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은 백제의 웅진성으로 공주를 지키기 위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이며,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부하 장군의 쿠테타로 체포돼서 당나라에 넘겨져던 슬픈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의자왕은 공산성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대항하던중 부하 장군 좌평 "예식진"의 반란에 의하여 체포되어 당나라에 넘겨졌으며,사망후 당의 북망산에 묻혔고. 후세의 평가처럼 주색에 빠졌거나 무능한 왕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 KBS역사추적 "1300년만에 밝혀진 의자왕 항복의 비밀"에서 밝혀진 내용입니다, 일부 편협한 시각의 역사가들 때문에 더럽혀진 의자왕의 명를 회복시켜준 KBS 역사추적에 찬사를 보냅니다
※ 예식진은 당나라에 의자왕을 넘긴후에 "대당좌위위대장군"이란 칭호를 받고 죽은후에는 당나라 고위관직에 있던 사람들만 묻히는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그의 묘지에서 발견된 비문으로 인하여 그의 반역 행적이 밝혀졌으니, 역사의 아니러니라 할수 있습니다.
백제 문주왕 원년(475년) 한성 위례성으로 부터 이곳으로 도읍을 옮겨 삼근왕,동성왕,무령왕을 거쳐 성왕16년(538년)에 부여로 옮길때 까지 5대왕 64년간 왕도를 지킨 이 산성은 북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혜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산성은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식이며 원래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의 선조와 인조대에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되었습니다
성곽의 길이는 약 2,660m로 토성을 제외하면 2,193m이며 .현재의 성벽은 높이약 2.5m너비 약 3.0m로 대부분 보수되었고 성내 유적은 금서루/진남루/공북루/쌍수정/명국삼장비/쌍수산성사적비/영은사/연지및 만하루/임류각/광복루등이 남아있습니다
※종 목 사적: 제12호 / 면적:218,817㎡ / 지정일:1963.01.21 / 소재지:L충남 공주시 산성동 2외 /시대:삼국시대
※문주왕 : 백제의 제22대 왕으로 개로왕의 아들.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침입 때 신라의 원군을 이끌고 왔으나, 개로왕은 전사하고 백제는 패퇴한 뒤였고 즉위 후 웅진으로 천도하고, 국방에 힘을 쏟았습니다
- 아래의 모든 자료는 입장권 구입시 받아본 리플렛의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 금서루(錦西樓)
성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의 정문이며 현실과의 타협의 결과로 자동차용 도로가 성곽밑으로 지나가고 있습니다. 성내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지는 않은것 같으며 저 도로는 영은사 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1993년에 서문지를 발굴하면서 복원공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공산지에 의하면 문루의 규모는 동문루와 같으며 정면3칸 측면 1칸의 중층건물이었다고 합니다.
▼ 공산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는 지도를 넣어 보았습니다. 답사코스는 금서루에서 공북루->동문지->진남루->금서루로 하였으며 답사시간은 천천히 2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 공산성의 답사는 주차장이 있는 금서루쪽 부터 하게되었는데,한눈에 봐도 복원은 잘된것으로 보입니다.
▼ 금서루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공덕비인데 아마도 여러군데 흩어져 있던 것을 한군데로 모아서 정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때 그 많은 관찰사가 정말로 민초들이 잊을수 없을 정도로 정치를 잘 하였단 말인가?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했던 지방수령이라면 임기가 끝나고 한양으로 갈때 공덕비 세우는것을 말렸을것입니다.
▼ 성곽 밑으로 자동차용 도로가 지나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성곽의 상태는 좋아 보입니다.
▼ 성곽의 문에서 바라본 북쪽방향의 전망대와 성곽의 모습입니다. 검증되지는 않았겠지만, 깃발의 모습이 너무 흔하게 보입니다.
▼ 성곽 안쪽에 있는 백제군사의 장승모습과 금서루 모습입니다
▼ 금서루에서 바라보는 전망대이며, 이전망대는 원래 성곽의 시설물은 아닌것으로 보입니다
▼ 비스듬이 바라본 성곽 안쪽의 금서루 모습.자동차용 터널 구조물로 인하여 성문의 전체모습이 왜곡돼 보입니다.
▼ 성곽길을 따라 갈수록 성의 안과밖의 모습이 잘 보여집니다.
▼ 성곽의 북쪽길을 따라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합니다.고목의 나이가 얼마인지 가늠도 못하겠습니다.
▼ 금서루와 주변 성곽의 모습들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 전망대가 시원스럽게 서있습니다.올라서면 금강과 공북루의 모습이 잘보입니다
▼ 금강과 맞닫아 있는 공북루와 이어진 성곽인데 깃발이 부서지고 구부러지고 쓰러진것이 부지기수입니다
▼ 주거지역이었던 곳을 발굴하는 현장의 모습입니다.
▼ 공북루의 시원스러운 모습입니다.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불렀으며,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규모가 큰 누각 건축으로, 윗층에는 누마루를 깔았고 아랫층은 통행로로 쓰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공북루’라고 쓴 현판은 성의 안쪽에 해당하는 추녀 밑에 걸려있다.
▼ 공북루 밖에서 바라본 전망대 방향입니다
▼ 강가쪽에서 바라본 공북루의 모습입니다.
▼ 만화루와 연지,연지는 보수공사중인듯 합니다연지는 공산성 안에 있는 연못 중 하나이고,단을 둔 석축을 정연하게 쌓았으며 동서 양측에 넓은 통로를 둔것이 특징이며 길이는 약 9m입니다.연못과 금강사이에 만하루라는 정자를 세웠고, 연못은 백제 때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특히 연못에 이를 수 있는 암문(성벽에서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을 택하여 몰래 출입하도록 만든 작은 문)이 발굴되어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 연지 위에 있는 영은사, 영은사는 공주 공산성 안의 북쪽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1458년(세조 4)에 지은 사찰로, 1616년(광해군 8)에는 이곳에 승장을 두어 전국 8도의 사찰을 관장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영은사의 관일루는 임진왜란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이 곳에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 전투에서 참여하였다고 하며, 영은사 부근에서는 통일 신라시대 불상6구가 출토되어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곳에 사찰이 존재했었음을 짐작케 한다고 합니다.
▼ 만화루(연지)에서 동쪽방향의 성곽인데 복원이 안되어 있습니다
▼ 명국삼장비정유재란때 충주에 주둔하면서 왜적의 위협을 막고 선정을 베풀어 주민을 평안하게 하였던 명나라의 장수인 이공,임제,남방위의 사은 송덕비이다고???,(글쎄 내생각에는... 그 명나라 장수들이 정말 그랬을까???, 어쩔수 없이 비를 세웠던것은 아닌지..........)
▼ 임류각과 명국삼장비각임류각은 백제 동성왕 22년(500년)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건물로써 왕과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건물은 1980년 공산성에서 발굴 조사된 추정임류각지의 구조를 근거로 1991~1993년까지 새로 복원한것입니다.
▼ 광복루원래 공북루옆에 계상루(繫桑樓)라 하여 성내 중군영(中軍營)의 문루였던 것을 중군영의 폐쇄 후 일제 초기에 이곳으로 옮겨 웅심각(雄心閣)이라 불렀답니다.
1945년 공주 주민들이 보수하였고 이듬해인 4월에 김구, 이시영 등이 이 누각을 독립을 기념하는 뜻으로 광복루라고 개칭하였습니다.
▼ 견고한 토성과 어울려 동문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토성위에는 목책으로 방어선을 만들었을것입니다.
▼ 성문은 금서루와 같은 구조로 복원된것으로 여겨집니다
▼ 동문루를 가까이 본모습인데 금서루와 똑같습니다.
▼ 동문루라는 이름말고 다른 이름이 있을텐데....정면에서 바라봐도 문의 이름이 쓰인 현액이 안보입니다.
▼ 동문루에서 진남루로 가는길중에 만난 치성인데 치성은 처음보는것 같습니다
▼ 뒤돌아본 동문루와 성곽이며, 성곽은 비교적 복원상태가 좋습니다
▼ 남문인 진남루입니다
▼ 진남루에서 동문루로 뻗어있는 성곽이 보입니다.
▼ 너무 잘해도 걱정이네요. 주변성곽과 문의 성돌이 너무 어울려보이지 않습니다. 성문의 전체공사가 덜 끝난듯하게 보이고 돌을 너무 잘 다듬었으며, 무슨 연속극(사극)의 셋트장 건물처럼 보입니다
▼문루와 성문의 석재가 너무 안어울립니다.석재를 너무 잘 다듬어서 반질반질하군요!
▼ 이제 왕궁터 추정지이며 쌍수정이 있는곳에 왔습니다.
▼ 쌍수정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임시 파천한 곳이라는데, 쌍수정에 기대어 왕도를 걱정하던 인조가 난의 평정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 쌍수정에 통훈대부의 영을 내렸다는 유래가 있답니다
▼ 쌍수정사적비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던 10일간(인조2년2월~13일)의 내용을 새긴 비문이며, 이비문은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지은것으로 글씨는 숙종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썼다고 합니다.
사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제거한 광해군 보다도 정치,외교력이 현저히 떨어져 결국 나라를 오랑캐에 짓밣히게 했던 무능한 왕이었습니다.
▼ 왕궁터 추정지에 있는 연지인데 물은 없다.산위에 있는데 과연 옛날에는 샘물이 나왔을까?
▼ 이제 쌍수정에서 금남루 방향으로 길을 잡아 갑니다
▼ 이제 다시 금서루가 보이는데, 잘 보전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이제 주차장으로 내려서서 집에 갈일만 남았습니다. 조선시대때 토성에서 석성으로 다시 쌓은성이라서 그런지 다른 조선시대때 석성을 보는듯 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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