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4대 선조와, 정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잠들어 있는 곳은 구리시 동구릉의 목릉(穆陵)입니다. 동원이강릉으로 왕과,정비, 계비 3분의 능침이 모두 한자리 모여서 있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홍살문 앞에서 목릉의 대략적인 설명을 보고 갑니다,

※ 능의 역사

목릉은 처음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0년(선조 33)에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유릉(裕陵)이라는 능호로 조성되었다.

 

이 후 선조가 1608년에 세상을 떠나자, 건원릉 서쪽 산줄기(현 헌종의 경릉)에 목릉이라는 능호로 조성하였다가 1630년(인조 8)에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현 위치로 옮기고 의인왕후의 유릉(裕陵)과 목릉의 능호를 합하여 목릉이라 하였다.

 

1632년(인조 10)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처음 혜릉(惠陵)이라는 능호를 정하였다가 목릉과 능역을 합치자는 의논으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 여기서 선조의 가계도를 올려봅니다. 13대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 하자, 11대 중종의 후궁이었던 창빈 안씨의 아들 덕흥군(추존 덕흥대원군)아들인 하성군(선조)에게 보위를 잇게 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망할지경까지 왜놈들에게 국토는 물론 백성들까지 유린당하게 하고, 도망가기 바뻤던 왕으로 기억되는 왕입니다.

 

 ※ 선조는 윗대 왕보다는 자식은 많이 두었으나, 자식사랑이 삐뚤어져서 백성의 원한이 많았으니, 조선 최대의 망나니 임해군/정원군/순화군은 왕족의 본분을 잊은채 구타 강간, 살인등을 일삼은 지금으로 치면 거의 싸이코패스 였습니다.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은 성정이 포악하여 세자자리를 동생인 광해군에 밀렸으며, 임진왜란때는 함경도 회령에서 순화군과 함께 왜군에 포로가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곀기도 했었습니다만, 사실은 못된짓을 많이 하니까 백성들이 왜군들 한테 넘긴것이라고 하니, 죽어도 쌉니다 . 광해군 즉위후 역모죄로 진도에 유배되어 사사 되었습니다.

 

인빈 김씨에서 생산된 정원군(추존  원종;인조 사친)은  성품이 포악하고, 방탕하여 탄핵을 많이 당했는데,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는지 광해군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인 능창군을 역모에 엮여서 죽이고, 살던 집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고 그 자신도 홧병으로 얼마 못 가 죽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차남 능양군반정에 가담해 결국 광해군을 무너뜨리고 인조가 되었다. 조선최대의 망나니 정원군의 아들을 반정세력이 사람을 잘못 찍은 것입니다.

 

순화군은 순빈 김씨의 외동 아들인데, 구타 살인, 갈취등 저잣거리의 양아치들이나 하는 못된짓을 하여 유배를 당하기도 했으며, 선조가 그때마다 풀어주었으나, 못된 성정을 버리고 못하고 풍에 맞아 사망했다고 합니다.

 

결국은 선조의 잘못된 자식 사랑이 망나니로 만들었습니다. 자식 하나도 제대로 못 가르치면서 만백성의 어버이라는 임금에 자리에 앉아있다가 임진왜란으로 금수강산을 피바다로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 선조(宣祖) 이야기

선조(재세 : 1552년 음력 11월 11일 ~ 1608년 음력 2월 1일, 재위 : 1567년 음력 7월 3일 ~ 1608년 음력 2월 1일)는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에 인달방(현 서울 사직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명종의 아들)를 잃고 후사가 없었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에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인순왕후의 명으로(명종의 양자 입적)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8개월 동안 받았다.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를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여러 왕손들을 궁궐에 자주 불러,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곤 했다. 그 중에서도 선조(당시 하성군)를 유난히 아껴 그를 따로 불러 학문을 시험해보기도 하고, 한윤명, 정지연 등을 따로 뽑아 그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명종 말년부터 일어난 붕당정치의 시작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세자책봉 문제로 옥사가 일어났으며,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에 이어서 정유재란이 일어나 두 차례에 걸친 7년 동안 전쟁을 치르며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그 후 1608년(선조 41)에 경운궁 석어당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원래의 묘호는 선종(宣宗)이었으나, 광해군이 종계변무[]와 왜란의 성공적인 마무리들을 들어 선조로 바꿀것을 명하며 선조(宣祖)로 묘호가 바뀌었습니다

 

- 종계변무[誣]란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세계()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했던 사건.

 

 

 ▼ 이제 자료 설명에 이어서 목릉의 홍살문 부터 정자각과 비각, 인목왕후의 능을 살펴보는 사진을 올렸습니다

 

▼ 목릉을 방문했던 날은 잔디깍기가 한창이어서 시끄럽고, 작업에 방해가 안되게 멀찌감치 돌다 보니 정자각에는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 목릉은 능의 구역이 넓은편이라서 호젓하게 돌아보기가 좋은 곳입니다.

 

정자각은 원래 의인왕후의 능 앞에 있었다. 그러다가 1630년(인조 8)에 선조의 능이 천장되면서 기존의 목릉 정자각을 이건(移建)하게 되자 의인왕후 능 앞에 있던 정자각은 헐었다.

 

이 후 인목왕후의 능이 조성되면서 치우친 정자각을 다시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건이 번거롭다하여 신로만 정자각에 접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현재 목릉의 정자각은 선조의 능을 향하여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다. 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진 건물로 보물 제1743호로 지정되었다.

 

▼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의 능들은 대부분 넓은 능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3대 태종의 헌릉에 비하면 목릉은 3배는 넓은 것 같습니다

 

▼ 샘물이 솟아 나는 것이 보이는게 어정이나, 제정으로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 목릉에서 선조의 능과 의인왕후의 능은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멀리서 봐야 합니다.

 

▼ 선조의 능침을 부분별로 꾸며 보았습니다.

▼ 선조의 능 뒷부분 입니다.

선조의 능은 기본적인 왕릉상설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석양 및 석호가 배치되어 있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병풍석만 생략했을 뿐 상설은 선조의 능과 같다. 다만, 의인왕후의 능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처음 조성한 능이었기 때문에 석물들의 조각미가 다소 떨어지지만,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선조의 능 우측에는 의인왕후의 능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에 돌아가시어 능상을 만들때까지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 의인왕후(懿仁王后) 이야기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재세 : 1555년 음력 4월 15일 ~ 1600년 음력 6월 27일)는 본관이 반남인 반성부원군 박응순과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555년(명종 10)에 태어나, 1569년(선조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침착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후궁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남달리 총애하여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훗날 왕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1600년(선조 33)에 황화방 별궁(경운궁)에서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의인왕후 박씨의 능침입니다. 난간석만 있고 병풍석이 안보입니다.

 

 ▼ 표석의 자료사진입니다.

 

▼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을 멀찌감치 보고 나서 인목왕후의 능으로 갑니다. 보기는 좋은데, 잔디를 깍는 인부들이 고생 하는것을 보니,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 인목왕후의 능으로 가는길은 신로인데, 능침이 정자각에서 한참 가야 합니다.

 

▼ 장자각 뒤에서 이어져 나오는 신로가 보입니다. 사실은 신로를 밝고 가면 안되고 능주만이 능침에서 정전까지 다니는 길이랍니다.

 

▼ 대부분의 수라간이나, 수복방들은 요즘에 복원하는 듯이 보입니다. 수복방은 인목왕후릉에서 보입니다

 

▼ 선조의 능이 잘 보이는 곳에 한장 담아 둡니다.

 

▼ 인목왕후의 능앞에는 건물터같은 것이 보이는데 설명은 없어서 알 수 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부터는 인목왕후 김씨 능의 사진들입니다. 능침까지 개방되는 왕릉은 거의 없는데, 목릉의 인목왕후의 능은 개방되어 있어서 많은 자료사진을 담아 봤습니다.

 

▼ 능앞의 오른쪽에는 사작형의 평석이 보이는데, 아마도 산신제를 지내는 산신상석인듯 합니다

 

▼ 산신상석의 구멍이 있는 용도는 무엇인지 긍금합니다.

 

▼ 인목왕후릉의 곡장에서 담아 보았습니다.

 

 - 인목왕후(仁穆王后) 이야기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재세 : 1584년 음력 11월 14일 ~ 1632년 음력 6월 28일)는 본관이 연안인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씨의 딸로 1584년(선조 17)에 반송방(서울 아현동 일대) 사저에서 태어났다. 1600년에 선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602년(선조 35)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다.

 

광해군 즉위 후 왕대비가 되었으나, 1613년(광해 5)에 계축옥사로 친정아버지와 영창대군이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일을 겪었다. 광해군일기에는 인목왕후의 죄악이 열거되어 있는데 의인왕후의 유릉(裕陵)을 저주한 죄, 영창대군으로 하여금 역모를 꾀한 죄 등의 대목이 나와 있다. 결국 1618년(광해 10)에 대비의 호칭을 삭탈하고 서궁이라 칭하여 경운궁에 유폐되었다.

 

 이 후 1623년에 서인세력이 광해군을 폐위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옹립한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대왕대비의 지위에 올랐다. 인목왕후는 그 후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長)의 위치에 처하면서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금강산 유점사에 친필로 쓴 『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필적첩이 남아 있다. 1632년(인조 10)에 인경궁 흠명전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인목왕후 칠언시 ... 정치라는게 뭔지. . .

老牛用力 已多年 늙은 소 힘쓴 지 이미 여러해

領破皮穿 只愛眠 목 부러지고 가죽 헐었어도 잠만 잘 수 있다면 좋겠다.

犁耙已休 春雨足 쟁기질, 써레질 이미 끝나고 봄비도 충분한데

主人何苦 又加鞭 주인은 어찌하여 괴롭게도 또 채찍을 가하네

 

▼ 인목왕후릉의 석물들을 자세히 담아 보았습니다. 가까이서 보는 능은 처음이라서 그런지 석물들의 크기가 대단히 압도적이었습니다.

 

▼ 혼유석의 크기가 상당히 커 보였습니다

 

▼ 정자각을 내려다 보면서 릉을 나가려 합니다.

- 끝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