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모현면에 있는 정몽주 선생의 묘역에는 연안이씨의 비각 공원과 정몽주 선생의 묘와 이웃하여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가 있습니다.

 

어찌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와 저헌 이석형의 묘가 하나의 구역에 있게 된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영일정씨(연일정씨)와 연안이씨의 집안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여기에서 인용된 자료사진은 문화재청, N지역문화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포은 정몽주선생묘역 입구에는 연안이씨의 비각공원이 있으며, 입구에서 보이는 비각에는 저헌 이석형선생의 신도비(지방문화재 제 171호)가 있습니다.

 

▼ 안내문의 글씨가 작아서 부분적으로 옮겨 보았습니다.

 

저헌 이석형(1415-1477)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종 대부터 성종 대까지 활동한 유학자이다. 세 가지 과거(생원과 진사, 문과시험)에서 급제하여 삼장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저헌 이석형선생의 부인은 정몽주선생의 증손녀이며, 신도비는 인조 2년(1624)에 손자 월사 이정구선생이 비문을 짓고, 선조의 사위 신익성이 글씨를, 전액(머릿글)은 김상용이 썼다


▼ 안내문에서 보면 좌의정 월사 이정구선생이 비문을 지었다고 하는데, 월사 이정구선생은 저헌 이석형선생의 4대손으로 묘가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있으며, 월사 이정구는 선조때, 그의 아들 이명한은 인조때 , 이명한의  아들 이일상은 효종때  각각 대제학을 역임하여 이른바 <3대 대제학>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참고적으로 경기 파주에 있는 월사 이정구선생의 묘를 사진으로 몇장 보겠습니다

 

- 월사 이정구선생의 사당인 경덕사입니다.

 

- 연안이씨와 정경부인등의 정려입니다.

 

- 3대 대제학 월사 이정구, 그의 아들 이명한, 이명한의  아들 이일상선생의 연안이씨삼세비입니다.

 

- 묘가 역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 연안이씨의 비각공원을 보면 여러 단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수 많은 비석의 자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습니다

 

▼ 비각공원을 보면 연안이씨의 위상을 짐작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모아 놓은 비석에는 공적비, 행적비, 신도비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 비각공원안내문에는 저헌 이석형선생의 후손들의 신도비, 행적비가 있으며, 묘가 묘원내에 있는분은 신도비, 묘원외에 있는 분은 행적비를 각각 세웠으며,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역성역화 사업때 같이 비각공원을 만들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 저헌 이석형선생의 신도비각입니다. 신도비는 원래는 묘앞에 있었으나, 공원에 비각을 세우고 옮겨온 것입니다.

 

▼ 연안이씨의 위상이라는 제목의 비에는 "세도와 부귀를 누렸다고 명문은 아니다. 흔히 명문을 말할때는 그 집안의 벼슬이나 세도보다는 학문과 도덕을 웃길로 친다."라고 시작합니다.

 

▼ 묘역앞으로 가서 올려다 보면 저헌 이석형선생의 묘가 보입니다.

 

▼  이석형선생의 묘역 50m 전방에는 묘소비가 있는데 원래는 이 자리에는 신도비가 있었습니다.

 

▼ 이석형선생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연일정씨(延日鄭氏)와의 합장묘라고 각서 되어 있는데, 연일정씨는 영일정씨(迎日鄭氏), 또는 오천정씨(烏川鄭氏)라고도 하며, 지금의 포항 영일지역을 말합니다.

 

▼ 봉분은 단분으로 정경부인(貞敬夫人) 연일정씨(延日鄭氏;정몽주의 증손녀)와의 합장묘이며, 원래의 석물로는 봉분 우측의 묘비와 묘역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문인석 2쌍이 있습니다. 봉분 앞의 상석, 향로석, 계체석 등은 새로이 교체한 것입니다.

 

▼ 저헌 이석형선생의 묘앞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은 참 보기 좋습니다. 이래서 명당이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저헌 이석현선생의 묘가 용인에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다가 정몽주선생의 묘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이석형선생의 가계를 보다가 혹시 내가 이석형 선생의 후손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어머니가 남기신 족보를 찾아 보았습니다. 내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저헌공파(楮軒公派)입니다.

 

※ 개인적인 족보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남겨둘 사료적 가치로 생각하였습니다.

 

▼ 시집가는 손녀에게 증조부(이태승)가 직계기준으로 필사해 주신 연안이씨 족보이며, 딸린 편지에는 귀가 안들리는 외동 손녀에 대한 구구절절 걱정과 함께 이 족보를 자식들한테 꼭 가르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물론 어머니이상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이 귀한 족보에는 12대조 백주 이명한(월사 이정구선생 손), 17대조 저헌 이석형선생이 보이는데, 족보를 필사해 주신 외증조부, 나에게 그 족보를 남겨주신 어머님, 모두 연안이씨의 자부심을 보는 듯합니다.

 

글을 모르는 농사꾼인 아버지에 비해서, 어머니는 귀가 안들리셨지만, 신식교육을 받으셨던 분으로 그 힘든 농사일에도 틈만 나면 책을 읽으셨고, 자식들에게는 호롱불 앞에서 책을 읽어 주시고, 글씨를 일찍 깨우치게 해 주신분이셨습니다.

 

 

- 연안이씨의 시조는  660년 나당 전쟁 당시 당나라군 소정방의 부관으로 신라에 들어온 이무(李茂) 장군입니다.  이무 장군은 당나라군의 장수로 참전해 백제를 정복하는데 공을 세워 중랑장(지금의 연대장급)에 올랐습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 땅에 설치한 9개의 도호부의 하나인 시염성(豉鹽城)에 주둔하였고, 당나라가 철수한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았으며, 이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기여한 공으로 김유신 장군의 주청에 의해 문무왕으로 부터 시염성(豉鹽城)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습니다. 시염성(豉鹽城)은 지금의 황해도 연안군으로 연안이씨의 관향입니다. 

 

- 어머니 기준 17대조 석형(石亨)이 나오고 호는 저헌(楮軒)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부인은 영일정씨(정몽주 증손녀)사이에 1남 2녀, 두번째 부인 고령박씨 사이에 1남 1녀가 있었습니다. 저헌 선생은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이방원의 왕자의 난(2차)에 협력한 이종무장군의 손자이기도 합니다, 저헌선생을 뿌리로 하는 자손들부터 저헌공파(楮軒公派)로 분류가 되는 듯합니다만, 연안이씨는 조선시대에 워낙 힘꽤나 쓰던 가문으로서 갈라진 파가 무수히 많습니다

 

▼ 어머니 기준 12대조에 백주(白州) 명한(明漢)선생이 나오는데 이분은 문과 대제학이셨고, 월사 이정구선생의 아들이며, 묘는 파주의 월사 이정구선생묘역에 있습니다

 

- 족보를 필사 해주신 증조부(이태승)의 호는 낙인재(樂忍齋)였으며, 대한제국 보병참위(지금의 소위,소대장)로 장교이셨고, 부인은 두분(남양홍씨, 보성오씨)에 자식이 많으셨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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