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숭렬전(崇烈殿)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위패와 남한산성의 수어사였던 이서(李曙) 장군(1580~1637)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입니다.

 

백제 온조왕의 사당은 1464년(세조 10년), 직산(충남 천안)에  '온조왕사(溫祚王祠)'로 처음으로 지어졌으나, 임진왜란(1592년~1598년)때 화재로 소실됐고, 이후 인조16년(1638년)에 왕명으로 남한산성에 사당을 지으면서 '백제시조왕(百濟始祖王)'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으며, 곧 이어서 남한산성 수어사였던 이서(李曙)장군의 위패도 모시게 되었습니다.

 

 사당은 건물을 따로 써서 각각 숭렬전 본전은 온조왕 사당, 부전은 이서 사당으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 후 정조 19년(1796년)에  왕이 여주 영릉에 다녀오는 길에 남한산성에 들러서 '온조왕사(溫祚王祠)를 숭렬(崇烈)로 사액하자 수리하고 숭렬전으로 사당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 숭렬전(崇烈殿)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이며,

- 숭렬전 제향(춘향제,추향제)은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무형문화유산 제1호입니다

 

※ 남한산성의 숭렬전이 지어진 때의 자료를 찾아보면, 년도와 때가 맞지 않는 자료가 많아서, 문화재청과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의 자료를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  사액(賜額) : 임금이 사당(祠堂), 서원(書院), 누문(樓門)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내린 편액(현판).

※ 사진자료,그림자료는 문화재청, 경기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제향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홍살문 너머로 숭렬전이 보입니다.

 

▼ 숭렬전은 울타리를 둘러서 보호하고 있으며, 드나드는 문은 외삼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 외삼문이 잠겨 있어서 내부가 보이는 곳에서 바라봅니다.

 

▼ 숭렬전의 연혁입니다. 숭렬전의 건립시기에 대한 공식적인 자료입니다.

 

▼ 연도별로 기록된 사진자료를 보겠습니다. 90년 전이나 지금이나 형태는 그대로 보입니다(사진자료는 문화재청, 경기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숭렬전의 내부를 직접 볼 수 없어서 배치도로 내부를 보겠습니다. 다른 사당과 비교해 보면, 강당이라는 건물이 보이고, 제향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이 내삼문이 아닌 협문으로 되어 있으며, 동재는 부전, 서재는 전사청으로 되어 있습니다

 

 

▼ 숭렬전은 인조의 꿈(?)과 이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 내부를 좀 더 크게 보면 가운데 건물은 강당이며, 제향 하기 전에 모여서 점검하는 재실로 보이며, 숭렬전은 강당 뒤의 협문을 지나야 합니다. 그런데 제향 시설에 강당이라는 이름은 낯섭니다. 지금 강당은 1998년 처음 복원된 이후 보수작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사진으로 강당을 보면  언제 사진인지는 모르겠으나, 좌, 우의 방이 조금 변했습니다. 강당은 1998년에 복원되었습니다.

 

▼ 1920~1930년대로 보이는 숭렬전입니다.

 

▼ 2016년 사진입니다.

 

▼ 숭렬전(崇烈殿) 편액의 글씨는 정조의 어명으로 관부사 이병모가 쓴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글씨도 이병모가 쓴 글씨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제향 때의 자료사진입니다. 특이하게 여성분들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 숭렬전은 사당은 본전(本殿)과 부전(副殿)으로 나뉘는데 본전(本殿)에는  '백제시조왕(百濟始祖王)'의 위패가, 부전(副殿)에는 이서장군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습니다.

 

▼ 숭렬전에 배향된 "백제시조온조왕"의 위패(좌)와 "완풍부원군이서"의 위패(우)입니다

(네이버 블로그, '허수OrBi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조선의 기본적인 제향 절차와 제향 날짜를 적어 놓았습니다. 조선은 철저한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제향으로 시작해서 제향으로 날이 저무는 나라였습니다.

 

▼ 참고로 천안 직산에도 온조왕의 사당이 있습니다(천안시 공식 블로그에서 인용)

 

▼ 가을의 숭렬전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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