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의 전통사찰 사나사의 문화재를 보러 갔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사나사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오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 여기게 인용된 자료사진은 문화재청, 경기문화재연구원, 양평군청, 파이낸스투데이, 법보신문, 불교닷컴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주문입니다. 보통 산중의 절집에서 흔히 보는 건축양식입니다만, 여러 자료에는 봉은사에서 옮겨온 일주문이라고 해서 자료를 찾아보니, 봉은사에서 일주문이 사나사로 이건 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도봉산 석굴암으로 이전되어서 새로 만들어진 일주문이라고 합니다.
▼ 사나사의 일주문이 아름답기는 했는데, 원래는 서울 수도산 봉은사에 있던 것이라고 해서 시대별로 보는 자료을 찾아보았습니다. _불교닷컴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봉은사의 일주문이 1950년대는 오르는 길은 좀 가팔았네요... 1972년도 사진은 완전 평지입니다
▼ 서울 봉은사의 일주문이 양평 사나사로로 이건 되는 사진이라고 소개된 자료입니다만, 1986년에 봉은사의 일주문이 사나사의 일주문으로 옮겨진 것은 맞지만 첫 번째 사진은 설명이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주문 뒤로 도봉산이 보이고, 지형상 사나사는 평지인데, 사진은 경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사진은 2011년 사나사에서 도봉산 석굴암으로 이전하던 때의 사진이 확실합니다.
두 번째, 세 번째는 봉은사의 일주문이 사나사로 이건 되던 때의 상량문 사진입니다._자료사진은 불교신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1952년의 봉은사 일주문입니다. 지금 세대의 일부문 보다는 훨씬 높아 보이는 지붕은 극락과 속세의 경계선처럼 보이고, 알 수 없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사진입니다. 멀리 북한산이 보입니다. (1952년 임민식 작가의 사진입니다)_파이낸스투데이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1950년대(6.25 전쟁중 추정)_파이낸스투데이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도봉산 석굴암에 있었던 봉은사의 일주문의 모습입니다. 일주문에 낙양각을 달 정도로 화려함을 보여 줍니다, 이 일주문은 2020년 5월에 원래의 자리였던 봉은사로 돌아갔으며, 석굴암은 모양이 비숫한 일주문을 다시 세웠습니다.
▼ 2020년 5월 도봉산 석굴암에서 봉은사에 이건 된 일주문입니다_법보신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일주문을 지나면 소나무 삼형제가 있는데, 그냥 오래된 소나무입니다만, 어느 정도 관리를 받은 듯한 모습입니다.
▼ 사나사는 일주문을 지나면 천황문등 같은 건물은 없으며, 곧바로 강당이 보입니다.
사나사의 이력을 살펴보면,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1367년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1592-1598)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1698년 덕조(德照)가 다시 지었으나, 1907년 일본군이 의병의 활동근거지를 없앤다고 하여 모두 불태워지고, 이후 법당과 조사전을 지으면서 사세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 다시 불타버렸습니다.
▼ 1960년대초까지 있었던 사나사 철불좌상인데, 1960년 이후에 이후 사라졌습니다. 자료사진은 일제강점기 때의 유리건판 사진입니다.
▼ 범종각앞에서 보면 문화재인 오른쪽에 삼층석탑, 부도, 부도비각이 보입니다
▼ 사나사의 오래전의 자료사진입니다. 1970~1980년대로 보입니다.
▼ 먼저 삼층석탑입니다.
▼ 이 삼층석탑은 사나사삼층석탑이라고 하지 않고, 용천리삼층석탑이라고 하는데 다른곳에서 옮겨온 것인지는 알 수없다고 합니다.
▼ 경기도 문화재자료인 고려양식의 일반형 3층석탑은 (높이 2.8m)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초기에는 5층 석탑으로 창건 당시에 함께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언제 어디에 탑을 세웠는지는 알 수없으며, 현재의 3층 석탑은 보우 대사가 사나사를 중건 시 3층 석탑으로 고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기단석에 김ㅇㅇ, 축문이 보이는데,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 자료사진으로 옛날의 용천리삼층석탑을 보겠습니다. 순서대로 첫 번째는 일제강점기 찍은 유리건판 사진입니다.
▼ 이하 사진은 1970~1980년대로 보입니다
▼ 용천리 삼층석탑 뒤로 부도가 보이고 부도비각이 보입니다. 보통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가 없어도 경배의 대상이 되지만, 스님들의 화장후 거둔 사리나, 뼈 조각을 넣어둔 부도(승탑)는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 용천리삼층석탑 뒤로는 석종 모양의 부도(승탑)가 보입니다. 너무 단순하고 소박한 느낌이 듭니다.
▼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은 경기유형문화재이며, 사리탑(부도)으로 돌로 만든 종모양이라 원증국사석종, 사나사부도, 원증국사부도라고도 합니다.
공민왕 때 사나사를 크게 중창한 원증국사 태고 보우스님의 유골을 모신 부도이며, 고려 우왕 9년(1383)에 제자 달심이 부도와 탑비를 건립하였고 합니다.
▼ 보우스님은 고려시대의 보우와 조선시대의 보우가 있어서, 자료를 찾아볼 때 헷갈릴 수 있습니다. 사나사의 보우는 고려시대의 보우입니다.
▼ 태고보우영정
▼ 일반 다른 스님들의 부도(승탑)와 비교해 보면 별 다른 특징은 볼 수 없습니다. 기단석의 당초문양이 특징입니다
▼ 태고 보우(1301~1382)는. 본관은 홍주홍씨(洪州洪氏), 호는 태고(太古), 시호는 원증(圓證), 탑호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며 북한산 태고사에 보월승공탑(‘寶月昇空塔)이 있습니다.
1382년(우왕 8) 소설사에서 82세로 입적하였으며, 화장 후에 舍利 100매를 얻어 가은 양산사(문경 봉암사), 사나사와 태고암(북한산), 청송사(강릉), 소설암(가평) 등에 나누어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 태고보우의 부도(승탑)의 자료사진은 북한산 태고사의 보월승공탑(우측)이 있어서 사나사의 부도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태고사의 부도는 무척 화려한 반면 , 사나사의 부도(좌측)는 그저 소박한 모습입니다.
▼ 태고보우가 입적한 소설암은 경기 가평에 있었는데, 이미 폐사되어 있었습니다
▼ 원증국사 탑의 옆으로는 원증국사탑비가 있습니다
▼ 원증국사석종비(圓證國師石鐘碑) ~ 경기유형문화재이며, 원증(圓證)은 고승 보우가 죽은 후 고려왕(우왕)이 내린 시호입니다.
정도전이 글을 짓고 의문(誼聞)이 글씨를 써 1386년(우왕 12)에 세웠으며, 6.25전쟁 때 총을 맞아 구멍도 뚫리고 상처가 심하기도 하지만, 비신 앞뒷면에 빼곡이 담겨 있는 글씨에는 “고려국사 이웅존자(利雄尊者)가 소설산에서 입적하였다. 문인들이 화장한 곳에서 사리를 얻으니.....
강후(姜侯) 만령(萬)이 돌을 깎아 종을 만들어 사리.....를 간직해 사나사에 안치하였다...”등등의 문구가 있습니다
▼ 원증국사탑비는 6.25전쟁때 총을 맞아서 구멍이 생겼습니다. 일제강점기때 탁본도 없었는지, 자료를 찾아 못하였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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