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박물관의 1층의 로비에는 마침 3.1절을 맞아서 만세운동을 재현하였습니다. 3.1 운동은 비폭력의 평화적인 시위였지만, 일제는 총. 칼로 짓밟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정치지도자,사법계,교육계는 물론, 일반인들도 일제강점기 때의 일제의 반 인륜적 행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도리어 한반도를 강점한 행위가 정당하다고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지금 아직도 일제시대에 살고 있는것 같은 기분이 들때가 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으며, 일본은 신라시대때 부터 한반도 땅을 빼앗으려고 했으며, 지금도, 앞으도 침략행위는 절대 멈추지 않을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잊어가고 있습니다. 일본의 속내를 모르는 이 나라는 뭔가 한참 잘못된 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 2층 전시관 중앙에 서 있는 거대한 오석(烏石)의 비(碑)는 창성사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모작품) 입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창성사는 광교산 기슭에 있었으나 폐사되어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보통은 국사가 입적을 하면 사리탑과 탑비를 세우는데 탑은 없어지고 탑비만 남아서 탑비를 지금의 매향동(방화수류정 옆)에 1965년 이전하였는데, 수원박물관에 있는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는 모작입니다
▼ 수원박물관의 역사관은 선사시대(청동기시대) 부터 근대시대까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선사시대의 유물은 지금의 권선구 호매실동과 금곡동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사시대?, 선사시대는 어느 시기를 말하는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ㅎ.ㅎ...
선사시대는 단적으로 말하면, 기록으로 알 수 없는 시대로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시대를 말하며, 우리는 역사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수백만 년의 인류시대에서 역사시대는 선사시대와 비교해 보면 5%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시대입니다
▼ 수원 금곡동 음굴에서 출토된 토기들이며,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입니다.
▼ 수원 금곡동 움집터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의 석기들인데, 꽤 정교하게 다듬어진 칼들입니다. 하단에 반달모양의 석기들(3점)은 벼를 벨 때 쓰이던 돌칼입니다.
▼ 삼국시대의 수원은 한성백제 시대였습니다.
▼ 독무덤인데 의외로 크기가 아주 작은것으로 보아 아기의 무덤으로 보입니다.
▼ 수원 팔달문동종이며, 따로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약간 고려시대의 종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숙종)의 종이며, 사실은 이 종이 보고 싶어서 왔거든요!!!
▼ 특별하게 글이 새겨진 검은 돌판이 보이는데, 무덤에 묻었던 묘지석입니다. 고려시대 최루백의 아내 염경애의 묘지석(복제품;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입니다.
▼ 고려시대의 최루백이 아내 염경애가 죽은후에 글을 써서 검은 돌(오석)에 새긴 후에 무덤 앞에 묻은 묘지석이며, 묘지석은 왕실은 물론 어느 정도의 권력, 재력등을 가진 자들의 무덤앞에 대부분 묻었으며 아마도 중국에서 건너온 풍습으로 보입니다.
▼ 염경애의 묘지석의 연대는 고려의종 2년(1148년)이며. 수원박물관의 묘지석은 복제품입니다(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글로 풀이한 내용을 옮겨 봅니다.
특이한 것은 여자에 대한 이름은 보통 어디 염씨, 이렇게 적는데, 최루백은 직접 아내의 이름을 경애(瓊愛)라고 밝힌 점입니다. 무관으로서 지방을 떠돌던 것, 가난에 대한 미안함등에 대하여 깊은 정을 담아 묘지명을 썼습니다. 현대시대에도 이런 부부가 있을까요???
아내의 이름은 경애(瓊愛)로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의 딸이고, 어머니는 의령군대부인(宜寧郡大夫人) 심씨(沈氏)이다. 아내는 25세에 나에게 시집와서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장남은 단인(端仁)이고, 2남은 단의(端義)이고, 3남은 단례(端禮)인데,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고, 4남 단지(端智)는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장녀 귀강(貴姜)은 흥위위녹사(興威衛錄事) 최국보(崔國輔)에게 시집갔는데 최씨가 죽자 집에 돌아와 있고, 2녀 순강(順姜)은 아직 어리다.
아내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조심스럽고 정숙하였다. 제법 문자를 알아 대의(大義)에 밝았고 말씨와 용모, 일솜씨와 행동이 남보다 뛰어났다. 출가하기 전에는 부모를 잘 섬겼고, 시집온 뒤에는 아내의 도리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어른의 뜻을 먼저 알아 그 뜻을 받들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을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친척들의 경조사를 힘써 살피니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내가 패주(貝州)와 중원(中原)의 수령으로 나갔을 때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어려움을 꺼리지 않고 함께 천 리 길을 갔으며, 내가 군사(軍事)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동안 가난하고 추운 규방(閨房)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군복을 지어 보내 주었다.
혹은 엄환(閹宦)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어서 음식을 만들어 보내기도 하였으니, 무릇 나를 좇아 어려움을 겪은 23년 간의 일들을 모두 적을 수가 없다.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를 섬기지 못하여 명절이나 복일(伏日)과 납일(臘日)3)이 되면 매번 몸소 제사를 드렸다. 또 일찍이 길쌈하여 이것을 모아서 저고리 한 벌이나 바지 한 벌을 지어 제삿날이 될 때마다 영위(靈位)를 모시는 자리를 마련하고 절한 다음 이것을 바쳤으며, 곧 재에 나아가 무리가 많든 적든 버선을 지어 승려들에게 시주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잊지 못할 일이다.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독서하는 분이니, 다른 일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집안의 의복이나 식량을 주관하는 일을 맡았는데, 비록 여러 번 힘써 구하더라도 맘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설사 불행하게도 뒷날 내가 천한 목숨을 거두게 되고 그대가 후한 녹봉을 받아 모든 일이 뜻대로 되더라도, 제가 재주 없었다고 하지 마시고 가난을 막던 일은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고는 크게 탄식을 했다.
다음 을축년(인종 23, 1145) 봄에 내가 사직(司直)에서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자리를 옮기니, 아내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면서 말하였다. “우리의 가난이 끝나려나 봅니다.” 내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간관(諫官)은 녹봉이나 지키는 자리가 아니오.” 그러자 아내는 “혹시라도 어느 날 그대가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天子)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논쟁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 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또한 달게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평범한 부녀자의 말 같지 않았다. 그 해 9월에 아내는 병이 들었는데 병인년(인종 24, 1146) 정월에 병이 위독하여 세상을 떠나니, 한(恨)이 어떠하였겠는가.
나는 병인년 여름에 우사간(右司諫)에 오르고 12월에는 좌사간(左司諫)으로 옮겼다. 정묘년(의종 1, 1147) 봄에 시어사(侍御史)로 옮겼다가 그 해 겨울에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로 좌천되었다. 무진년(의종 2, 1148) 봄에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옮겼다가 다시 청주부사(淸州副使)에 임명되었다.
여러 번 벼슬이 오르면서 계속하여 후한 녹을 먹게 되었는데, 집안을 돌아보면 의식(衣食)은 오히려 아내가 어렵게 애써서 구할 때와 같지 못하니 누가 아내를 말하여 재주가 없었다고 하겠는가. 아내가 장차 목숨을 거두려 할 때 나에게 죽은 뒤의 일을 부탁하였고 여러 자식들에게도 유언을 남겼는데, 그 말들이 모두 이치에 닿아 들을 만한 것이 많았다. 세상을 떠날 때 나이가 47세였다.
명(銘)하여 이른다.
믿음으로써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리라.
아직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일이 매우 애통하도다.
아들딸들이 기러기처럼 뒤따르니
부귀가 대대로 창성할 것이로다.
▼ 수원에서 대대로 살아오셨던 분들의 성씨들이 50여개가 있어서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 조선시대의 숫가락을 보면 지금과는 많이 다르게 기다랗고 뾰족하게 생겼습니다.
▼ 수인선의 협궤열차의 모형입니다. 일제는 여주,이천의 쌀을 인천항으로 나르고, 인천에서 올 때는 소래, 고잔등에서 생산된 소금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수원역을 중간으로 해서 협궤열차를 운행하였는데, 최종적으로 1995년 수인선은 폐선이 되었으며, 지금은 지하철(수인분당선)이 개통되어 운행되고 있습니다.
▼ 왼쪽 사진은 수원역내에 수인선과 수여선의 협궤철로가 , 오른쪽에는 황구지천을 가로지르는 수인선 철로가 남아 있는 사진인데, 위치는 고색동이며, 지금은 철로가 철거되었고 시민들의 산책용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팔달문의 영동시장에 있었던 양복점과 한식 음식점 화춘옥의 오래 전의 모습입니다. 화춘옥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는 아주 오래된 음식점입니다만, 음식점 주변이 고층 건물들이 많아서, 쉽게 찾기는 어렵습니다.
▼ 이 사진은 일본상인들이 본격적으로 팔달문앞에 진출할 때의 모습으로 보이는데, 1910년~1920년대로 보입니다.
▼ 수원(화성포함)의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약력을 알려주는 안내판인데, 좀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으면 3대가 떵떵거리고 살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빌어 먹는다고 하는데, 일제에 맞서면 목숨까지도 위협을 당한다는 알기나 하셨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친일파라고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글로벌한 지금 시대에 국익을 위해서는 친미파, 친중파, 친일파, 친유럽파등등은 당연한 것이지만, 민족의 정체성을 팔아먹고, 한평생 편하게 살자고 일제에 빌붙어서, 밀정에 고위관리까지 지내고, 그 후손들은 국회의원, 교육, 종교, 언론까지 틀어 쥐고 있는데, 그 당시 친일파들은 지금의 일반적인 친일파와는 차원이 다른 그냥 민족반역자라고 해야 합니다.
▼ 수원의 대표적인 근대화 인물들을 알려주고 있는데, 다른 분들도 많았겠다 싶습니다.
▼ 수원의 독립운동가, 근대화인물 중에 김세환선생을 알아보겠습니다.(수원박물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김세환 선생은 1888년 11월 18일 수원시 남수동 242번지에서 태어났다.
1901년 성안 보시동에 감리교회(지금의 북수동 수원 종로교회)에서 기독교 신앙뿐 아니라 교육가로서 또는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꿈을 키워 나갔다.
이후 서울의 관립 외국어학교로 진학하여 공부하였던 김세환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중앙대학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일본에서 돌아온 김세환은 고향 수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908년 4월 15일 수원 남수동에 수원의 조선인 상업인들이 주도한 수원상업회의소가 설립되었고, 이듬해 김세환선생은 상업강습소 직조 감독관으로 일하며 동시에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서 설립되었고, 이듬해 수원상업회의소 안에 ‘상업에 관한 지식, 기능의 강습’을 목적으로 상업강습소를 설치하였다. 이에 상업강습소는 낮에는 일해야 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하여 야학으로 운영되었다.
이 강습소는 일제에 의해 폐쇄 위기를 맞았으나, 화성학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하였는데, 그 학원이 지금의 수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13년 김세환은 삼일여학교 학감으로 부임하였다. 김세환이 삼일여학교 학감으로 부임할 당시 수원군의 교육상황은 여전히 서당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삼일여학교 학감인 김세환은 학교를 자주 비우는 밀러 교장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였다. 삼일여학교를 새롭게 단장하는 등의 열성과 더불어 그는 학교 건물에 한반도 지도를 조각해 넣음으로써 학생들과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삼일여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김세환은 불멸의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즉 삼일여학교를 명실상부한 학교로 자리매김한 것과 함께 1919년 민족사적 분수령이었던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로 점이다.
김세환은 YMCA 간사였던 박희도를 통하여 1919년 2월 10일경 3․1 운동 준비 모임에 참가하였다.
이에 충남지역과 수원지역의 조직 책임자가 되어 활동하였는데, 충남 해미의 김병제, 수원 남양교회 동석기, 수원 종로교회 임응순, 오산교회 김광식, 이천교회 이강백 등을 만나 민족대표로 서명하도록 승낙을 받았다.
그러나 김세환의 서울 도착이 늦어져 독립선언서에 기명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독립선언서에 기명은 하지 못하였다.
▼ 3.1 운동당시 체포되어 작성된 김세환선생의 신상표인 듯합니다(독립기념관)
▼ 체포당시 김세환선생의 직업이 목재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적을 보면 지금은 알 수 없는 산루리(山樓里)라고 쓰여 있는데, 지금의 팔달구이며, 매산동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팔달산 아래의 향교와 팔달문사이의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 김세환선생의 중년,장년의 사진입니다(출처는 독립기념관, 한국학중앙연구원)
▼ 3.1 운동 독립당수령 48인 공판이라는 기사의 동아일보신문-독립기념관(1920년7월12일), 독립선언서 33인이 아니라 48인 이었군요!!!(자료:독립기념관)
▼ 기미독립선언에 참가한 인원이 33명이었는 줄 알았는데 48인이었네요...서훈 일자를 보면 너무 늦게 서훈되신 분들도 많이 보이는데, 늦게나마 다행으로 여기며, 독립운동했다고 하신 분들의 후손들을 보면, 대체로 풍족하게 사시는 분들이 보기 어려운데 좀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붉은 선은 변절자입니다 (자료 위키백과)
▼ 1903년 이후 삼일학교 학생들-공훈사료관
▼ 1918년 수원학생친목회 화성팀 기념사진(가운데 흰 옷을 입은 사람이 김세환) - 독립기념관 제공
▼ 1920년대 삼일여학교(공훈사료관)-지금의 매향여고(매향여자정보고)
▼ 삼일여학교 김몌례 교사 송별회 기념사진(1916.08.24.)-머리를 짧게 깎으신 분이 김세환선생
▼ 김세환선생의 가족사진(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 김세환선생이 출옥 후 기념사진(1920.11.6)
다음은 서예관의 전시품에 대해서 몇 가지만 알아보았습니다.
▼ 서예관의 입구에서 보이는 묘갈(묘비)을 보면 , 정희린의 묘비는 한석봉의 글씨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 한희린의 묘비 뒤론 보이는 서예관의 모습이며, 대부분 묘비명, 서예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 한희린의 묘비의 정면입니다. 특별하게 한석봉의 글씨라고 합니다. 다음은 수원박물관에서 인용한 정희린의 생애에 대한 자료입니다
정희린(1532~1583)은 선조대(宣祖代)의 문신으로 자는 덕보(德甫)이며 대사헌 정유(鄭裕)의 장남이다.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진출하여 사헌부감찰 등을 지낸 후 외직으로 나아가 경상도 의흥(義興)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묘갈은 아버지 정유 묘갈과 거의 동일한 양식과 재질을 갖추어 1587년(선조 20) 건립하였다.
앞면 대자(大字)와 뒷면의 작은 글씨 모두 한석봉(韓石峯)의 필적이다. 한석봉은 평소 묘비 글씨로 정서체(正書體)의 해서를 많이 썼는데, 정희린 묘갈의 작은 글씨는 행기(行氣)가 넘쳐나는 특징이 있다.(자료는 수원박물관 홈페이지)
▼ 화홍문의 현판을 탁본한 현판입니다. 화홍문의 필체는 아름다우면서도 힘차게 보입니다.
▼ 조선시대 왕들의 글씨(어필) 들을 보면, 글씨가 대체로 보기가 좋은데,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를 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다음은 영조의 어필을 보겠습니다.
▼ 조선 사대부의 사랑방을 재현하여 놓았습니다. 현판 글씨는 天庵耕讀之室(천암경독지실)이며, 우암 정대유(근대 서화가)의 글씨이며, 천암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글을 읽는 방이라는 뜻의 글씨입니다
▼ 중국에서 건너온 거대한 벼루인데, 정말 저 벼루에 먹을 갈았을까?
- 끝 -
'▣ 역사.문화재.사찰 > 경기지역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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