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박물관의 2층에는 2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화성축성실과(좌), 화성문화실(우). 이렇게 두 개의 상설전시실이 있습니다. 먼저 화성축성실에서 화성의 축성과정을 전반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 사진은 samsung s23 galaxy Ultra로 찍어 보았습니다
▼ 화성축성실의 전시장은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보겠습니다. 다음은 [화성박물관]에서 인용한 화성축성실의 안내문입니다.
화성축성실은 화성의 축성 과정을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화성행차 시 정조가 입었던 황금갑옷, 『화성성역의궤』와 화성유수 조심태에게 보낸 정조의 비밀어찰,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완질본 등이 전시됩니다.
이 중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 대신 국정을 운영하면서 내린 명령서인 사도세자 영서는 국내에 2점밖에 없는 유물입니다.
아울러 모형 전시를 통해 축성 물자의 이동 경로와 재료에 따른 축성 방법을 살펴볼 수 있으며, 둔전과 시전의 재연을 통해 도시로 발전해 가는 조선후기 수원의 모습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꽃 그림은 정조가 그린 국화이며, 왼쪽 아래 서책은 규장전운(奎章全韻), 또는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이라고 하며 정조 24년(1800년) 왕의 명령으로 규장각에서 펴낸 책으로 한자의 운(韻)자에 대한 사전에 해당하는 서책입니다.
오른쪽 아래 서책은 선언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이라고 하며 조선왕실의 족보로서, 1412년(태종 12년) 10월에 만들어졌으며, 1681년(숙종 7)에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역대의 임금이 새로 즉위할 때마다 추가로 만들어졌으며, 고종 34년(1897)에 합간 하였습니다.
▼ 홍재전서 (弘齋全書)는 정조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99년(1차), 1800년(2차)에 간행한 시문집으로서, 정조의 호인 홍재(弘齋)를 인용해서, 정조가 동궁 시절부터 국왕 재위기간 동안 지었던 여러 시문(詩文)·윤음(綸音)·교지 및 편저 등을 모아 60권 60 책으로 편집한 문집입니다. (2011년 9월 8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
※ 권과 책의 구분 : 권은 내용상의 단락, 책은 제본상의 단락을 나타 내는 단위 입니다,
▼ 정조의 행차를 재현한 모습입니다. 정조는 수원으로 행차를 할 때마다, 대규모의 인원과 군대를 동원해서 군주로서 자신감을 신하와 백성들에게 나타내었습니다.
▼ 왕세자가 신하들에게 내리는 명령문서를 영서(令書)라고 하며, 왕이 내리는 명령문서의 유서(諭書)는, 교서(敎書)의 일종으로서 주로 군사권을 가진 관리(관찰사, 절도사등)에게 내립니다.
▼ 사도세자(1736~1762)가 왕세자 시절에 대리청정을 하면서 영서를 내릴 때의 나이를 보니까, 21세의 청년 시절이었습니다.
사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아주 어릴 때인 3살 무렵부터 심하게 조급증을 나타내며, 질책하였는데, 지금으로 보면 아주 심한 아동학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 현륭원 표석의 탑본은 사도세자의 묘 앞 비각에 있는 표석을 먹물로 찍어낸 것입니다
▼ 표석의 비문은 정조가 친히 지었다고 되어 있으며, 마지막 줄에 대좌석(받침돌)을 수원 앵봉(鶯峯)에서 채석했다고 하였는데, 그 앵봉은 축만제(서호)에서 철로 건너의 동쪽 방향으로 방향으로 있던 바위덩어리 암봉이었으며, 지금은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데 화서동 영광아파트 옆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앵봉에서는 1970년대 까지도 철로 보수용 자갈을 캐서 철로를 이용해서 실어 나르기도 했습니다.
▼ 참고로 앵봉산의 위치를 현재의 지도에서 표시하였습니다. 지금은 앵봉산의 지명은 없어졌지만, 화성축성을 할 때 어느 정도는 채석을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해봅니다.
아주 어릴 적에 보았던 기억에 의하면 매우 하얗게 빛나던 화강암 절벽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경부선 철로를 건설하면서 앵봉산에서 채석한 돌을 자갈로 만들어서 공급하던 곳으로 추측이 되며, 1970년대 까지도 기차를 이용해서 자갈을 실어 나르던 기억이 납니다.
▼ 정조대왕연보의 사진을 대신해서 자료를 보겠습니다
▼ 화성축성의 개략적인 공사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사진의 글씨가 안 보여서 그대로 옮깁니다)
- 정조17년(1793년) 12월 11일에 성벽을 쌓을 터를 미리 조사하였고,
- 정조18년(1794년) 1월 7일 묘시에 돌뜨는 작업을 시작으로,
- 정조20년(1796년) 9월 10일 까지 2년 9개월에 걸친 화성축성 공사가 끝났습니다
※ 화성축성을 일자별로 중요작업을 살펴보겠습니다(날자는 음력으로 봐야 합니다)
ㅁ.1794년 (정조 18년)
- 1월 07일 / 숙지산에서 돌뜨는 작업 시작.
- 1월 25일 / 성벽을 쌓을 흙을 확보하기 위해, 남지, 북지를 팜.
- 2월 28일 / 장안문, 팔달문, 화홍문, 남수문 터를 닦다.
- 4월 28일 / 제중단(濟衆丹;한약의 일종)을 나누어 주다
- 6월 25일 / 칙서단(여름 영양제)을 나누어 주다
- 7월 09일 / 화홍문의 주춧돌을 놓다
- 7월 12일 / 폭염으로 성 쌓는 일을 잠시 멈추다
- 7월 15일 / 장안문의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다
- 7월 18일 / 장락당 지을터를 닦다
- 8월 02일 / 낙남헌 지을 터를 닦다
- 8월 07일 / 팔달문의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다
- 8월 11일 / 장락당의 주춧돌을 놓고, 서장대 지을 터를 닦다
- 8월 13일 / 장락당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하다. 낙남헌 주춧돌을 놓다
- 8월 15일 / 장안문 상량을 하다.
- 8월 22일 / 낙남헌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하다
- 8월 25일 / 팔달문 상량을 하다
- 9월 4일 / 방화수류정 지을 터를 닦다
- 9월 10일 / 서장대 주츳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다
- 9월 16일 / 서장대 상량을 하다
- 10월 04일 / 방화수류정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다
- 10월 07일 / 방화수류정 상량을 하다
- 10월 13일 / 화홍문 기둥을 새우고, 상량을 하다
- 11월 01일 / 1795년 5월 6일까지 품삯 지불이 끝날 때까지 중단
ㅁ.1795년(정조 19년)
- 5월 06일 / 문선왕묘를 옮겨서 모실 터를 닦다
- 5월 08일 / 창룡문 지을 터를 닦다
- 5월 29일 / 문선왕묘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하다
- 7월 15일 / 동장대 지을 터를 닦다
- 7월 18일 / 사직단 지을 터를 닦다
- 7월 21일 / 화서문 지을 터를 닦다
- 7월 26일 / 동장대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다
- 8월 09일 / 문선왕묘를 다시 모시다
- 8월 10일 / 사직단에 신실을 마련하고, 동장대 상량을 하다
- 9월 09일 / 영화정 주춧돌을 놓다
- 9월 13일 / 영화정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하다
- 9월 16일 / 창룡문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다
- 9월 27일 / 창룡문 상량을 하다
-11월 18일 / 화서문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새우다
-12월 11일 / 화서문 상량을 하다
ㅁ.1796년(정조 20년)
- 4월 16일 / 화양루 터를 닦다
- 7월 11일 / 성신사 지을 터를 닦도, 화양루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다
- 7월 13일 / 화양루 상량을 하다
- 7월 22일 / 성신사 주춧돌을 놓다
- 7월 24일 / 성신사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하다
- 8월 15일 / 동장대에서 크게 음식을 내어 위로하고, 기술자들을 시상하다
- 9월 10일 / 10일 성 쌓는 공사를 마치다
- 9월 17일 / 성신사를 완공하다.
- 9월 19일 / 성신사 위판을 만들다
- 9월 21일 / 봉화대 간봉을 완성하다
- 10월 16일 / 낙성연을 열다
▼ 제목을 보면 "화성성역동공제신윤음(諭華城城役蕫工諸臣綸音)"이라는 문서인데,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원화성 축성이 진행 중이던 1794년(정조 18) 전국적인 흉년이 발생하여 정조는 그 해 10월 19일 대신들과 축성 진행여부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채제공을 비롯한 상당수의 대신들은 축성을 함으로써 구휼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공사를 진행하자고 하였으나 정조는 황정(荒政)이 우선되어야 할 상황이라고 판단하였다. 정조는 신하들과 논의한 지 10여 일 후인 11월 1일 「유화성성역동공제신윤음(諭華城城役蕫工諸臣綸音)」을 내려 수원화성 축성을 중지시켰다. 정조는 이 윤음을 통해 축성은 언제든지 할 수 있고 10년까지 끌 수도 있으나 백성들은 잠시라도 굶주리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국가사업보다 백성이 더 중요하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 수원화성의 축성이 중지된 기간은 1794년 11월 01일 ~ 1795년 5월 6일까지 약 6개월이었는데, 이때 공사중지의 주요 원인은 공사비(품삯)의 부족이었다고 합니다. 품삯을 주지 않으면서, 공사를 강제로 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 화성축성의 종합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
▼ 화성성역의궤가 잘 남아 있어서 화성복원이 가능했으며, 또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습니다
▼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훔쳐간 화성성역의궤를 파리에서 유학 중인 홍종우가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을 보면,
외규장각 도서 중 하나였던 『화성성역의궤』 어람용(御覽用)이 19세기 후반 프랑스로 반출된 후 프랑스 파리의 동양어대학도서관에 수장되었다.
1899년 『화성성역의궤』의 가치를 눈여겨본 프랑스 국립민속박물관 관장 앙리 슈발리에(Henri Chevalier)가 조선 최초의 파리 유학생인 홍종우(洪鍾宇, 1850~1913)에게 프랑스어로 번역할 것을 의뢰하여 출판하였다.
프랑스어판 『화성성역의궤』의 제목을 번역하면 ‘화성(華城, 한국)의 성(城) 건축(建築)에 관한 요약집(1800)’ 로 표기되어 있는데 제목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원래의 『화성성역의궤』를 아주 짧게 요약해 놓은 책이다.
도판은 장안문 ·북수문·남수문의 내도(內圖)·외도(外圖), 동북공심돈 내·외 및 이도(裏圖), 방화수류정 외도, 명물각도(名物各圖) 중 일부, 거중기 전도(全圖)와 분도(分圖) 등이 13개만 실려 있다.
▼ 뎡니의궤(원행을묘정리의궤, 園幸乙卯整理儀軌)를 보면 건물들이 채색되어 있습니다. 현재 수원화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의궤는 프랑스가 국외반출을 하용하지 않아서 복제한 의궤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인용해서 보면,
이 책은 현륭원 행차와 혜경궁 홍씨의 탄신잔치, 수원화성 축성 등의 내용을 날짜 순서대로 기록한 한글 의궤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기록한 책을 제작하며 여기에 수원화성의 모습을 다양한 색으로 채색해 수록했다. 『뎡니의궤』는 1797년에 총 48책 48권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프랑스의 도서관에 13책만 남아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소장본은 프랑스에 소재한 책을 복제한 국내 유일본이다. 수원화성과 관련해 『화성성역의궤』에는 수록되지 않은 일부 시설물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며 기존 의궤에서는 보지 못했던 화성행궁의 주요 건물이 그려져 있어 수원화성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 다음은 우리나라의 성곽 및 세계의 대표적인 성곽의 형태를 알아보겠습니다.-
▼ 풍남토성(風納土城)은 한강변에 건설된 한성백제의 토성이며, 발굴조사에 의하여, 임의로 그냥 아무렇게 나 쌓은 토성이 아니라, 일정한 크기의 틀을 만들고, 그 안에 모래와 황토를 섞어서 넣고, 단단하게 다진 토성이었습니다.
▼ 충남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이며, 신라가 쌓은 3년 만에 돌로 쌓은 성이라고 해서 삼년산성입니다
▼ 강화도의 해변에 일부 남아 있는 강화외성이며, 기초는 석축이며, 성벽은 순수하게 전돌(구운 벽돌)로 쌓았습니다.
▼ 평요고성(平遥古城)은 고구려의 2번째 도읍지 국내성으로 비정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면,
명청시대에 축성된 평요고성은 한족도시 양식의 전형적인 예를 갖추었다. 원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26차례의 중축을 거치면서 벽돌로 쌓은 성곽이 되었다.
이 성곽에는 수원화성처럼 성 안에 사는 읍성으로 지금까지도 관청, 사찰, 청대에 건축된 점포등 옛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일본의 히메지성입니다. 안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수원화성처럼 '규형쌓기(지반에서 중간 부분까지는 들여 쌓다가 위로 갈수록 바깥으로 내어 쌓는 방식)를 하여 성벽을 일직선으로 쌓았을 때 무너지기 쉬운 문제를 해결하였다.
조선에서는 함경도 경성의 음성이 대표적인 규형쌓기였다. 이 모형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히메지성의 천수각 부분이다.
▼ 유럽 최강의 요새 크론보르성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크론보르성은 화포 공격에 대비하여 수원화성처럼 성벽 안쪽을 흙으로 채운 내탁방식에 망루등의 방어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은 낮지만 별 모양으로 빗겨 세워져 있어 포탄의 충격을 완화하기에 용이한 구조적 특징을 갖고 있다.
▼ 화성행궁의 설명과 전각들의 배치모형입니다.
▼ 화성의 팔달문에 이어져 있었던 성곽들의 모습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성벽을 헐어버리고 길을 내었는데, 지금까지도 그대로 있습니다. 현재 복원되지 못한 성곽의 시설들은 남동적대, 서동적대, 남암문, 남공심돈이 있습니다.
▼ 「 화성성역의궤」에 화성기적비의 내용이 남아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1991년 장안문 서쪽 장안공원에 화성기적비를 건립하였으며, 화성기적비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화성 축성의 전반적인 과정이 기록된 비석으로 정조의 명에 따라 1797년 1월 김종수가 작성하였다
정조가 화성 축성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정조의 위민 정신과 개혁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사업은 수원부가 기호(畿湖)의 요충지라고만 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5,000병마의 무리가 있다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선침(仙寢)을 위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행궁(行宮)을 위한 것이다.
마땅히 민심을 즐겁게 하고 민력을 덜어주는 것에 힘써야 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백성들을 괴롭히는 데 가까운 일이 있다면 비록 공사가 하루를 못 간다 할지라도 나의 본의는 아니다.
모든 일을 먼저 그 대체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성을 쌓는데 중요한 것은 형편에 따라서 기초를 정하되 둥글거나 모나게 하지 말며, 보기에 아름답게 꾸미지도 말고 이로움과 형세에 따라서 하라.
운반을 편리하게 해 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예 사람의 인중기(引重機)와 기중기(引重機)를 사용한 법을 강구해서 거행하도록 하라.
재물 모으는 방법은 조처하고 계획한 것이 있으니 경비를 걱정하지 말고 다름 기부금도 받지 말도록 하라.
모양을 꾸미는 방법으로는 위는 처마처럼 하고 아래는 돌층계처럼 하여 지역에 따라서 쌓되, 멀리는 중국의 법을 모방하고, 가까이는 고상(故相)이 논한 것을 취하라.
왕의 말이여, 한결같도다. 왕의 마음이여. 여기에서 모든 왕 중에 으뜸가는 효도와 백성들을 자식같이 여기는 인자함과 만물에 두루 베푸는 지혜를 볼 수 있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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