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 낙원동에 있는 안성낙원역사공원은 원래 안성공원이었습니다. 공원이 안성천과 가까이 있어서 어느 정도의 공간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부터 단체 모임이나, 운동회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었습니다.
안성시에서는 공터를 현대적인 공원으로 개조하고, 여러 문화재들을 이전 시켜서 시민들의 휴식과 안성의 문화재들을 알리는 장소로 만들고, 공원 이름도 안성공원에서 안성낙원역사공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공원에 있는 역사문화재를 보러 들렸습니다
※ 사진자료들은 문화재청,안성맟춤박물관, 안성시청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안성낙원역사공원 건너에 보이는 건물은 안성1동 주민센터입니다. 건물 자체가 매우 보기 드문 구조여서 자료를 좀 찾아봤습니다.
현재의 안성1동 주민센터는 원래 안성군청으로 지어졌으며, 일제강점기 때에 안성군청이 안성관아에 있었으나, 1928년에 현재의 자리에 군청 건물을 신축하였습니다.
군청사가 이전하는 1966년에는 안성읍사무소로 쓰이다가, 안성군이 시로 승격하면서 안동 1 동사무소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건축물은 구 안성군청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709호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 옛 안성군청의 모습을 자료사진으로 찾아봤습니다
▼ 1970~1980년대로 추정되는 사진입니다
▼ 아주 오래전의 사진으로 안성읍을 보겠습니다. 아마도 비봉산에서 안성천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으로 보이며, 안성천 건너의 마을은 도기동으로 보입니다.
1900년대 전후의 사진으로 보이는데, 이 사진은 민속학자이신 석남 송석하선생(1904-1948)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으로 사진은 일본인이 찍었습니다. 낮은 초가지붕의 마을은 참으로 정겨워 보입니다
▼ 1920년대의 안성읍내의 모습입니다.
▼ 1920년대의 안성읍내의 시장모습 입니다.
▼ 안성역사공원에 있는 공원의 내역을 그대로 사진으로 올렸습니다
▼ 1920년대의 일제강점기 때의 안성공원 모습입니다. 오른쪽에 신사문이 보이는데, 공원 안에 일본인 신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일본인들은 일제강점기때 각 도시의 공원등에 신사를 만들었는데, 아마도 수백개는 되었을 것 입니다.
왼쪽의 정자는 아마도 안성의 유지들이 세운 정자로 보입니다. 지금 지방도시의 공원에 가봐도 우리 한식 정자는 보기 힘듭니다
▼ 공원의 문이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동쪽에서 부터 들어 가면서 문인석에 예을 갖춥니다 .
▼ 대형 공덕비들이 보이는데, 공원 안에는 공덕비만 49개가 있습니다. 대개가 군수의 공덕비입니다.
▼ 안성은 옛부터 한양이나, 경기지방과 삼남지방의 문물들이 꼭 거쳐가는 곳이라서 재화가 많이 모이고 부유한 사람들이 많아서 안성군수는 재물에 욕심이 나게 마련인데 돈좀 있는 사람들에게 은근한 압력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이에 신임 임군수들이 부임하면, 미리 공덕비를 만들어서 군수들의 욕심을 미리 채워주고 군수들의 재임기간동안 편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안성부자들의 잔머리가 꽤 효과가 좋았나 봅니다.
▼ 비석군이 있는 끝에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1932년에 보개면에서 석탑 부재들을 수습하여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 이 탑은 갑석과 삼층의 탑신부만 남아 있으며, 안성 시내 주변에서 각 부재를 수습하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탑의 중적 부재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보존이 양호하다. 원래는 기단석과 지대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시멘트 지대위에 석탑을 건립해 놓았다.
1층 탑신석 남쪽 면에는 문비의 흔적이 있으며, 나머지 삼면에는 두광과 신광을 갖춘 좌상이 1구식 새겨져 있다. 1층 탑신석에만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2 • 3층 탑신석에는 우주가 없다. 1 • 2층 옥개석의 형식은 같으나 3층 옥개석 상면은 삼층 탑신석의 일부분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탑의 전체 높이는 208cm이다 _안성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1층 몸돌을 받치고 있는 돌은 갑석으로 보입니다.
▼ 공원 중앙에 있는 문화재들을 보러 갑니다
▼ 오른쪽 부터 오명항선생 토적공덕비, 석조광배, 석불좌상이 있습니다.
▼ 이인좌의 난 때 오명한 선생은 안성, 죽산지역에서 결전을 벌여서 승리하였습니다. 청주에서 거병한 이인좌와 주모자는 서울로 압송하여 목을 벤 후 창덕궁 돈화문에서 영조에게 수급을 받쳤다고 합니다.
송덕비는 오명항 선생 사후 16년이 지난 영조 20년(1744년)에 세워졌습니다
□ 명 칭 :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吳命恒先生討賊頌功碑)
□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 609번지
□ 출토지 : 안성시 동본동(1969년 안성공원으로 이전)
□ 분 류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9호
□ 시 대 : 조선중기
▼ 이인좌(李麟左)의 난은 영조 4년(1728년)에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노론과 영조가 관련이 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밀풍군 이탄(李坦;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여 청주지역에서 거병한 내란이었습니다.
이인좌는 거병 후 6일 만에 패하였으며, 영남지역의 장수 정희량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3개월 만에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영조는 영남지역의 양반들을 배척하여 이후 안동지역을 제외한 경상우도의 선비들에게는 과거시험의 기회를 박탈하고, 130여 년간 과거의 기회는 없었다고 합니다.
▼ 대좌와 같이 서 있는 광배는 거의 원형 상태로 있습니다. 인동당초문이 세밀하게 새겨져 있고, 상태도 매우 좋습니다. 좌불은 어디로 갔는지,..좌불이 있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도 해 봅니다
□ 명 칭 : 안성공원석조광배(安城公園石造光背)
□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 609번지
□ 출토지 : 안성시 금광면(1969년 안성공원으로 이전)
□ 분 류 : 안성시 향토유적 제9호
□ 시 대 : 고려시대
▼ 작고 아름다운 불상이 광배를 배경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광배와 불상의 크기가 조화롭지는 않게 보이지만, 대체로 상태는 나쁘지는 않습니다. 불두를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보이는 것이 흠이기는 합니다.
□ 명 칭 : 안성공원석불좌상(安城公園石佛座像)
□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 609번지
□ 출토지 : 안성시 죽산면
□ 분 류 : 안성시 향토유적 제8호
□ 시 대 :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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