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박물관은 수원화성행궁앞 사거리 종로에서 창룡문 방향으로 있는데, 먼저 수원종로교회앞을 지나게 되면 만나는 안내판을 보고 가겠습니다.

 

▼ 1866년 천주교박해때 수원에서도 어김없이 순교자가 발생하였는데, 그 터에 세운 교회가 종로교회입니다. 이 종로교회에서는 일제강점기때 독립투쟁에 한몸을 희생하신 세분의 이름과 행적을 간단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아직도 일제강점기를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친일파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이에 동조하는 정치인, 고관들, 힘꽤나 있는신 분들과 국민들이 너무 많습니다. 에~휴~~~독립투쟁 한다고 몸과 마음을 바친 분들께 할 말이 없습니다.


▼ 수원화성박물관은 건물의 설계가 수원화성을 모방하여 건축되었으며, 야외전시장, 본건물의 1층, 2층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수원화성박물관의 외벽을 보면 수원화성에서 쓰였던 전돌(구운벽돌)을 쌓은 방식으로 꾸며서 수원화성의 멋을 구현하였습니다.

 

▼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10기의 선정비가 있는데, 원래 수원에 남아 있었던 선정비는 총 37기가 있었으며, 수원박물관에 27기, 수원화성박물관에 10기가 각각 야외전시장에 있습니다.

 

▼ 선정비 10기중에서 첫번째는 수원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순조31년, 1831년 세움)인데, 특이한 것은 비좌(碑座)입니다. 서유린은 3년간(1797년~1800년)수원부 유수를 지냈는데, 비좌를 자세히 보면 움푹 들어간 홈이 보이는데, 한두개도 아니고 대략 15개가 넘게 있습니다

 

10기의 선정비중에서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의 비좌에만 성혈이 있습니다. 보통 성혈(性穴)신앙은 선사시대부터 내려온 민간신앙으로서 이어져 오다가 조선시대에는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부녀자들이 돌멩이를 비벼서 홈을 만드는 신앙이 많았었는데, 서유린의 선정비 비좌에 만들어진 성혈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수원부 유수를 하면서 정조의 뜻을 잘 받들어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목민관의 뜻을 잘 실천하여,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백성들이 성혈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서유린의 선정비는 그가 모함을 받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후 30년이 지난 후에 세워졌는데, 매우 드물게 사후 오랜기간이 지난후에 세워졌다는 것은 그 당시 정치상황이 서유린에게 불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야외전시장에는 화성축성에 사용되었던 3가지의 축정장비가 전시되어 있는데, 매우 과학적인 장비를 사용했다는 알 수 있으며, 이 축성장비의 설계는 정약용선생이 설계하였습니다.

 

▼ 화성의궤에 수로되어 있는 축정장비인데, 대차와 평차는 어떻게 다른지 좀 애매하게 보입니다.

 

▼ 먼저 유형거를 알아 보겠습니다.

 

▼ 화성을 축성할 대 유형거는 70대가 제작되었는데, 언듯봐서는 사람이 끌거나 밀었던 수레인지, 아니면 소나 말이 끌던 마차인지 분간이 안되는데, 자료를 찾아 보면 채석장에서 성돌을 올려서 소가 끌던 수레입니다.

 

▼ [자료:한겨레] 유형거를 소가 끌던 예상도이며, 채석장에서 다듬어진 성돌을 유형거에 올려놓고 소가 끌면서 축성장소까지 이동하던 모습을 그려낸 것입니다.

 

 

 

▼ 거중기는 채석장에서 다듬머진 성돌을 들어 올려 유형거에 싣는 장비입니다.

 

▼ [자료:한겨레]  채석장에서 다듬어진 성돌을 거중기가 들어 올려 유형거에 싣는 그림 입니다. 수원화성은 축성할 때 성돌을 채석장에서 적당한 크기로 다듬어서 축성장소까지 배달을 하고, 대금을 받았는데, 성돌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납품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또한 성곽공사의 공사기간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한 분업방식입니다.

 

▼ 언듯보면 요즈음의 크레인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단순히 들어 올리고, 내리는 기능만 있습니다.

 

▼[자료:한겨레] 화성 축성당시 녹로의 운용 모습입니다

 

▼ 정조태실은 팔달구청으로 들어가는길 왼편에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던 석물이 아닌데, 태실은 보통 왕의 자식들의 태를 묻는 곳입니다.

 

태실문화는 아마도 중국에서 부터 들어온 풍습으로 보이는데, 신라시대에도 태를 묻는 풍습이 있어서 김유신 장군의 태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기록들을 보면 태장은 꼭 왕의 자식들의 태만 묻었던 것은 아니며, 민간의 유력한 집안에서도 자식들의 태를 묻는 풍습은 있었습니다.

 

▼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태실은 강원 영월에 있는 정조의 태실을 그대로 모방한 것입니다.

 

▼ 고려시대의 태실은 남아 있다는 기록은 안 보이는데, 조선시대의 태실은 거의 남아 있다가, 일제강점기때 거의 서오릉옆에 태함만 모아 놓았으며, 왕들의 태실은 대부분 훼손되거나, 멸실되었지만 최근에 괌심이 높아져서 복원되거나, 지정문화재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 강원.영월에 있는 정조의 태실입니다. 보통은 왕자가 왕이 되면, 2년~3년후에 태실에 석물을 두르고, 가봉비를 세우는데, 정조의 태실은 어찌된 일인지, 정조 사후 1년후인 1801년(순조 1년)에 세워졌습니다.

 

▼ 왕이나, 세자들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면, 왕비, 후궁의 자식 남,여 가릴것 없이 태실을 만들었는데, 일단, 석함에 태실을 넣고, 묻은후 봉분을 만들어 태지석을 묻고, 봉분 앞에는 태실비를 세웁니다.

 

사실 태실을 만드는 과정은 매우 정중하고, 세밀하게 진행되었습니다만 아기태실의 겉 모양은 크게 볼품이 없는 일반 묘처럼 보입니다.

 

▼ 만약 아기태실의 주인공이 왕이 되면, 태실의 모양은 크게 바뀌는데, 태함이 묻힌 땅밑은 그냥 두고 봉분만 없애고, 그 위에 각종 석물로 치장을 하게 되고, 가봉비를 세웁니다.

 

이런 가봉태실은 전국에 몇개 없습니다. 창경궁에 성종의 태실이 있는데, 일제강점기때 창경궁을 동물원인 창경원으로 만들면서 조경용으로 성종의 태실을 옯겨온 것입니다

 

▼ 가봉태실의 기본 모양은 대부분 비슷한데, 중앙의 탑 모양은 중앙태석이라고 하며, 내부는 비어있지 않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실을 가봉하면 그 과정과 가봉태실의 모양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가봉의궤(加封儀軌䡄)라고 합니다

 

▼ 정조태실가봉의궤입니다. 정조의 최초 묘호인 정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에는 한글로 정종은 두분이 있는데, 한분은 이성계의 큰아들 조선 2대 정종(定宗), 22대 정조(正祖)가 있는데, 22대 정조의 원래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습니다.

 

▼ 수원화성박물관 정조의 태실비에는 아무런 글씨도 없는데, 영월에 있는 태실비(앞면)에는 건륭십칠년구월이십이일축시생원자아기씨태실(乾隆十七年九月二十二日丑 時生元孫阿只氏胎室), 즉 연호는 중국 청나라 연호이며, 조선영조 28년에 태어난 원자 아기씨(사도세자 아기)이며, 뒷면에는 건륭십팔년정월이십일일입(乾隆十八年正月 二十一日立)이 새겨진것으로 보아 정조태실은 태어난 지 4개월 후인, 그 다음해 정월(음력 1월)에 세워진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태실가봉비는 아기태실비와는 품격이 다르게 화려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앞면에는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 胎室)이라고 새져겨 있는데, 정조(正祖)의 원래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습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 직계조상들의 묘호를 높이거나, 추증을 하였는데, 이때 정종의 묘호가 정조로 바뀌었습니다.

 

뒷면에는 가경육년십이월이십칠일건(嘉慶六年十月二十七日建)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가경은 청나라 인종때의 연호로서,조선의 순조 1년에 해당 합니다.

 

보통은 왕이 즉위하면 2년~3년 후에 아기태실을 가봉하는데, 정조는 이례적으로 사후에 가봉이 이루어졌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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