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시 신평면 운정리에 바다(지금은 간척지)를 바라보면서 투박하게 생긴 돌미륵과 매향을 기록한 매향비가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신평돌미륵이며, 매향비는 특별한 명칭이 없습니다.
이 돌미륵과 매향비는 조선초기 세종 10년(1428년)에 세웠으니, 거의 600백 년을 마을의 안녕과 미래의 미륵불을 기다리며, 서 있는 것입니다
매향비의 특징은 전부 해안가에 있는데, 미륵신앙에 따라서 향나무를 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갯벌에 묻었으며, 그 앞에 매향비를 세웠습니다.
▼ 신평면 운정리 568번지는 임야인데, 어느 마을의 공동묘지처럼 무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미륵불과 매향비가 있습니다. 돌미륵은 조선 세종 10년 (1428년)에 조성되었습니다.
▼ 무덤 앞에는 돌장승처럼 투박하게 조각된 석불이 서 있는데, 이 석불이 미륵불이라는 증거는 목에 삼도가 있고, 옆에 매향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돌미륵의 크기는 지표면에서 부터 보면 2M가 안 되는 크기로 보이는데, 땅속으로 얼마가 묻혀 있는지 모르겠으나, 상당한 깊이로 묻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간혹 보면, 마을의 미륵을 뽑아다가 어느 사찰 법당안에 모시는 경우도 봤는데, 원래 미륵불은 마을 어귀에 세웠던 민간신앙체였으므로, 법당 밖으로 개방해서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수백년간 우리 조상들이 매일 바라보고, 매일 소원을 빌었던, 정신적인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 안내문에서 보면 신평돌미륵과 그 옆에 세워져 있는 돌기둥 같이 생긴 비석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앞면과 뒷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안내문에는 세겨진 글씨가 돌미륵을 세운 내력을 기록한 것이라고 안내하고 있으나, 비문을 보면, 다른 매향비와 내용이 거의 비슷한 것으로 보아 신평매향비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 전문용어를 알아 보았습니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향도(香徒)는 주로 절에서 모였는데, 일종의 신도 모임과 비슷했다. 향도에 모인 사람들은 부처나 종, 탑, 절을 만드는 일을 직접 하거나 이에 필요한 노동력을 분담했다. 또, 믿음을 위한 법회(法會)나 보시(布施)는 물론이고 매향을 하기도 했다.
※ 매향(埋香)은 죽은 뒤의 복을 빌거나 후손에게 복을 전승키 위해 산곡수(민물)와 해수가 만나는 곳에 향을 묻는 일을 말한다. 향은 오랫동안 땅에 묻어 두면 단단해지고 굳어져 물에 넣으면 가라앉기 때문에 침향(沈香)이라 했다. 침향은 불가에서 향 중의 으뜸으로 삼았고, 침향의 연기를 맡고 향물을 바르면 온몸이 청정해지고 무량의 공덕을 얻는다고 믿었다.
※ 매향비(埋香碑)란 향을 묻으면서 그 연유와 시기, 장소, 관련된 사람(집단)을 기록한 비문을 말한다. 비문은 자연석에 글자를 새기는 경우도 있고, 인공적으로 만든 비석에 비문을 파서 입비(立碑)하는 경우도 있다. 매향(埋香)은 향(香)을 묻으면서 생기는 침향(沈香)을 매개로 하여 미륵부처와 연결되기를 기원하는 민중의 불교 신앙 의례이다.
※ 미륵불(彌勒佛)은 석가모니가 열반(涅槃) 후 56억7천만년 후에 이 지구상에 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 용화수(龍華樹) 밑에서 성불하고 삼회(三會)의 설법으로 석가모니의 설법에서 빠진 중생을 계도한다는 미래의 부처님이다
▼ 돌미륵과 매향비는 끝없는 남쪽 벌판을 바라보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앞에까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이었습니다. 향나무를 묻었던 갯벌을 바라보면서 미륵불을 세우고, 매향의 기록을 바위에 새겼습니다. 벌판 끝에는 삽교호입니다
▼ 돌미륵과 매향비가 세워져 있는 운정리는 지도에서 보면 마을 앞이 전부 논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 이 논은 조선시대에는 서해에서 내포로 들어오는 물길이었으며, 삽교호가 만들어진 시기 전후에 갯벌을 메워서 논으로 만든 간척지입니다.
돌미륵과 함께 있는 작은 돌기둥에 글씨를 새긴것이 매향비라는 증거는 이 지역이 과거에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갯벌이어서 향나무를 묻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 옛날에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로운 세상을 바라며, 마을 앞을 지키던 돌미륵은 이제는 무덤 앞을 지키는 돌장승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매향의 기록을 새긴 귀중한 매향비도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이 하염없이 부식되어 가고 있습니다.
▼ 매향비는 대체로 가공 하지 않은 주위의 편편한 바위에 글씨를 새겼으며, 글씨도 전문적으로 글씨를 배우지 않은 듯한 마을의 선비 중에 누군가 쓴듯한 글씨체입니다
매향비의 앞면을 보면, 宣德三年戊申/二月日石△(笠?), ?(?), 筵(?), 선덕3년 무신2월일석...(립), (연)
; 1428년(세종 10년), 2월에 세웠다.
뒷면은, 戶長 扈吉底(?) 溱(?)施主 縣內 香徒 十(?) 三(?), 化主 全百(石), (二?) 金乙浦(漕?)
;호장 호길저가 시주하고, 현내 향도 십여명을 모아 화주 전백(석)이 김을포에 세웠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인 듯합니다.
▼ 돌미륵은 단순하게, 기교를 부리지 않고 간단하고 묵직하게 만들었으며, 근엄하게 500년 가까이 신평 앞바다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 참고적으로, 섬에도 매향을 한 기록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신안 암태도 송곡리 매향비입니다.
하마터면, 섬의 농수로 공사에 자재로 쓰일뻔 했던, 아찔한 순간에 목포대학교의 학술조사에 의해 보물처럼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 매향비는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섬에서 발견된 매향비이며, 1405년(태종5년)에 세웠으며, 1982년에 매향비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 매향비는 7종(縱;세로종)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거의 판독이 가능한 상태여서 매향비를 세운 장소, 시주자, 음식을 마련한 사람 등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埋香處伴巳島(매향처반사도) ; 향을 묻은 곳은 반사도다.
2.東岩置南今隱吉(동남치남금은길) ; 동쪽은 암치, 남쪽은 금은길
3.西岩泰島北尾山永熟飯女二(서암태도북미산영숙반여이) ; 서쪽은 암태도, 북쪽은 미산이며, 여자 두 명이 밥을 지었다
4.樂三年四月卄四日埋 釘施主永伊(영락3년4월2십4일매정시주영이) ; 영락 3년(1405;태종5) 4월 24일 향을 묻었고, 정시주는 영이이다.
5.香万仏香徒(향만불향도) ; 향만불향도
6.香徒等埋香令有如可(향도등매향금유여하) ; 향도등이 향을 묻었다
7.良慈惠僧▣少立碑(양자혜승▣소입비) ; 혜승이 비를 세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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