
몽금척은 금척무(金尺舞)를 출 때에 쓰는 족자이며, 태조 이성계가 아직 임금에 오르기 전 꿈속에서 신선이 주었다는 금척을 소재로 정도전이 지은 당악정재(唐樂呈才)의 하나입니다.
용주사에 전하는 몽금척 족자는 화려한 장황과 금박으로 아름답게 단장되었으며, 정조가 1795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고자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축하공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전합니다. 이후 정조가 용주사에 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 당악정재(唐樂呈才) : 고려시대에 솔나라에서 유래한 궁중무용이며, 조선말까지 전래되었습니다
※ 향악정재(鄕樂呈才) : 당악(唐樂)과 구분하기 위해 우리 음악을 향악(鄕樂)이라고 하였고, 춤에도 당악정재와 향악정재로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 [자료사진:한국민족대백과사전] 참고로 당악정재(唐樂呈才)중에서 죽간자(竹竿子)의 춤입니다
▼ [자료사진:한국민족대백과사전] "원행을묘정리의궤"중에서 당악정재(唐樂呈才)의 하나인 포구락(두편으로 나눠서 공을 던지는 놀이)의 그림입니다.
▼ 용주사전패(龍珠寺展牌) 경기도 문화재자료
나무로 만든 왕실용 전패이며, 1790년 대웅보전 삼존불을 조성할 때 조각승이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전패는 조선 왕실의 안녕과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전패로 사찰의 주불전 불단 위(수미단)에 모셨던 위식 장엄구이며, 원래는 4개였으나, 현재는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것도 중요한 이름이 적힌 문구도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꾸며진 동물을 보면 황룡이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주상전하의 전패(정조)로 봅니다
보통은 일반인은 위패(位牌)라고 하지만, 절집에서는 불패(佛牌), 왕실의 패는 전패(展牌) 또는 원패(願牌)라고 하며, 직위에 따라서 꾸미는 모양도 크게 차이가 납니다.
일반적으로 전패는 주상,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내용으로 조성되며, 왕이면 황룡을, 왕비면 봉황, 세자면 용과 모란 등으로 장식하며, 절집의 불패(佛牌)는 연꽃으로 장식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왕실의 원패보다 좀 작습니다
[사진자료:경기관광포털] 화성 봉림사에서 1978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개금불사(불상에 금을 새로 입히는 행사)에서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후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소장되어 왔는데, 복장 유물 전체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자료사진] 화성 봉림사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공민왕 11년(1362년) 이전에 조성되었으며 1978년 불상 몸에 다시 금칠을 할 때 보물이 발견하였습니다.
복장 유물에서 공민왕 11년(1362년)과 조선 선조 16년(1583년)에 불상의 개금한 기록이 있는 불상조개금기가 나왔는데, 이 불상은 공민왕 11년 이전에 조성되었음 알 수 있습니다
▼ [자료사진] 용주사 효행박물관에는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 유물이 있는데, 1978년에 개금 할 당시 목조아미타불좌상 내부에서 사경 3종과 목판본 5종의 17점의 고려 후기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몇 가지만 알아보겠습니다.
1.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盤若波羅蜜經)
2.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紺紙銀泥大方廣佛華嚴經 ,권 제48)
3. 백지묵서묘법연화경(白紙墨書妙法蓮華經)
4. 백지묵서범망경(白紙墨書梵網經)
5. 과주묘법연화경합부(科注妙法蓮華經合部)등 입니다.
▼ [자료:경기관광포털] 동자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인 "화성 용주사 지장전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 일괄" 중에서 동자상 일부만 전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자상은 5개가 전시되어 있는데, 동자상은 불심이 곧 동심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어린 동자상의 모습을 많이 사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전시되어 있는 동자상은 모두 175㎝정도의 매우 큰 동자상입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인 "화성 용주사 지장전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 일괄"은 원래 본래 만의사(동탄) 지장전에 지장보살과 시왕의 시중의 권속으로 만들어진 동자상이었는데, 1669년 또는 1791년에 만들어졌다는 두 가지 설이 있으며, 1894년에 만의사 지장전이 무너져서 지금의 용주사로 옮겨져서 봉안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문화재는 모두 31구라고 하며, 동자상(5구)를 제외한 모든 시왕상은 지장전에 모셔져 있습니다.
▼ [자료사진] 용주사 지장전의 시왕상들이 모습입니다
▼ 화성 용주사 목조감실 (華城龍珠寺 木造龕室)
목조감실은 용주사 창건시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교공예품으로. 두 점이 남아있으며, 상륜부가 남아 있는 감실의 전체 높이가 217cm로 다소 높은 목공예풍입니다. 1점은 상륜부가 상륜부가 결실되었으며, 자료사진은 구할 수 없었습니다
원래 목조감실은 축성전(祝聖殿)에 있었다가 지장전과 대웅전으로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축성전이라는 명칭은 군왕의 위패가 모셔져 있던 곳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와 그의 비인 혜경궁 홍씨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 여주 신륵사 청동시루 (驪州 神勒寺 靑銅시루) _경기도 문화재자료
떡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종교를 가리지 않고 사용되어 왔던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공양 음식입니다.
시루로 떡을 만드는 원리는 물을 끓일 때 발생하는 뜨거운 수증기로 음식물을 익히는 아주 과학적인 우리 민족의 조리방법인데, 보통은 흙으로 만든 질그릇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의외로 사찰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시루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용주사에 소장되어 있는 이 청동시루는 원래 여주 신륵사에 있었으나 용주사에 전해진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 화성 용주사 남무대성인로왕보살번 (華城 龍珠寺 南無大聖引路王菩薩幡;경기도 문화재자료)
불교에서 번(幡)은 불, 보살의 위상을 드높이는 역할을 하며, 법회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며,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은 망자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보살입니다.
번(幡)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관정(灌頂) 의식에 사용하는 관정번(灌頂幡), 기우제가 열릴 때 뜰에 세우는 정번(庭幡)처럼 비단으로 만드는 평번(平幡), 여러 가닥의 실을 묶어서 만드는 사번(絲幡), 금속과 옥을 이어 만드는 옥번(玉幡) 등이 있습니다.
번(幡)은 보통 불전의 기둥이나 당간에 매달아 세우거나 탑 상륜부에 달아 놓기도 하는데, 중생들이 불교에 귀의하도록 이끄는 상징물입니다.
▼ 화성 용주사 목조소대(華城龍珠寺木造疏臺, 경기도 문화재자료)
소대는 전패와 같이 불단 위에 모셔지는 법구로, 의식의 발원문이나 소문을 말아서 보관하는 법구이며, 소통疏桶)이라고도 합니다 불단의 수미단에 올려져 있는 전패와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면과 측면에는 범자로 장식하였습니다.
목조 소대는 여러 점이 전해져 오는데, 범어사의 소대, 영국사의 소대를 참고로 비교하여 보았습니다.
▼ 화성 용주사 전답 양안에 자세한 내용은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회성 용주사에서는 나라에서 내려준 전답에 대한 재산의 상태를 아주 꼼꼼하게 기록하여 보관하였는데, 이것을 전답 양안이라고 합니다.
전답 양안(2건)은 기미 양안과 별본 양안을 가리키며, 두 양안은 녹색포로 감싼 표지에 무쇠 변철을 댄 철장(鐵裝)으로 의궤의 장황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전답 양안에는 토지의 면적, 위치, 등급, 토지 소유자, 토지 경작자 등의 내용이 상세하게 작성되어 있으며, 양안의 구성은 면 단위로 되어 있으며 하나의 면이 끝나면 해당 면의 토지면적과 생산량 등의 통계가 계산하였습니다.
- 기미 양안은 1799년(정조23)에 작성된 것으로 본 이름은 ‘가경사년칠월일용주사전답양안(嘉慶肆年七月日龍珠寺田畓量案)’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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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본 양안은 1804년(순조4)에 작성된 것으로 본 이름은 ‘가경구년양안(嘉慶玖年量案)’이다.
▼ [자료사진:경기문화재연구원] 양안의 표지
▼ [자료사진:경기문화재연구원] 화성 용주사 전답 양안(기미 양안 내용)
▼ 별본 양안과 전답 양안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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