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유령 전적지는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에서 파주시 광탄면으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길에 있으며, 양주 연곡리에서 파주로 넘어 가는 입구는 삼태기처럼 나지막한 구릉이 좌우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같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세를 이용하여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무방비로 연곡리에 들어 온 적 70여명을 공격하여 전부 목을 베었으며, 왜란 이후 조선 육군이 최초의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 지정구분 : 경기도 기념물 제39호
- 명 칭 : 해유령전첩지 (蟹踰嶺戰捷地)
- 시 대 : 1592년 5월 16일(양력 6월 25일) 선조 25년 임진년
- 소 재 지 :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산28-9(주차장 있음)
▼ [자료:향토문화전자대전] 하늘에서 보는 해유령전첩비의 모습입니다. 양주-파주를 거쳐 개성으로 피란을 가던 선조를 쫓던 가토 기요마사는 70여명의 추격 선발대를 보냈는데, 해유령에서 매복하고 있던 신각장군의 부대에게 집중적인 화살공격을 받고 전멸하였으며, 모두 목을 베이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는 지휘관의 능력이 엣날이나 현대전이나 상관없이 참으로 중요한 이유 입니다.
▼ [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세한 내용은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경기도 기념물 제39호.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蓮谷里)에서 파주 광탄(廣灘)으로 넘어가는 고개 길이다.
부근의 지세는 연곡리의 입구가 좌우로 낮은 산이 마치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 있어 산 위에 매복해 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기 때문에 전략상으로 매우 주요한 지역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한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신각은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함께 양주 산중으로 들어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았다. 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李渾)으로부터 지원병을 얻어 북상하는 왜군의 선봉부대를 맞아 해유령 입구에서 전투를 벌여 왜군의 목 70여급(級)을 베는 큰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임진강으로 도망했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한강 패전의 책임을 신각에게 미루고 명령불복종죄로 무고하는 장계를 올렸다. 이에 우의정 유홍(兪泓)은 그 내용을 믿고 신각의 참형을 주창하여 양주에서 참살되었다.
뒤늦게 승전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형 집행을 중지하기 위하여 선전관을 파견하였으나 형 집행 후에 현장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2,000여 평의 대지 위에 높이 10.6m의 화강암으로 된 사각 기둥의 전첩비를 세웠다. 전첩비 앞에는 충현사(忠顯祠)가 위치하고 있다. 1991년에 세운 것으로 신각, 이양원, 이혼의 3위를 배향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해유령전첩지(蟹踰嶺戰捷地))]
▼ 사당은 충헌사(忠顯祠)이며, 외삼문, 내삼문 없이 삼문은 하나 입니다. 이 사당은 1991년 지어졌으며 매년 봄 5월에 추모제향을 지냅니다.
▼ [자료:양주시청] 해유령의 충헌사에서 추모제향을 하고 잇는 모습입니다 이 충헌사에서는 신각, 이양원, 이혼의 3위를 배향합니다.
▼ 선조는 참으로 능력도 없고, 군신간의 믿음도 없었던 조선왕조의 Worst-3에 들어 있는 왕이며 어떻게 보면, 왜놈들이 선조의 통치능력이 형편 없는 것을 알고 그냥 밀고 들어 왔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전쟁중에 장수의 목을 치다니...
▼ 해유령전승기공사적비의 비문이 알아보기 어려워서 그대로 옮겨 적어 놓았습니다. 읽어 보면 해유령전투의 자세한 내용이 이해가 됩니다.
단군 성조께서 거룩한 나라를 여신 후 누천년을 지나는 동안 아름다운 강토를 노리고 침범해 온 외적의 무리가 그 얼마였던가? 그러나 선조를은 그 때마다 조국 수호의 성업에 기꺼이한 몸을 던져 결연히 이 땅를 지켜냈으니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지극한 평화와 눈부신 번영은 온전히 그 헌신의 아름다운 댓가요 풍요로운 열매이리라.
우리 민족이 극복해낸 그 숱한 외침 중에서 왜란처럼 참혹한 수난은 없었다. 왜적은 척박한 땅에 문명을 전해준 은혜를 외면한 채 단기 3925년(1592년) 4월 13일 침략의 칼끝을 이 땅에 들이 밀었다.
이 땅과 백성이 처참히 유린되는 참혹한 병화속에서 충의의 의사들은 눈물겨운 헌신과 희생으로 사직과 국토를 온전히 보존하였으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들은 곳곳에서 흉적을 몰아내고 이순신은 왜적의 함선들을 모조리 푸른 물결아래 쓸어 넣었다.
자신이 죽을 자리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라를 위해 의연히 한 몸을 바친 충신들의 빛나는 업적은 오늘도 해와 달처럼 휘황하거니와 이곳 양주 해유령에도 왜적과 싸워 승리를 거둔 충신들의 눈부신 활약이 있어 그 남긴 자취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더욱 역력히 우리의 가슴에 사무치니 후손된 누군들 이 자리에 서면 그 마음 숙연해지지 않으랴!
임진년 4월 14일 왜적이 날카롭고 서슬 푸른 기세로 들이닥쳐 부산 동래가 함락되고 이어 4월 28일 충주 방어선마저 무너지자 국왕 선조는 4월 30일 정처 없는 피란길에 오르고 왜적의 잔인한 약탈과 살육의 소문에 상하 군민 모두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저항의 의지를 상실한 채 극단의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국왕 선조는 김명원을 도원수로 하여 신각을 부원수로 삼아 한강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고 이양원에게는 유도대장이 되어 도성 한양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거치없이 밀려오는 수만 명의 왜적에 비해 우리의 병력은 이미 사기가 떨어질때로 떨어진 5000여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도원수 김명원이 부원수 신각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먼저 진지를 벗어나자 전의를 잃은 도성 방위군은 왜적이 미쳐 한강에 당도하기도 전인 5월 2일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한강 방어진을 속수무책으로 포기한 부원수 신각은 김명언을 따르지 않고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도성 북쪽 양주에 머물며 병사들을 수습하는 중 때마침 군사를 이끌고 내려온 함경병사 이혼과 양주 장수원등에서 전투를 치르며 북상해온 인천부사 이시언의 병력을 합쳐 비로소 전투가 가능한 대오를 편성하고 양주에 방어선을 구축 하였다.
한편 도성을 점령한 왜적은 평양과 함흥 방면으로 진출 하고자 먼저 선발대를 편성하여 양주로 보냈는데 이들은 양주 일대를 약탈하며 음력 5월 16일(양력 6월 25일)이곳 해유령에 도착하게 된다. 적의 움직임을 면밀히 추적하던 조선군은 고개 좌우에 은밀히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적병 70여명을 한 자리에서 몰살하였다.
왜란 발생 이후 육지에서 거듭되던 패전을 비로소 극복하고 마침내 첫 승리를 거두는 감격적인 순간이었고 왜적이 접근한다는 소문만으로도 두려움에 떨며 무너지던 조선군이 우리도 왜적과 싸워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의미 있는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이 뜻깊은 승전이 참으로 어이없는 참변으로 이어졌으니 누군들 이 참혹한 사태를 침작이나 하였으랴?
한강과 도성이 한꺼번에 무너졌다는 보고를 들은 국왕 선조가 측근 한웅인을 파견하여 패전을 질책하자 다급해진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방어 실패의 뤈인이 잔신의 지시를 어기고 무단으로 이탈한 부원수 신각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하였고 조정에서는 우의정 유홍의 주도로 신각을 처형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해유령전투 이후 함경도로 진군하는 왜적을 막기위해 대탄에 물러나와 방어진을 치고 있던 신각은 억울한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신각을 처형하기 위해 선전관이 출발 한 그날 오후 신각이 올린 전승보고서와 함께 획득한 왜적의 머리 70여개가 도착하자 비로소 진상을 파악한 선조는 급히 처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선전관이 당도하기 전 해유령 전승의 지휘관 신각은 이미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였다. 1592년 음력 5월 19일 해유령의 승전고가 울린지 불과 3일 후의 일이다.
신각장군의 아내 또한 장군의 시신을 수습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집안에는 신각이 노심초사 걱정하던 90노모만이 세상에 홀로 남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신각은 강화와 경상도의 수사를 겸임하였고 일찍이 황해도 연안고을에 부임하여서는 성내에 우물을 깊이 파고 각종 무기를 많이 비축하여 이로서 후일 이정암이 연안에서 왜적 3000여명을 도륙하는 토대를 미리 마련하기도 했던 지혜로운 명장이었다.
신각과 함께 싸운 함경병사 이혼은 신각의 억울한 죽음에 실망하여 군사를 물려 함경도로 돌아 갔으나 국경인등 반역자들에 의하여 함경도 전체가 왜적의 손에 떨어질 때 역도들의 손에 의해 죽었고 유도대장 이양원 역시 의주에 피난해 있던 선조가 다시 요동으로 건너 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탄식하며 8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으니 이 또한 가슴시리도록 참혹한 일이었다.
피 흘린 충신들의 사적이 낱낱이 밝혀지매 여기 피어린 해유령 언덕에 서기 1977년 유생 김주현선생과 지역유림 및 뜻있는 이들이 이를기려 함께 탑과 비를 세우고 그 후 충현사를 지어 향화를 올렸다.
이를 더욱 선명히 하고자 해유련전승보국충신승모사업회 조봉훈 회장을 비롯한 제현이 뜻을 모아 글을 다듬고 최형국 박사의 감수를 받아 정성껏 사적비를 세우니 이로서 님들이 이루어 낸 눈부신 승리의 영광은 온 누리에 뚜렸해지고 그 남긴 자취는 만대에 영원하리라.
후손들이 시절을 따라 고개 숙여 정성어린 향을 사르리니 충혼들이시여 평안히 쉬시며 부디 이 나라와 자손을 축복하시어 속히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만방에 우뚝 솟아 번영하도록 도우소서
단기 4348년(서기 2015년)12월
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홍민식 삼가 지음
한국서예박물관 관장 홍택동 삼가 씀
▼ 이 해유령전첩비는 1997년에 세워졌습니다.
▼ 전첩탑 앞 뒤로 있는 전첩기는 오석이라서 글씨가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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