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근교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절집을 꼽으라면, 당연히 남양주의 수종사(水鐘寺)입니다. 아름답다는 말에는 물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지역을 내려다보는 맛도 훌륭한 곳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수종사가 언제 창건됬는지 알 수 없으나, 1459년(세조5년) 세조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세조가 오대산에 갔다가 돌아올 때 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잠자리에서 종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그 종소리가 울린 근방의 사찰을 찾아보라고 하였는데, 강 건너 동굴에 십팔나한이 모셔져 있고, 동굴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물방울 소리가 종소리와 흡사하다고 보고 하였습니다.

 

이에 세조는 직접 동굴에 가보고, 신비스러운 현상으로 자신을 동굴까지 이끌게 한 부처님께 감동하여 사찰을 중창하게 하고 절의 이름을 물 수(水), 쇠북종(鐘), 수종사(水鍾寺)로 하였으며, 은행나무를 두그루 심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 수종사의 문화재중에서 아름다운 팔각5층석탑과, 정혜옹주 부도는 꼭 보시기 바랍니다


▼ 운길산 수종사의 일주문입니다. 수종사의 규모는 그렇게 크다고 볼 수는 없는데, 일주문은 크고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안내문을 자세히 보면 수종사가 왕건에 의해서 또는 세조에 의해서 수종사는라는 명칭을 얻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었습니다. 수종사 일원은 명승지입니다

 

▼ 일주문을 지나면 두기의 부도가 보이는데, 종탑형식의 부도로서, 왼쪽에는 수종사 중건에 힘쓰신 규원당대웅대선사지탑(葵圓堂大雄大禪師之塔), 오른쪽은 비구ㅇ담당동파지탑(比丘ㅇ潭堂動波之塔)라고 각서 되어 있는데, 동파 스님의 부도입니다

 

▼ 거대한 미륵불앞을 지나갑니다. 수종사의 단풍은 10월 말이나 되어야 좋을 듯합니다

 

▼ 낮게 지어진 문이어서 머리가 자연히 숙여집니다.

 

▼ [자료:방방콕콕] 지붕을 수리 중인지 방수포를 씌어나서 사진을 찍지 못하여서 자료사진으로 대신 봅니다

 

▼ 갑자기 가파르고 좁은 돌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면 해탈문을 만나는데, 무슨뜻인지 알듯 말듯하게 느껴집니다.

 

▼ 수종사는 가파른 산 중턱에 들어섰기 때문에 불전(佛殿)들이 산 허리에 붙어서 길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 단청이 없는 유일한 집은 삼정헌(三鼎軒) 현판을 달았습니다. 선(禪), 시(詩), 다(茶)가 하나로 통하는 찻집이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보면 될 듯한데, 봉선사의 월운스님께서 지으셨다고합니다.

 

[자료:방방콕콕]  역광이 심해서 자료사진으로 삼정헌을 보겠습니다

 

▼ 거대한 약사불이며,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 광배가 너무 크게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약사여래좌불의 작품이 묻혀 보입니다

 

▼ 응진전으로 올라가 봅니다. 응진전(應應眞殿)은 석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경지에 오른 아라한을 모시는데, 보통 16나한 또는 오백나한을 모시며 나한전이라고도 합니다. (나한은 아라한의 줄임말)

 

▼ 삼존불로서 중앙에 석모니불, 양쪽에는 보살을 모시고, 양옆으로 16 나한을 모셨습니다. 후불 탱화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입니다.

 

▼ 응진전 앞에서 보는 수종사 중심부입니다.

 

▼ 산령각까지 올라가 봅니다. 보통은 산신각으로도 합니다.

 

▼ 산령각앞에서 보는 모습은 최고의 모습입니다. 저 멀리 두물머리가 보입니다.

 

▼ 삼정헌옆에서 보는 응진전, 산령각등의 모습입니다.

 

▼ 네칸짜리 절집에 걸려 있는 현판을 보니 선불장(選佛場)이라고 붙어 있는데, 보통의 절집에서는 보기 힘든 현판입니다. 보통은 당(堂)을 붙이는데, 장(場)을 붙여서 선불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직역을 하면 부처를 고른다?라는 뜻인데, 스님들의 공부방으로 쓰이는 듯합니다.

 

보통은 조선식의 낮은 절집을 헐고 높고, 화려하게 다시 짓는데, 수종사의 불당들은 아직도 나즈막한 불당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 가끔 오래된 절집에 가보면 가끔 보이는데 무슨 돌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찻잎을 씻을때 쓰는 도구인 듯싶습니다

 

▼ 대웅전방향입니다. 

 

▼ 수종사의 대웅전 옆에 있는 이 세 개의 유물들 중에서 왼쪽 부도(승탑)와 오른쪽의 팔각오층석탑은 아주 귀중한 문화재 입니다(따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 넓은 공터는 수종사에서 큰 법회를 열거나, 관광객들이 새해 해맞이를 하는 곳인 듯합니다

 

▼ 종각은 보이는데 종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종각을 새로 짓고 옮긴 듯합니다.

 

▼ 텅 빈 종각에는 종을 걸었던 고리가 남아 있습니다.

 

[자료:한국관광공사]  예전의 사진에서 종각을 봅니다

 

▼ 양반집 사랑채처럼 보이는 건물에 경학원(經學院) 현판을 달았습니다. 스님들의 공부방인 듯 보입니다.

 

▼ 경학원 앞의 좁고 기다란 길을 내려갑니다.

 

[자료:방방콕콕] 자료사진에서 보면 예전에는 해탈문이 동쪽에 있었습니다

 

▼ 길 끝에서 보는 모습입니다.

 

▼ 길 끝에는 종각이 보입니다. 경학원 앞의 종각에서 옮겨온 것인지 아니면 새로 범종을 제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길 끝에는 아주 오래돼 보이는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세조가 심었다는 그 은행나무입니다.

 

▼ 종각은 새로 지은 듯이 아주 깨끗합니다

 

▼ 범종 표면에는 나한들이 새겨져 있는데 보통 비천상을 새기는 종과는 다르게 하였는데, 아마도 세조가 보았다는 18 나한상을 새긴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지금의 종은 새로 만든 것이며, 예전의 종은 비천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새로 조성된 범종은 ‘운길산 수종사 나한신종(雲吉山 水鐘寺 羅漢神鐘)’으로 종명을 정하고, 좌우 측면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18나한을 9명씩 나누어 넣고 동자승 1명도 새겨넣었습니다.

 

[자료:방방콕콕] 자료사진에서 보는 종의 표면에는 비천상이 새겨 있는 것으로 봐서 지금의 종은 새로 만든 것도 봐야 합니다

 

▼ 이 은행나무는 세조가 심어 었다고 하며, 수령은 오백 년 이상이라고 합니다. 세조가 1459년에 수종사에 들려서 나무를 심었으므로 아주 오래된 은행나무가 맞는 듯합니다.

 

▼ 여기 이 은행나무 아래에 앉아서 바라보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보는 모습은 대단히 좋습니다.

 

[자료:지역N문화]  하늘에서 보는 수종사의 모습입니다

 

▼ 둥그렇고 까만돌에는 수종사 사적기가 적혀 있는데, 반사가 심해 읽기가 무척 불편해서 좀 인용해 보았는데, 아쉽게도 오타를 그대로 돌에 새긴것이 아쉽습니다

 

수종사 사적기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이곳 운길산 수종사는 멀리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는 옛 가람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상서로운 기운을 좇아 이곳에 이르러 구리종을 얻음으로써 부처님의 혜광을 통해 고려를 건국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1)1439(세종 21년)에 이르러 세종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이 정의옹주의 부도를 세우고 금제 9층탑 수정 사리함(사리 14과)을 청자 항아리에 담아 부도안에 모셨다 1458(세조 4년) 세조가 두물머리에서 머물다 새벽에 들려오는 종소리를 따라 올라와 보니 그 종소리는 다름 아닌 바위굴 속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세조는 굴속에서 18나한을 발견하고 5층 돌계단을 쌓았으며 팔도방백에 중창을 명하였다. 도랑은 이러한 연유에 의해 수종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때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고 다음 해인 1459년에 수종사 탑을 건립하였다.

 

1493 (성종 24년) 후궁 명빈 김씨가 목제불감과설법도가 그려진 금동불감에 금동불보살상 등 14좌를 봉안하고 후궁들의 발원문도 함께 넣어 탑안에 모셨다. ※2)1628(인조 6년) 정의 대왕대비가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시주하였으며 1890년 주지 풍계 혜일과 고종황제로부터 두차례 시주를 받아 수종사를 중창하였다. 이때 불상에 빛이 발하였다. 

 

1939년 일조태욱화상이 중수하였으나 6·25전쟁 때 불에 탔다. 1974년 혜광화상 이 대웅보전을, 1981년 규원당 대웅화상이 약사전과 종각을 지었다. 1999년부터 금해당 동산은 응진전, 선불장, 삼정헌, 경학원, 미륵불, 일주문 등을 세워 사격을 완성하며 서거정이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찬탄했던 절의 풍광을 다시 복원하였다.

 

수종사는 조선후기 초의, 다산, 추사를 비롯한 다선묵객들이 당색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함께 모여 담론을 했던 사회변혁의 꿈이 깃든 곳이다. 후인을 위해 수종사와 함께했던 선인의 발자취를 따라 사적기를 적는다.
불기 2551년(서기 2007년) 동산 짓고 선주석 쓰다.

 

※1) 1439(세종 21년)에 이르러 세종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이 정의옹주정혜옹주를 잘 못 새긴것으로 보입니다

※2) 1628(인조 6년) 정의 대왕대비가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시주하였으며, 정의대왕대비는 인목대비라고도 합니다

 

[자료사진] 한음 이덕형 선생의 시가 수종사에 있는데, 이덕형선생의 집이 수종사 아래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덕현 선생은 임진왜란 때 청원사로 명나라에 가서 파병을 성사시키고 명나라 장수와 함께 한양을 되찾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전란 중에는 조선과 명나라 간의 관계와 상황을 조정하였고 전후에는 전란 수습에 힘을 다하였습니다. 광해군 때에는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버리고 은거해 있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자료:Wikiwand] 한음 이덕형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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