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읍리 석불입상을 보려면 포천향교의 옆길을 지나야 합니다. 먼저 포천향교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포천향교는 고려 명종(明宗) 3년(1173)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임진왜란(1592~1598)으로 인하여 소실된 것을 선조 27년(1594)에 중건하였고, 1916년에도 중수하였습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이 지역의 유림(儒林)에서 뜻을 모아 1962년 다시 중건하였고 1984년에 보수가 있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 지정구분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호(1983-09-19)

- 명     칭 : 포천향교 (抱川鄕校)

- 시     대 : 조선시대

- 소 재 지 :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청군로 3274번 길3274번길 37


▼ 향교는 교육기관의 기능도 있지만 공자에 대한 제향의 의무도 있으므로 홍살문이 있는 곳이 보통입니다

 

▼ 향교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에도 계승된 지방 교육 기관으로서 공자(孔子) 및 선현(先賢)의 말씀을 배우고 그들을 제향(祭享)하며 그 뜻을 기리는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향교에 입학조건에 특별한 조건은 없이 일반 평민들도 입학이 가능하였다고 하며, 최대의 혜택은 병역의 의무가 없었다고 합니다. 현재 향교는 230여 개 남아 있습니다.

향교는 공립교육기관이었지만,  사립교육은 서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 보통의 향교의 배치도 입니다. 포천향교는 제향 공간인 대성전 구역에 서우, 동우는 없습니다

 

▼ 향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개 문은 닫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향교의 구조는 비슷하거나 같습니다.

 

▼ 향교 옆길에 구읍리 석불입상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 조선은 공자의 이념인 유교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았으므로 향교를 통하여  지방까지 공교육을 통하여 유교의 이념을 전파하여야 했으며, 또한 공자에 대한 제향을 함으로써 유교에 대한 정책을 극대화했습니다.

 

▼ 외삼문의 서쪽에 붙어 있는 서재입니다. 동쪽에는 동재가 있으며, 유생들이 숙식을 하며 머무는 곳입니다.

 

▼ 명륜당이며, 유생들이 공부를 다는 곳입니다. 유생들의 학비는 무료였는데, 나라에서는 향교에 토지와 노비를 지급하면서 간접적으로 교육비를 부담하였습니다.

 

주로 규모가 좀 있는 현 이상의 지방에 향교를 세웠는데, 정원은 그 지방의 수준에 맞게 30~50명 정도로 뽑았으며, 정원은 한번 정하면 바꾸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유생들을 가르치는 교관은 1명이 담당하였습니다

 

▼ 향교는 강학 공간인 명륜당과 제향 공간인 대성전은 내삼문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 대성전에는 5성(聖)인 공자(孔子) · 사자(思子) · 맹자(孟子) · 안자(顔子) · 증자(曾子),

- 송조 4현(賢)인 정자(程子) · 주선(朱善) · 고순(固順) · 정순(程順) ,

- 그리고 설총(薛聰) · 최치원(崔致遠) · 안향(安珦) · 정몽주(鄭夢周) 등 우리나라18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공자 탄신일에 제사하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한국에서 자기들도 잘 모르는 조상인 공자(孔子) 등의 제사를 모신다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놀라워한다고 합니다


▼ 포천향교에서 약 200여 미터 산길로 들어가면 길에서 보이는 낮은 곳에 석불입상이 보입니다.

 

- 지정구분 : 포천시 향토유적 제5호(1986년 4월 9일)

- 명     칭 : 포천 구읍리 석불입상 (抱川 舊邑里 石佛立像)

- 시     대 : 고려시대

- 소 재 지 :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167-1(포천향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 산길에서 보이는 석불입상입니다.

 

▼ 산길에서 낮은 도랑을 건너서 보이는 석불입상입니다

 

▼ 자료에서 보면 구읍리 석불입상은 이름 없는 절터에 있는 고려 전기의 석불입니다. 석불 주위를 둘러봐도 절집이 있었다는 흔적은 못 찾았습니다.

 

석불은 하반신이 묻혀 있었으며, 상반신도 마모 상태가 심하여 어느 정도의 윤곽만 보일 뿐입니다. 수인(手印)은 두툼하게 표현하였는데,  보기에는 아미타정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 [자료] 오래전의 모습입니다.

 

▼ 석불앞에는 알 수 없는 돌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 뒷모습은 아무런 가공이 없으며, 땅속에 묻혀 있는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노출되어 있는 불신의 높이는 2m입니다.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닙니다

 

▼ 불두와 불신의 분리된 흔적이 없는데도 불두의 마모가 심한 것은 인위적인 훼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 구읍리 석불입상을 보고 나서 다시 향교 방향으로 나갑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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