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에 황복사 터(皇福寺址)로 전해오는 경주시 구황동(九黃洞) 절터의 삼층석탑을 해체ㆍ복원할 때 2층 지붕돌 상부의 사리공에서 두 점의 불상이 발견되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에서 황복사 터 삼층석탑 사리장엄구를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나무위키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1942년 해체, 복원 시 발견 당시에는 금제 불상 2점, 금제와 은제 방형 상자, 금제와 은제 고배, 유리판,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석탑 사리공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사리외함 측면에 점선으로 새겨진 수많은 소탑(小塔) 모양을 통해 704년 한역된 『다라니경』이 신라로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신라 통일기에 왕실에서 발원하여 만든 사리장엄구 2건의 전시도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경주 구황동 석탑(전 황복사터 삼층석탑)에서 나온 국보 79호 금제 여래좌상과 금동 사리 외함의 뚜껑입니다.

 

 

▼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황복사 터의 삼층석탑이며, 자료에 의하면 2층 지붕돌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신문왕의 사후인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 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추가하여 다시 탑 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습니다. 

 

그 후 성덕왕이 돌아간 신문왕과 신문왕비와 효소왕을 위해 사리와 불상 다라니를 탑 속에 봉안하고 자료를 새겨 남겼습니다. 

 

1942년 착수된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불상이 담겨있던 금동제 사리외함의 뚜껑 안쪽에는 해서체로 1행에 20자씩 총 18행의 명문과 99기의 작은 탑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명문에 따르면 천수(天授) 3년(692) 신문왕(神文王;681~692)이 세상을 떠나자 신목태후(神穆太后)가 왕위를 이은 아들 효소왕(孝昭王;692~702)과 함께 종묘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선원가람에 삼층석탑을 세웠습니다.

 

성력(聖曆) 3년(700) 신목태후가 세상을 떠나고 대족(大足) 2년(702) 효소왕이 승하하자 뒤를 이은 성덕왕(聖德王;702~737)이 신룡(神龍) 2년(706)에 불사리 4과(顆)와 6촌(寸) 크기의 순금제 아미타상 1구, 그리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권을 석탑 2층에 안치하면서 선왕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습니다.

 

다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실체가 없는데 아마도 일제가 일본으로 반출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두 점의 불상 가운데 하나는 입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좌상이지만 명문에는 불상의 자세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불상의 제작 연대나 안치 순서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두 불상의 양식이나 형식을 살펴보면 입상은 692년 석탑 건립시기에 봉안되고, 좌상은 706년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 광배와 불상, 그리고 대좌가 모두 별도로 제작되었는데 머리 주위의 빛을 형상화한 두광(頭光)과 신체 주위의 빛을 형상화한 신광(身光)이 하나의 광배로 표현되었습니다.

 

두광 부분에는 연꽃잎이 덧대어 있고 신광 중앙에는 넝쿨 문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들 주변에는 넝쿨 문양과 화염문이 정교하게 맞새김되어 있습니다. 대좌는 삼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형이라는 점 역시 독특합니다.

 

▼ 금동외함의 네 면에는 소탑 99기를 점선묘로 그렸습니다. 불교경전의 법식에 따르면 탑을 만들때  소탑 99개를 만들고 그 속에 필사한 다라니를 넣어 탑에 봉안하면 99억 개의 탑을 조성한 것과 같이 공덕이 쌓인다고 한다.

 

황복사 석탑금동사리함(皇福寺 石塔金銅舍利函)
이 명문은 706년(성덕왕(聖德王) 5)에 조성되었다. 1942년 경주시 구황동 황복사지 석탑을 해체 복원할 때 탑의 2층 탑신 윗면에 있는 방형 사리공(舍利孔)에서 금제불상 2구, 사리, 구슬, 금은제 고배 등이 출토될 때 함께 발견된 사리함에 새겨진 명문이다.  

황복사지 석탑은 신문왕의 사후에 신문왕비와 효소왕이 건립한 것인데, 그 후 성덕왕이 돌아간 신문왕과 신문왕비와 효소왕을 위해 사리와 불상 다라니를 탑 속에 봉안하고 이 자료를 새겨 남겼다. 

사리함은 안쪽에서부터 유리병-금합-은합-금동외함의 순서로 이루어졌는데, 이 명문은 금동외함의 뚜껑에 새긴 것이다. 명문은 사방으로 칸을 그어 칸마다 한 자씩 새긴 것으로 전체 18행에 1행 20자로 쓴 해서체로 자경은 1cm이다. 

그리고 금동외함의 네 면에는 소탑 99기를 점선묘로 그렸다. 황복사지 석탑은 경주시 구황동 현지에 있으며, 사리함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명문의 찬자와 서자는 미상이다. 


명문 내용은 신문왕의 승하 사실, 신문왕비와 효소왕의 삼층석탑 건립, 신문왕비인 신목왕후와 효소왕이 차례로 승하, 성덕왕이 석탑에 사리 등을 봉안한 사실, 그리고 불사 기원문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으며, 맨 마지막에 사주(寺主) 이하 조성 담당자가 적혀 있다. 

이 명문 자료는 702년에 한역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곧바로 신라에 유입되어 그 내용을 기본으로 706년에 사리신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 명문에 밝힌 조성 경위와 조성에 참여한 인물들을 통해 성덕왕의 즉위와 관련하여 신문왕-효소왕-성덕왕대의 정치 세력의 변화를 추적하는 데 유익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사리함은 2중으로 되어 있으며, 금제함에 사리를 넣은 다음에 은제사리함에 넣었습니다

 

▼ 굽다리잔은 금제 2점, 은제2점입니다. 사리외함에 향, 꽃, 물, 쌀등의 곡식을 공양한 것으로 보입니다

 

▼ 유리구슬을 줄에 꿰어 사리외함에 넣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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