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의 용화사[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근곡로 239-15]의 뒷산에는 조선시대의 석불입상이
어느 정도 관리가 되었지만, 지금은 보호각도 무너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 소재지 :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근곡로 239-15(용화사 뒷산)
□ 출토지 : 소재지와 동일
□ 분 류 : 용인시 향토유적
□ 시 대 : 조선시대
▼ 여느 절집 같지 않고 이상하게 생긴 일주문(?) 앞에서 바라보는 용화사(백암면 가창리)입니다. 가창리석불입상을 보려면 일주문을 지나서 큰법당 뒷쪽의 산길로 들어 가야 합니다.
▼ 가창리석불입상은 가창리 마을 뒷산에 있지만, 접근하는 길은 용화사를 통해서만 가능 합니다. 가창리는 1914년 일제강점기때 행정구역 개편때 가곡리의 "가"와 신창리의 "창"을 한글자씩 빌려서 가창리가 되었습니다.
▼ 용화사(백암)는 단촐하게 큰법당만 덩그러니 있지만, 건축의 채색은 많이 색 다른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옻칠을 한 것 처럼 짙은 밤색을 하고 있으며, 보통은 대웅전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큰법당이라고 현판을 걸었습니다.
또한 공포 사이에 생겨난 형상을 부처님으로 채색을 하였습니다
더 특이 한것은 주련(柱聯)이 한글로 되어 있는데, 마침 주지스님께서 오시기에 여쭈어 봤더니 우리말로 써 놓은 이유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젊은이들이 음도, 뜻도 모르는 글씨를 써 놓은 것 보다, 현실에 맞게 부처님 말씀을 써 놓은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말씀이십니다. 끄떡,끄떡...아무튼 큰법당 오른쪽 뒤로 산길이 있습니다.
▼ 보호각은 미륵각(彌勒閣)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지붕은 무너지기 시작한 상태이나, 원래는 꽤 준수한 보호각이었습니다. 기둥은 시멘트이며, 불신의 무릎밑으로는 시멘트로 덮혀 있습니다.
산속에 미륵불이 있는것은 예전에 여기가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절터가 아니라면 현재의 미륵불옆에는 아주 오래전에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산길이 있어서, 길을 지나는 마을사람들의 미륵신앙의 미륵불로 받들었는지도 모를 일 입니다.
▼ 미륵입상과 보호각의 상태가 점점 나빠져서 용화사에서 관리인도를 받으려고 해도 이 산의 지주분이 허락이 없어서 용화사 주지께서는 좀 안타깝다고 하십니다. 누가 관리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여기서 오래 오래 보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보호각 지붕이 무너지고 있지만, 미륵불 앞에는 촛불함이 있고, 주위도 깨끗해서, 용화사 주지께서 관리는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 용인디지털문화대전에서 인용한 가창리 미륵입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인용하였습니다
[형태] 불상은 신체에 비해 머리 부분이 크게 부각되었으며, 화강암 일석(一石)으로 조성된 대형 불상에 속한다. 난형(卵形)의 큰 두부(頭部)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을 가득 메웠으며, 두부에 비해 좁은 얼굴에 눈을 튀어나오듯 크게 조각하였고, 코 역시 크고 뭉툭하다.
입술선을 호형(弧形)으로 새겨 온화한 미소가 얼굴 전반에 퍼져 있다. 큰 귀는 어깨까지 닿아 사실성이 떨어진다. 몸에는 의습선(衣褶線)을 전혀 표현하지 않았고, 어린아이 같은 손만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상호에는 보수된 흔적이 있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297.5㎝이며, 머리 높이 100.5㎝, 어깨 폭 87.5㎝, 몸통 아래 부분 두께 72.5㎝, 어깨 부분 두께 58.5㎝이다.
[특징] 가창리 석불입상은 목이 생략되고 이마에 기하학적 문양이 조식되었으며, 양감이 전혀 없는 거대한 신체을 지녔고, 옷주름 없이 목 뒤에 옷깃만이 표현된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불상보다는 문관상(文官像)에 가까운 모습이다.
조선시대 문관상의 관모에는 화문이 시문되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17세기 이후의 상에서 볼 수 있다. 가창리 석불입상을 닮은 불상으로는 안성시 삼죽면에 있는 국사암(國師庵) 세미륵이나 괴산 능촌리(陵村里) 석불입상 등이 있다.
조선시대 석인상과 불상의 도상이 혼재되어 있는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인원 구성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 능침 조성에 관련된 모든 일을 전담했던 산릉도감에는 양인(良人) 출신도 많았지만 불교 승려들도 소속되어 있었다.
이것은 왕릉의 석인상 조성에 승장(僧匠)이 직접 참여했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석인상 제작자와 불상 제작자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도상이나 양식이 혼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의의와 평가] 가창리 석불입상은 비사실성을 중점적으로 부각하여 의도적으로 예배자로 하여금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려 한 불상으로 보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미륵입상의 형태는 불신에 비해서 불두가 매우 크게 표현되었고, 형상도 일반적이 아닌 매우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불신 전체는 페인트인지, 석회이지 모를 물질로 덮혀 있으며, 코 부분은 보수 한 흔적이 보이지만, 대체로 보존 상태는 좋습니다. 아마도 불신의 풍화작용을 막으려고, 불신전체를 마감한 것으로 보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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