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들과 왕후의 무덤인 왕릉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구리시의 동구릉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이 있습니다. 건원릉은 고려말의 왕릉의 양식을 이어받아 웅장하게 조성하였으며, 태조 이후 왕릉의 표본이 되었던 무덤입니다. 다만 조선왕릉중에서 26대고종(홍릉)과 27대 순종(유릉)은 대한제국의 능으로 완전히 변모한 능입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조선왕조 어진[御眞]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태조의 어진입니다. 조선의 왕들중에서 12명의 왕들이 어진을 남겼으나, 6.25 한국전쟁때 피란중에 대부분 불타버려서 없어졌고, 1대 태조와 21대 영조, 22대 정조의 어진만 남았고 25대 철종의 어진은 다행이 얼굴 부분이 남았는데 26대 고종은 어진과 사진이 있고 27대 순종은 사진과 초상화가 남아 있습니다..
▼ 구리 동구릉 전체가 사적 제193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동구릉의 자료를 인용하여 올렸습니다
▼ 건원릉과 태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능의 구성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玄陵)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덮었는데, 『인조실록』에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청완(靑薍, 억새)을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 능의 역사
1408년(태종 8) 5월 24일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6월 28일에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 검암산에 능지를 정하였다. 7월 말을 기하여 산릉 공사를 시작한 후 9월 9일에 발인하였다. 산릉공사를 위하여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본인의 자리(신후지지)를 미리 마련해두었으나 태종은 태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 태조(太祖) 이야기
태조(재세 : 1335년 음력 10월 11일 ~ 1408년 음력 5월 24일, 재위 : 1392년 음력 7월 16일 ~ 1398년 음력 9월 5일)는 고려 공민왕대에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켜 벼슬길에 올랐고,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의 침입 시 공을 세워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다. 우왕 즉위 후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정벌이 단행되었는데, 이성계는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이 후 정권을 잡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신진사대부의 추대로 1392년 음력 7월 16일에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에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하였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내세웠으며,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제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으로 아들들의 권력 다툼을 보게 되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정종(定宗)에게 양위하였다. 태종 즉위 후엔 태상왕이 되었으며,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였다.
1408년(태종 8)에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태조고황제로 추존되었다.
▼ 조선을 건국하고 500여년을 왕국으로 이어가게 기틀을 마련했던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입니다.
▼ 건원릉(健元陵)의 능주인 태조(이성계)의 가계도를 꾸며서 올렸습니다. 가계도를 보면 태조의 가족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태조의 4대조 조상까지 추존왕으로 격상시켰는데 그만큼 정통성이 필요했던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태조는 정비 신의왕후 한씨(추존)와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있었는데, 정비 신의왕후는 향처로서 태조가 조선을 건국 하기 전에 사망하였으며, 신덕왕후 강씨는 경처로서 태조의 조선건국에 많은 힘을 보탰다고 합니다.
▼ 조선의 태조의 능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보이는 부분은 없습니다. 홍살문 앞에서 건원릉의 모습을 담아 봅니다.
▼ 홍살문 옆에는 박석으로 만든 네모난 단이 보이는데, 배위(拜位)라고 하며 왕이 능에 와서 처음으로 절을 하는 곳이며, 4번 절을 한다고 합니다.
▼ 왼쪽은 향로(香路) 하며, 제관들이 향과 축문을 들고 들어 가는 길이며, 왕은 물론 아무도 이길을 걸어서 들어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오른쪽은 어도(御路)이며, 왕이 걸어들어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현재 왕릉을 구경하는 일반인들은 어로를 따라서 들어가면 됩니다.
▼ 능지기가 거처하던 수복방입니다. 아마도 능지기가 거주 하지는 않고 근무 할 때만 쓰던 건물이었것 같습니다. 작은방에 온돌이 되어 있습니다.
▼ 왼쪽에는 수라간이 있습니다. 모든 제물들은 재실에서 미리 준비를 하지만, 배례청에 제물을 올리기 전에 준비하거나 제물을 데울때 사용하던 건물이랍니다.
▼ 월대위에 정자각이 잘 만들어저 있습니다. 단청도 했는데, 정자각을 만들면서 단청은 주로 절의 중들이 했다고 합니다.
▼ 태조의 건원릉에는 소전대(燒錢臺;돈을 태우는 곳?)라는 석물이 보이는데, 제례가 끝나고 혼령을 달래기 위해서 종이돈을 태우던 곳 이라고 합니다. 축문은 예감(瘞堪)에 묻던지 태웠다고 합니다. 소전대는 조선초기의 왕릉에서만 보이는데, 태조의 건원릉,태종의 헌릉, 신덕왕후의 정릉, 인종의 효릉에서만 있습니다. 조선 초기 이후(세종)에는 예감이 소전대 역활을 대신하는것으로 보입니다.
▼ 정자각의 여러 모습을 담아 두었습니다
▼ 바람막이는 다른 용어로 방풍널이라고 하는데, 정자각 북쪽을 제외한 삼면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 능침을 멀리서 바라보았습니다. 봉분이 하나인 단릉인데 여기에는 태종 이방원이 계모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미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다음은 그 이야기 입니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죽기 전부터 수릉에 관심을 두었으며, 대상지는 과주(果州)와 광주(廣州) 지역이다. 그러나 신덕왕후가 태조 5년 8월 13일 이득분의 집에서 훙거(薨去)하자 태조는 과주 또는 광주지역에 수릉을 조영하려던 계획을 취소하였다. 대신 계획을 변경하여 태조의 능 역시 다음 해 6년(1397) 1월 3일에 장례가 치러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 곁에 쌍릉으로 완성하고자 하였다.
신덕왕후의 능 역사가 한창일 때인 9월 28일에 태조의 수릉은 이미 정하여졌으며, 전라도의 역부(役夫)들이 수릉의 개석을 운반하다가 부상을 당한 자가 무려 89명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태조는 정릉과 동시에 자신의 수릉을 조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이 점은 11월 19일과 12월 24일에 “수릉에 거둥하였다”는 기록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따라서 태조의 수릉과 정릉은 단릉이 아닌 쌍릉의 형식으로 1397년에 정릉이 완성된 후 태조가 승하하는 1408년까지 약 11년이라는 기간 동안 존속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태조가 죽자 태종은 능의 위치를 새롭게 찾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대해 원평(原平)의 봉성(蓬城) 또는해풍의 행주(幸州) 등이 거론되다가 최종적으로는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김인귀(金仁貴)가 하륜에게 보고한 검암(儉巖)으로 결정된다.
이로 인해 쌍릉으로 조영하여 신덕왕후와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계획은 태종에 의해 이루어지 못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태조가 승하한 다음 태종은 태조의 소원처럼 정릉과 함께 쌍릉을 만들지 않고 단릉으로 조영하였으며, 정릉도 도성 밖으로 천장하고 말았다. 이처럼 건원릉이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일반적인 쌍릉형식이 아닌 단릉(單陵)으로 조영된 것은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태종의 증오가 깊었기 때문이다.
▼ 봉분에는 억새가 자라고 있습니다. 억새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건원릉의 봉분에는 잔디가 아니라 억새풀이 있는데, 이는 태조가 고향 함흥을 그리워하여 함흥의 억새풀로 무덤을 덮으라는 유언을 한 때문으로 전해진다. 건원릉의 억새풀에 대해서는 인조실록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홍서봉“건원릉의 사초(莎草)를 다시 고친 때가 없었는데, 지금 건원릉에서 아뢴 것을 보면 능 앞에 잡목들이 뿌리를 박아 점점 능 가까이로 뻗어난다고 합니다. 원래 태조의 유교(遺敎)를 따라 북도의 청완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무뿌리가 그렇다는 말을 듣고 어제 대신들과 논의해 보았는데, 모두 나무뿌리는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되고, 사초가 부족하다면 다른 사초를 써도 무방하다고 합니다.”
인조“한식에 쑥 뿌리 등을 제거할 때 나무뿌리까지 뽑아버리지 않고 나무가 큰 뒤에야 능 전체를 고치려고 하다니 매우 잘못된일 이다. 지금이라도 흙을 파서 뿌리를 잘라버리고 그 흙으로 다시 메우면 뿌리는 자연히 죽을 것이다. 예로부터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었기 때문이니 손을 대면 안된다.”
▼ 건원릉의 비각에는 신도비와 추승비가 있습니다
▼ 건원릉 신도비 정면과 후면의 모습입니다. 온통 글자로 새져겨 있는데, 태조와 조선건국의 모든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 추승비도 신도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추승비는 광무3년(고종36년)에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뀌면서 별로로 세웠습니다.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음역을 인용하여 보았습니다.
추숭비 - 음기(번역) : 대한 태조 고황제 건원릉
태조 지인 계운 응천 조통 광훈 영명 성문 신무 정의 광덕 고황제는 원나라 지원 원년인 을해년(충숙왕복위3, 1335) 10월 11일에 탄생하였다.
명나라 홍무 25년인 임신년(태조1, 1392) 7월 16일에 고려의 좌시중 배극렴 등이 고려의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대의를 내세워 왕으로 추대하자 마침내 송경의 수창궁에서 보위에 오르니, 4대를 왕으로 추존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고쳤다.
갑술년(태조3, 1394)에 춘추가 60세가 되자 기로소에 들어갔고 11월에는 도읍을 한양에 정하고 종묘를 세웠으며 무인년(태조7, 1398)에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태종년간 무자년(태종8, 1408) 5월 24일에 승하하니, 재위가 7년이고 상왕으로 있은 것이 10년이며 향년은 74세이다. 이해 9월 9일에 양주 검암산 계좌(북북동쪽을 등진 방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숙종년간 계해년(숙종9, 1683)에 ‘정의 광덕’이라는 시호를 더 올리고, 소자(고종)가 왕위를 이은지 9년째 되는 해는 개국한지 여덟 번째 되는 임신년(1872)이기에 ‘응천 조통 광훈 영명’이라는 존호를 추상하였다.
광무 3년인 기해년(고종36, 1899) 11월에 황제로 추존하여 공손히 ‘고황제’라는 시호를, ‘태조’라는 묘호를 올리고 환구단에 배향하였다.
이제 신도비 옆에 표석을 세우고 전면과 음기에 공손히 글을 써서 삼가 소자의 미미한 정성을 펼치노라.
광무 4년(고종37, 1900) ○월 ○일
▼ 자료들을 편집해서 건원릉에 이모저모를 올렸습니다
- 문석인과 무석인, 석마들의 대표사진을 모아서 올려봤습니다.
- 좌우의 망주석과 가운데의 장명등의 자료사진입니다.
- 봉분 주위를 지키는 석양과 석호의 모습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석양은 암놈입니다. 능마다 석양은 석공의 따라서 숫놈으로 조각하기도 하고 암놈으로 조각하기도 합니다.
- 겨울철에 눈이 내린 건원릉의 자료사진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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