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 삼죽면의 국사봉 아래에 국사암에는 궁예미륵이라는 석조삼존불입상이 있습니다.  찾아가기는 그리 어렵지 않으나, 마을을 벗어나면 외길이라서 마주오는 차가 있으면 어쩌나 하고 올라갔습니다.

 

KBS 대하사극 왕건에서 궁예가 미륵을 자처하며, 폭정을 하던 모습이 생각이 나는데 지금도 궁예 역할을 하던 배우가 참 연기를 잘했던 기억이 납니다. 왕건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궁예가 주인공이 됐었던 사극이었습니다

 

□ 명   칭 : 안성 국사암 석조여래입상(安城 國師庵  石造如來立像)

□ 소재지 : 경기 안성시 삼죽면 텃골길 80-100(국사암)

□ 출토지 : 소재지와 동일

□ 분   류 : 안성시 향토유적(제42호)

□ 시   대 : 고려시대


▼ 기솔리에서 외길로 약 1Km 정도 산길로 오르다 보면, 국사암 입구를 만나게 됩니다만, 주차장은 약 100미터 정도 더 가야 합니다.

 

▼ 외길 옆에 주차장이 있습니다. 여기에 주차를 하고 100미터 정도를 걸어서 올라가야 합니다만, 무척 가파른 길입니다. 승용차로 오르기에는 대단히 가파른 길이니, 웬만 하면 주차장에 주차하시는게 좋습니다.

 

▼ 국사암 극락전 앞에는 몇 가지 석물들이 보입니다

 

▼ 극락전 오른쪽에 궁예미륵이 보입니다.

 

▼ 미륵불 세분이 서 있는데, 안성지역에서 보던 거대한 미륵불이 아닌 아담한 모습의 미륵불입니다.

 

▼ 안성시청의 설명문을 인용하였습니다

 

석불은 본존과 양협시보살을 배치한 삼존불로, 발목 이하는 땅에 매몰되어 있다. 지상에 노출된 본존의 높이는 320cm이고, 3단의 원형 보개를 육계 부분에 끼워 놓았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두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에서 손가락을 안으로 모으고, 왼손은 배에 대고 손가락을 쫙 펴고 있다. 법의는 양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양팔에 도식적인 주름을 새기고 있다. 하반신에 U자형으로 주름이 있는 것으로 봐서 군의를 가슴 부위에서 묶은 것으로 보는데, 허벅지 위에 커다란 연화문을 새겨놓았다.

우협시와 좌협시 역시 둥근 보개를 쓰고, 본존과 동일한 표현 자세를 하고 있는데 크기가 약간 작고, 우협시는 석장을 들고, 좌협시는 약병을 들고 있다. 불상의 후면에는 아무런 조각을 가하지 않았다. 이 석조삼존 입상은 고려 후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_안성시청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안성지역은 궁예와 연관이 깊은 지방이었는데, 칠장사 뒤편에는 궁예가 활쏘기를 하였다는 곳이 있습니다. 궁예는 미륵을 자처하며,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였는데 신라 말기의 어지러웠던 시기에 살기 힘들었던 중생들에게는 자신들을 현세에 구원해 주지 못하는 석가모니보다는 미래에 구원해줄 미륵을 간절하게 기다렸을 때에 궁예가 자신을 미륵이라고 한 것이 그냥 우연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앙의 미륵을 궁예미륵이라고 보면 되는 것 같습니다.

우협시 미륵의 코는 미륵의 코를 갈아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망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 이 궁예미륵이 민가 근처에 있지 않고, 산 높은 곳의 암자 옆에 있었으니 그나마 훼손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을 것입니다. 

 

▼ 둥그런 보개는 너무 무겁게 보이고, 목 부분이 없이 단순한 기법으로 제작되었는데, 대체로 친근하게 보입니다

 

▼ 궁예미륵 우측에는 암석에 감실을 만들고 석가모니를 모셨습니다. 상당히 세밀한 작업이 느껴집니다

 

▼ 궁예 미륵 좌측에는 역시 암석에 감실을 만들고, 산신을 모셨습니다

 

▼ 국사암은 대웅전, 극락전, 요사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대웅전 앞의 관음상 앞에는 대형 석조가 있고, 여름에는 관음상의 손에서 물이 쏟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석조가 관음상에 비해서 너무 크게 보입니다.

 

▼ 다음은 가까이에 있는 기솔리석불입상(쌍미륵)를 보러 내려 갑니다. 국사암과 기솔리석불입상은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찾아가기가 편리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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