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는 본래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되었다가, 병자호란 후 폐사되었던 갈양사이며,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경기양주)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이라 하고, 갈양사터에 다시 절을 창건 하면서 사도세자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태몽을 꾸었다고 하여 용주사(龍珠寺)라고 하였으며, 현륭원(융릉)의 원찰(願刹)로 삼았습니다.
※ 융릉은 장조(사도세자)의 합장릉이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후 경기도 양주군 배봉(拜峯)에 장사지낸 후 묘를 일반인 묘처럼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가, 정조 원년(1776)에 사도세자의 격에 맞게 영우원(永祐園)으로 고쳤고, 정조 13년(1789)에 경기도 수원 화산(지금의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으로 옮긴 후 다시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쳤습니다.
고종이 조선의 국호를 바꾼 대한제국 광무 3년(1899)에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면서 현륭원(顯隆園)을 융릉(隆陵)으로 바꾸었습니다. 즉 고종 말년에 이르러서야 사도세자에서 왕으로 추존하게 되면서 묘(원)도 릉(陵)으로 격상 되었습니다
▼ 용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2교구 본사이며, 수원, 용인, 안양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 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는 대찰(大刹)입니다.
▼ [자료:서울 아카이브] 일제 강점기때의 용주사를 좌측면 가까이서 보는 사진인데,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
▼ 용주사의 매표소앞에 있는 가람 배치도입니다. 사진이 작아서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 [자료:화성연구회] 용주사의 일제강점기때의 사진인데, 옛날의 논밭은 지금 주택과, 지방도로가 지나가는데 멀리 용주사가 보이고 소나무가 엄청 울창했습니다.
▼ 용주사의 천왕문입니다만, 용주사가 창건될때는 없었던 문이며, 2000년 전후로 지었습니다.
▼ [자료:화성시] 2000년대초 자료사진인데, 지금의 천왕문의 자리에 있었던 삼문 형태의 출입문이 정문이었습니다. 문 오른쪽에 매표소가 보입니다.
▼ 천왕문에는 꼭 있는 사천왕상입니다. 우주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을 형상화시킨 불교조각이며, 각 사찰마다 동, 서, 남, 북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사찰마다 다르게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천왕상을 만드는 재료는 주로 나무를 다듬어서 만들기도 하지만, 드물게는 진흙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을 소조 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이라고 하며 특징은 거대하고, 표면이 매우 매끈하다는 것입니다. 용주사 사천왕상은 목조사천왕상(木造四天王像)입니다
▼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 머릿글에 '수원용주사사적비'라고 각서 되어 있는데, 옛날에는 화성지역은 수원군이었습니다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본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아들이다”라고 하고,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이곳 화산(花山)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였으며, 현릉원의 능사(陵寺)로 용주사를 중창하고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정조는 측근들과 대신들을 시켜서 정조14년(1790년) 2월부터 갈양사터에 새 절을 짓기 시작으로, 전국의 내노라 하는 건축 기술자들을 총 동원해서 그해 9월에 대웅전에 불상을 점안하여 마무리 하였는데, 용주사 건립에는 총 8개월(216일)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정조가 직접 ‘용주사’라는 절집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에는 부친인 사도세자의 꿈에 용이 구슬을 안고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정조가 태어났다는 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좌의정 채제공의 '화산용주사상량문'에서 "임금이 처음으로 사찰의 이름을 내리신 것은 평상시 부처의 덕을 갚고자 한 까닭이다”라는 부분에서 그 사연을 알 수 있습니다.
▼ 절집으로 들어가는 길 양 옆으로는 불교문구가 새겨진 입석이 많이 세워져 있는데, 부모은중경에서 인용한 글귀들이라고 합니다.
이 입석들은 20여개가 길 양쪽으로 세워져 있는데, 설에 의하면, 일제강점기때 일제에 아부한 승려 강대련이 세운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불교 경전의 글귀들이 있어서, 쉽사리 없애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 불교계의 악마라고 불리며 일제강점기때 30년간 용주사 주지를 하였던 악질 친일민족반역자 강대련(1875~1942)에 대해서 좀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강대련은 불교계의 수치이며, 용주사의 치욕적인 민족반역자였습니다
강대련은 친일인명사전에도 등록된 인물이며, 1922년 3월 26일 오전 11시 20분경 시내 다옥정(多屋町) 1가 24번지에 유하고 있는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에게, 경성에서 개최중인 불교유신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부터 올라온 김상호ㆍ정맹일 외 1백여명은 「불교계 대악마 "강대련" 명고축출(佛敎界 大惡魔 姜大蓮 鳴鼓逐出)」이라는 깃발을 들고 침입하여 그의 등에 소고(小鼓)를 지은후 시내 남대문통 일정목(一丁目· 1번지) 근처로 끌어내어 등에 지운 북을 치며 소리를 지르며 종로 네거리를 지나 동대문으로 향하도록 하였다(동아일보)
명고축출(鳴鼓逐出)이란 승복을 벗겨 속복으로 갈아입힌 뒤 등에다 북을 지고 두드리게 하면서 사찰에서 쫒아내는 것을 의미하는데, 강대련은 이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해 스스로 명고산인(鳴鼓山人)이라는 별호를 지어 붙였습니다. 이런 친일행위는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지속돼, 그는 용주사 주지를 맡아 죽을 때까지 호의호식했습니다.
▼ 到此門來, 莫存知解(도차문래, 막존지해) 이 문에 이르면, 지식과 분별을 버려라.. 뭣좀 안다고 까불지 말고, 모두 버리고 들어와라...뭐... 그런 부처님 말씀이겠죠??? 그런데 친일민족 반역자 용주사 주지 강대련은 이런 글귀들을 돌기둥에 새기라고 하면서 뭐~ 느끼는게 없었나 봅니다.
▼ [자료:문화재청] 일제강점기 때의 용주사이며, 홍살문이 보입니다. 이때는 따로 일주문이나, 천왕문이 없이 홍살문을 지나면 삼문이 곧 정문이었습니다
▼ 홍살문 좌측의 용주사 효행박물관입니다. 오층 석탑도 보이는데, 나중에 따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 부모은중경탑이며, 원래는 호성전 앞에 있었는데, 호성전이 불타버리고, 효행박물관 앞으로 옮겨 왔습니다
▼ 부모은중경 탑은 옛날에는 호성전 앞에 있었습니다. 호성전은 정조와 사도세자의 전패를 모신 불전이었는데 어느 여름에 불타버리고 말았으며, 부모은중경탑은 효행박물관 앞으로 옮겼습니다
▼ 부모은중경탑은 탑신에는 글귀가 빼곡합니다.
▼ 영화로 유명해진 안성 석남사에도 똑같은 부모은중경 탑이 있습니다.
▼ 부모은중경의 글귀를 전부 다 읽어 보기는 어려워서 큰 제목만 옮겨 보겠습니다.
1) 아이를 배어서 지키고 보호해 주신 은혜,
2) 해산함에 임하여 고통을 받으신 은혜,
3) 자식을 낳고서 근심을 잊으신 은혜,
4) 쓴 건 삼키고 단것은 뱉어 먹여주신 은혜,
5)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이신 은혜,
6) 젖먹이고 사랑으로 길러주신 은혜,
7) 목욕 세탁 더러움을 씻어주신 은혜,
8) 멀리 떠나가면 근심 걱정하신 은혜,
9) 자식을 위해서 모진 일을 하신 은혜,
10) 임종 때도 자식 위해 근심하신 은혜.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보모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하고자 함입니다
▼ 탑의 면석에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 (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의 판화를 우주와 탱주 사이에 새겼습니다
▼ 용주사로 들어가는 문은 특이하게 삼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통은 천왕문이 있는데, 용주사는 삼문이 있고 좌우로 행랑이 붙어 있습니다. 마치 왕릉의 재실 같은 모습으로도 보이기도 하고, 관아의 문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렇게 삼문을 설치한 이유는 정조가 현륭원(융릉)에 참배하고 묵을때 인원을 통제하여야 하고 수행원들이 묵을 방이 필요했으므로 행랑을 설치하였습니다.
용주사를 중건할 때는 없었는데, 공사가 끝날 때 즈음해서 필요성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받아서 지었습니다.
이 삼문이 없었을 때는 천보루가 정문이었습니다.
▼ [자료사진] 1950년의 자료사진이며, 삼문앞의 길이 그냥 흙길이었으며, 삼문중에서 가운데 문만 남기고 두문은 벽돌로 막아버렸습니다_다음카페(아름다운 5060)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용주사(龍珠寺) 삼문의 현판 글씨와 주련 글씨는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이 썼습니다. 주련의 첫머리 글자는 용주사불(龍珠寺佛)로 시작합니다.(인터넷에서 인용하였습니다)
龍蟠華雲(용반화운) 용이 꽃구름 속에 서리었다가,
珠得造化(주득조화)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寺門法禪(사문법선)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佛下濟衆(불하제중)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 용주사(龍珠寺) 삼문의 현판 글씨와 주련 글씨를 쓴 사람은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1871-1942))인데, 이 사람은 서화, 서예에 능했던 사람으로, 궁중요리에도 능해서 궁에서 행사음식을 총괄하는 대령숙수(待令熟手)'를 했으며, 음식집 경영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서 조선 최초 요릿집인 명월관을 열었던 분입니다.
▼ 삼문앞에는 두 마리의 해치가 문을 지키고 있으며, 보통 궁에서 보이는 해치인데, 그만큼 용주사는 능사(陵寺)로 특별한 절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좀 너무 귀여운 것 아닌가요? 너는 뭣하러 왔느냐고 묻는 듯합니다.
그런데 해치상의 받침돌에 새겨진 글씨는 잘 안 보이는데, 왼쪽은 유... 청정수(?)인 듯한데 전체 각자가 안 보이니 긍금하기도 합니다
▼삼문으로 들어서면 천보루 앞 마당입니다. 천보루 좌우로 보면 행랑이 높게 이어져 있는것이 보이는데, 정조가 폐사된 갈양사를 용주사로 이름을 바꾸고 중건할 때는 천보루가 정문으로 설계되어 공사를 마치게 되었는데, 정조가 현륭원(융릉)에 행차하게 되면 수행원도 많고, 또한 인원들의 통제가 필요해져서 천보루 앞에 삼문을 설치하게 되면서 절집의 문이 이중문인 셈이 되었습니다.
▼ 읍혈록(泣血錄)은 혜경궁 홍 씨가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서술한 자서전입니다.
혜경궁 홍 씨는 1795년 정조 19년에서 순조 6년까지 12년의 동안의 궁중에서의 사건에 대한 서술적인 내용을 남겼는데 주로 개인적인 입장에서 친가, 순조, 순조 등에 대한 내용으로 4편의 책으로 만들어졌으며, 한중록이라고도 합니다.
▼ 스님들의 요사채 앞에 있는 동종이며, 용주사의 필요에 의해서 근래에 만들어진 종이며, 문화재는 아닙니다. 문화재로 등재된 동종은 2종이 있습니다. 하나는 효행박물관에, 다른 또 하나는 대웅보전 옆에 있습니다
▼ 천보루의 왼쪽 행랑과 만수리실이 보수공사가 있어서 가림막으로 막아 놓았습니다.
▼ 용주사 천보루앞에 세워진 오층석탑입니다. 용주사에는 두기의 오층석탑이 있는데, 하나는 효행박물관 옆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천보루앞에 있습니다.
천보루 앞에 있는 오층석탑은 형식으로 보면 고려시대의 양식인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세존 사리탑이라고 하는데, 숙종 28년(1702년) 성정스님이 부처님 진신사리 2 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했다고 하는데, 확인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떨어져 보이는데, 하부의 규모가 작아서 기다랗게 보이며, 1층의 옥개석(지붕돌)이 작아서 균형미는 없어 보입니다.
▼ 사찰의 탑은 보통 금당 앞에 세우는데, 용주사의 탑은 입구에 세워졌습니다.
▼ 천보루는 일반적으로 절집에서는 안 쓰는 건축양식을 하고 있으며, 마치 궁에서 보는 누마루처럼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문현식의 문은 궁궐에서만 쓰며, 삼문은 왕릉의 재실, 관아의 문 등에만 쓰이며, 일반인은 단문만 쓰게 되어 있도록 격의 차이를 두었는데, 용주사에 다섯칸의 누각이 있다는 것은 사도세자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건축물이라 하겠습니다.
▼ [자료:e뮤지엄] 일제강점기 때의 천보루앞인데, 온통 벚꽃이 한창입니다. 자세히 보면 2층에는 창문이 없었고, 누각 아래 석주(돌기둥) 사이에는 칸막이가 있었습니다. 천보루를 건축할 당시에는 천보루가 정문으로 설계가 되었습니다.
사찰에 벚꽃은 안 심는데, 일제는 사찰을 일본식으로 정원처럼 꾸민 것으로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2층에는 창호가 없이 마루만 있는 상태였는데 지금은 창호를 달고 강당으로 쓰이는 듯합니다.
▼ 천보루의 석주는 전부 5개가 있는데 석주마다 글귀를 새겼습니다. 정조는 이 천보루 밑으로 걸어서 대웅보전으로 들어갔습니다.
心得同時祖宗旨 [심득동시조종지] 마음으로 조사의 종지 같이 깨달으니
傳持祖印壬午歲 [전지조인임오세] 조사의 법을 전(傳)하여 받아 간직하니 때는 임오년
▼ 천보루의 석주를 보면 장군목을 끼우게 홈을 파 놓았습니다. 처음 천보루를 설계 할 때는 용주사의 정문으로 설계를 하였기 때문에 국왕(정조)이 용주사에 들렸을때 경호와 인원 통제가 필요해서 빗장을 걸게 되었는데, 천보루 앞에 삼문이 추가로 지어졌기 때문에 실제로는 빗장을 걸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 천보루를 뒤에서 보면 홍제루(弘濟樓)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보통 사찰의 건물에서는 두 가지 이상의 뜻이 단긴 현판은 흔하게 보입니다. 원래는 천보루(홍제루)의 2층 누각에는 방이 없었을 것으로 보이고, 방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문화유산채널] 천보루(홍제루)의 내부 모습입니다. 강당으로 쓰이는 듯합니다.
▼ 대웅보전은 사방에 활주로 지붕을 받치고 있으며, 두 마리의 용이 대웅보전 앞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웅보전 현판 글씨는 정조의 글씨라고 하는데, 임금의 글씨에는 보통 어필(御筆)이라고 쓰여 있는데, 용주사의 대웅보전에는 어필이 없습니다.
▼ 만수리실 앞에 보이는 괘불지주인데,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대웅보전 바로 앞에도 괘불지주가 있는데, 사용하지 않는 괘불지주로 보입니다.
가끔 이 괘불지주를 당간지주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던데, 쓰임새가 완전 다른 것입니다. 보통 당간지주는 절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고 엄청 크며, 괘불지주는 주로 대웅전앞에 있고, 크기가 2m내외로 작습니다
▼ 대웅보전 앞에 또 다른 괘불지주가 있는데, 이것이 원래의 괘불지주입니다. 자료사진에서 보면 오른쪽의 괘불지주는 계단의 오른쪽에 있었는데, 근래에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 대웅보전 앞 양쪽에 하나씩 있는 돌기둥이 보이는데, 청수대인지, 관솔대인지 모르겠습니다
▼ 대웅보전 앞의 소맷돌은 일반 절집보다 무척 넓습니다만 원래는 1m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해방 이후에 넓힌 듯합니다. 소멧돌의 구름문양을 가리고 조경을 한다고 돌을 쌓아 놓았는데, 왕실을 상징하는 소맷돌에 대한 가치를 너무 아무렇게나 대하는 듯해서 아쉽습니다. 돌을 걷어내면 소맷돌의 아름다운 문양이 보일터인데...
▼ 일제강점기 때의 대웅보전 앞의 사진을 보면 지금과는 조금 다른데, 괘불지주 한쪽이 왼쪽으로 이전되었고, 소맷돌의 폭이 좁았었는데, 많이 넓혔습니다. 법고각이 대웅보전 뒤에 있었는데, 앞으로 옮겼습니다.
▼ 법고를 보관하는 법고각(法鼓閣)입니다. 용주사는 범종루가 없기 때문에 범종, 법고등의 보호각이 있습니다
▼ 대웅보전 옆에는 국보인 동종이 있습니다
▼ 너무 귀중한 국보인 용주사 동종입니다. 국내에 국보로 등재된 동종은 단 4개밖에 없는데 용주사의 동종은 대단히 귀중한 동종중의 하나입니다.(나중에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 대웅보전이 뒷모습입니다. 앞에 보이는 불전이 호상전입니다.
▼ 2020년 8월 20일에 불타버린 호성전입니다. 호성전은 6.25때, 1988년에 화재로 복원하였으나, 또 다시 불에 타 버리는 불운한 불전이었습니다
▼ [사진자료:경기관광] 호성전에 모셨던 정조와 장조(사도세자)의 왕후들과 함께 모신 전패((展牌)입니다. 일반인은 위패(位牌)라고 하며, 부처님은 불패(佛牌), 임금의 패는 전패(展牌)라고 하며, 전패와 불패는 크기, 격조와 화려함이 차이가 있습니다
▼ 새로 지은 호성전입니다. 호성전은 원래 사도세와 정조의 전패(展牌)를 모셨습니다
▼ 호성전 뒤에 보이는 탑은 승탑입니다. 매우 화려하게 만들었는데, 2005년 4월에 사리탑이 만들어졌습니다. 전강스님 입적 3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사리탑이며, 국보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을 모방해서 만들어졌습니다
▼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은 특이한 구조에 매우 아름다워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원래의 지광국사 현묘탑은 경복궁에 있으며, 일본 놈들이 일본으로 훔쳐갔다가 다시 돌아온 탑입니다. 중앙 사진은 봉선사 앞에 있는 모작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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