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성리학으로 무장한 왕과 고위 관료들의 명나라에 대한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조종암에 가서 보면 알 수 있는데, 참 너무했다는 생각이 드는 현장입니다. 한마디로 명나라는 은혜의 국가이며, 조선은 그 아래 은혜를 입은 국가이므로 우러러 모셔야 한다는 극단적인 숭명사상을 가졌던 그 당시 지도층의 생각에 뒷맛이 씁쓸해지는 장소입니다.
가평 조종암(朝宗巖) 경기도기념물 제28호로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간선로 399 |
조종암이 만들어진 것은 1684년(숙종 10) 가평군수 이제두(李齊杜)와 유생 허격(許格), 백해명(白海明) 등에 의해서였는데, 이들은 망한 명나라를 추모하고 청나라를 적대시한다는 존명반청론과 대명의리론에 입각하여 암벽에 숭명배청의 의미를 담은 여러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명나라는 1644년에 멸망하였습니다)
▼ 조종암 바로 앞에는 주차를 할 수 없어서, 100여 미터 앞에 있는 공터에 주차하고 잠깐 걸어갔습니다. 조종암이 여기에 생긴 이유는 조종천 때문인데, 조종천의 물길은 동쪽으로 흐릅니다.
여러 번 굽이치면서 동쪽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조선의 숭명사상에 물든 선비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입지 조건이었으니, 바위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을 새기고 명나라의 유교문화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표현하였습니다.
▼ 갓길의 공터에 주차하면 됩니다. 조종암은 100여 미터 뒤에 있습니다.
▼ 바위 투성이 중간쯤에 조종암기실비가 세워져 있고, 다른것은 없습니다.
▼ 안내판에는 조종암의 여러 암각서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고, 안내문의 내용이 작아서 보기 쉽게 옮겨 보았습니다
조종암은 숙종 10년(1684)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 준 명나라의 은혜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당한 굴욕을 잊지 말자는 뜻의 글씨를 바위에 새겨 넣은 암각서이다. 당시 가평 군수였던 이제두와 유생 허격, 백해명이 주도하여 만들었다.
글씨는 모두 22자로 정면에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우가 쓴 조종암(朝宗巖), 왼쪽 제일 높은 곳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인 사무사(思無邪), 그 아래 조선 선조의 글씨인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藩邦), 그 왼쪽으로 조선 효종의 글을 송시열이 옮겨 쓴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 至痛在心)이 있다.
중앙에는 순조 4년(1804) 조종암을 세운 이유와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조종암기실비가 세워져 있으며, 유적 오른쪽 바위에는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유중교가 쓴 견심정(見心亭)이란 글씨가 남아 있다.
조종암은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인 청나라를 멀리하고 사라진 명나라의 문화를 이어받았다는 숭명배청 사상을 보여 주는 문화재이다._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바위면에 여러 글자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같이 존명반청(尊明反淸)의 문구들 뿐 입니다.
▼ 왼쪽 옆으로 올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 동쪽의 바위에 견심정(見心亭)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견심정 글자는 나중에 생긴 글자 입니다.
▼ 견심정(見心亭)은 이항로(李恒老)가 조종암에 정자를 세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의 제자 유중교가 1874년에 다시 정자를 지으려 하며 바위 옆에 새긴 글씨이다.
‘견심’은 『주역』에 나오는 문구로 현재의 위기상황을 염려하면서도 사라져버린 강한 기운은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낙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명나라의 멸망으로 천하가 오랑캐(청)의 지배에 들어가고 또 서양의 문명이 범람하는 유교문화의 위기존망의 상황은 자연현상이 순환되는 것처럼 반드시 역전되리라는 믿음이 이 속에 숨겨져 있다.
- 경기문화재연구원 자료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견심정 바위에서 올려다 보는 모습이며, 보이는 조종암기실비(朝宗巖記實碑)입니다. 이 비는 1804년(순조 4) 왕명에 의해 조종암의 역사를 기록한 비 입니다.
▼ 조종암기실비(朝宗巖記實碑)의 뒤의 암벽에 여러 글씨들이 보입니다.
▼ 조종암기실비(朝宗巖記實碑)인데, 전면에 여러군데 총알 자국이 보입니다. 이 조종암기실비는 1804년(순조 4) 왕명에 의해 조종암의 역사를 기록한 비 입니다.
▼ 암벽에 여러 글자들이 새져져 있는데, 한곳에 모여 있습니다. 이 글씨는 모두 1684년(숙종10년)에 새겨진 것이라고 합니다. 숙종은 효종의 손자로서, 북벌을 이루지 못한 할아버지 효종의 뜻을 헤아리고, 또 다시 청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방에 힘쓴 왕이었습니다
▼ 먼저 맨 위에 보이는 조종암(朝宗巖)입니다.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전서(篆書)로 썼습니다.조종(朝宗)이란, 여러 왕들이 황제를 뵙는다는 뜻과 강물이 흘러서 바다에서 모인다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조옹암앞의 하천 이름이 조종천(朝宗川)인 것이 그 이유입니다.
▼ [자료:문화재청] 사무사(思無邪) 각자는 나뭇잎에 가려져 안 보여서 자료 사진으로 보겠습니다. 사무사(思無邪) 는 ‘생각할 때는 어떤 사악함도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시경』과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김상헌(金尙憲)이 청나라 심양에 잡혀 있을 때 입수한 명나라 의종(毅宗)의 어필입니다._설명 자료는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다음은 만절필동(萬折必東)과 재조번방(再造藩邦)입니다. 모두 선조의 글씨라고 하며, 선조는 임진왜란때 명나라에서 지원군을 파병해 준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 만절필동(萬折必東)은 물결이 만 번 굽이쳐 흘러도 순리대로 마침내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이며, 선조가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에 감사하며 올린 상소문에 쓴 글귀중 하나 입니다
- 재조번방(再造藩邦)은 명나라가 번방인 조선을 다시 세워 주었다는 의미로 명의 은혜에 감사하는 말이며, 선조는 이 글을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지원군을 추모하는 사당인 선무사(宣武祠)에 걸어두었다고 합니다.
▼ 무슨 글씨를 새기려고 다듬어 놓은 빈 곳입니다만, 아무런 글씨도 없습니다
▼ 다음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야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 지통재심,일모도원(至痛在心,日暮途遠) : 지극한 고통이 마음속에 있고 아픔은 너무나 크지만.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시간이 없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이 글귀는 매우 유명한 글씨인데, 충청 부여의 백강 이경여 선생이 송시열과 함께 강력하게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에 내린 효종의 답글로서, 백강 선생의 사후에 송시열이 백강선생 후손(아들)에게 전해준 상소문의 일부라고 합니다.
효종이 북벌에 대한 꿈은 있었지만, 이미 힘이 왕성해진 청에 대한 복수는 불가능 하다는 것을 이 문구에서 나타낸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부여의 부산(浮山) 강변에 있는 대재각에 있는 각서석이며, 이 각서석에 새져진 글씨는 조종암에 새겨져 있는 글씨와 같습니다. 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日暮途遠)...뒤 늦은 생각이겠지만, 조선을 광해군이 계속 통치 했다면 정묘호란, 병자호란등에 의한 굴욕이 없었을것이었는데, 참 아쉬운 조선의 역사입니다.
▼ 조종암의 넓은 의미로는 대통행묘(大統行廟)가 포함이 되는데, 보통은 조종암만 보게 됩니다. 조종암과 대통묘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직접 가 보지는 못 하였습니다
※ 대통행묘의 내력을 경기문화재연구원의 자료에서 인용하였습니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그 부흥운동을 꾀하다가 실패한 인사들 9명이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구의사(九義士)의 후손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여 가평의 유림들과 뜻을 모아 조종암 근처에 새로 제단을 만들었다.
이를 대통행묘와 구의행사(九義行祠)라 칭하고 매년 명나라 태조와 구의사에게 제사를 지냈다. 당시 그 단 아래에는 열천재(冽泉齋)라 하여 후손들이 기거하면서 제사를 모시다가 1863년 재실이 소실되자 다시 재건하여 조종재(朝宗齋)라 하였다.
조종암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뒤에도 비밀리에 제향을 계속하다가 1934년 일시적으로 제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 후 구의사 후손들을 중심으로 재건이 추진되어 1958년 제향이 재개되고 1977년 조종재가, 1979년 대통행묘가 각각 건립되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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