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고려의 금은동의 세공(細工) 작품을 모아 놓은 부스(Booth)에서는 선조들이 혼신을 다해서 만들어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대한제국시기에 만들어진 은제 소꿉놀이그릇인데 혹시 고종이 덕혜옹주에 주려고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일반 생활용품과 비교해도 흠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소꿉도구인데, 대한제국시기에 왕실에서 만들어졌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자료 - |
높이 2.8센티미터부터 6.7센티미터 사이의 이 은제 장식품들은 ‘이왕직미술품제작소(李王職美術品製作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왕직 미술품 제작소는 1908년 대한제국 황실에서 필요한 전통공예품 제작을 위해 황실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한성미술품제작소(漢城美術品製作所)’로 불리었으나, 1911년부터 이왕직미술품 제작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22년 민간에게 매각된 후 1936년 해산 때까지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여기서 제작한 공계품에는 황실의 표상인 이화무늬(李花文)가 장식되었다. 다섯 장의 꽃잎 안에 수술을 세 개씩 표시한 이화무늬는 주로 음각으로 나타냈으나, 일부는 따로 만들어 붙이기도 하였다. 이화무늬와는 별도로 기물 바닥에 ‘美’라는 명문을 찍어 미술품제작소의 제작품임을 밝혔다. 일상 생황용기나 제기를 작게 만든 이 장식품 바닥에는 세 가지 다른 명문이 찍혀있다. 먼저 앞줄 왼쪽의 궤(簋)에는 ‘한성미술(漢城美術)’이, 나머지 두 점에는 ‘한미(韓美)’가 있어 한성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도 ‘漢城美術’ 또는 ‘韓美’라는 명문이 찍힌 은제 발(운1374)과 이화 무늬 잔(운1083)이 소장되어 있다. 높이 2.1센티미터의 이화무늬 잔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손자인 이준용(李埈鎔, 1870~1917)의 묘에서 출토된 명기(明器)이다. 따라서 이러한 장식용 소품들이 명기로도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두, 세번째 줄의 장식품에는 ‘미(美)’, 네 번째 줄의 장식품에는 미(美)가 찍혀 있어 모두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들었음을 보여 준다. 1919년 개정된 ‘이왕직소관미술품제작소 제작목록’ 중 ‘금은세공품부’에 ‘기념품용소물(紀念品用小物)’이 5원(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러한 은제품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는 은제 장식품 이외에도 중국의 고대 청동기를 모방한 고동기(古董器), 즉 작(爵)이나 향로를 만들었다. 같은 제작품 목록의 ‘주조품부’에는 ‘청동제 작’이 16원(圓)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 작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이 아니라,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으로 주조되어 특이하다. 몸체 바닥에는 美가 찍혀 있다. |
▼ 원빈홍씨(元嬪洪氏)는, 홍국영의 나이 어린 여동생이었으며, 오빠인 홍국영의 지나친 권력욕심에 정략적으로 어린 나이(12세)에 정조의 후궁이 되었으나, 1년 만에 사망하였는데, 홍국영의 욕심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 원빈홍씨묘(元嬪洪氏墓)를 조성할 때 각종 껴묻거리(부장품)를 함께 묻었는데, 왕이나 왕비도 이렇게 화려한 껴묻거리를 묻지는 않았는데, 원빈홍씨는 특별하게 화려한 화장품그릇을 많이 묻었습니다.
아무래도 왕실에서 부장품을 묻었다기보다는 홍국영이 챙겨서 묻어준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있었으나 1950년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였으며, 묘를 이장할 때 부장품이 발굴된 것으로 보입니다
원빈홍씨의 묘는 지금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묘 이름을 인명원(仁明園)으로 지었으나 후궁의 묘에 왕세자의 묘를 가리키는 '원( 園) '의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원빈홍씨묘([元嬪洪氏墓)의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 옻칠을 한 나무그릇처럼 보이는데, 붉은색의 유리그릇이며, 내부에는 연한백색의 분가루가 있었습니다.
▼ 壽福寶盡(수복보진)이 새겨진 은제항아리입니다
▼ 칠보장식팔각그릇이며, 팔각면마다 팔괘(八卦)가 새겨진 은제화장품 그릇이며, 그릇 안에서 흰색의 분가루가 있었습니다
▼ 壽福康寧(수복강녕)이 새겨진 은제항아리이며, 높이 6.1cm, 입지름 4.5cm, 몸통지름 7.6cm의 작은 화장품 그릇입니다. 국자가 달려있어서 내용물(분가루)을 풀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원빈홍씨의 묘애서 발굴된 부장품에는 도자기도 있었습니다(나무위키에서 인용)
▼ 숙신공주는 설명에서 보면 봉림대군(후에 효종)이 청나라 선양에 볼모로 갈 때 동행하다가 3살때 병사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사실은 숙신공주가 3살때는, 봉림대군이 청나라(심양)에 갈때 부인만 대동하였고, 딸들은 조선에 남아, 인조의 보살핌으로 자랐으며, 나이도 1634년 출생하여 1645년인 12세에 사망하였습니다.
봉림대군일 때 숙신공주의 신분은 공주(公主)가 아닌 군주(郡主)였으며, 정식으로 공주의 신분으로 승격은 숙신공주 사후 30년 후인 숙종원년에 숙신공주(淑愼公主)’로 추증되었습니다.
▼ 숙신공주(淑愼公主;1635~1637)는 효종이 봉림대군일 때 얻은 첫째 딸이었으나, 12세에 병사하였습니다. 세 살 때 아버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8년 만에 돌아왔으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시간도 없이 병사하였습니다
▼ 신선무늬가 새겨진 화장품 그릇과 과일무늬 화장품 그릇이 출토되었는데, 과일무늬 화장품 그릇에는 연백(鉛白)으로 보이는 분가루가 남아 있었습니다.
▼ 숙신공주의 묘에서 출토된 화장용구. 뚜껑 윗면에는 학이 조각되어 있으며, 몸체에는 여지, 석류, 복숭아, 감 등으로 보이는 과일의 가지를 각각 네 부분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입구에는 연꽃잎을 두르고 바탕에는 구슬 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넣어 매우 화려한 느낌을 주고 있다._나무위키
▼ 숙신공주의 묘에서 출토되었으며, 은으로 만든 작은 화장용기로, 조선시대 효종의 첫째 공주인 숙신공주의 묘에서 출토되었다.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절경과 선인들이 소나무 아래에서 장기를 두는 한가로운 모습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당시의 뛰어난 미적 감각과 금속공예 기술을 엿볼 수 있다. 뚜껑에는 안의 내용물을 쉽게 퍼 담을 수 있는 숟가락이 붙어 있으며, 열면서 바로 내용물을 풀 수 있도록 고안해 낸 점도 흥미롭다._국립중앙박물관
▼ 탁잔(托盞)은 액체(물, 술, 차)를 마시는 데 사용한 그릇으로 액체를 담는 잔과 잔을 받치는 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탁잔은 보통 주전자와 세트를 이루어 사용되며, 잔의 크기에 따라 찻잔과 술잔으로 구분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차를 마시는 데 사용한 탁잔은 잔의 크기가 크고, 술을 마시는 데 사용하던 탁잔은 잔의 크기가 그보다 작습니다.
차는 따뜻하게 마시므로 찻잔은 열전도가 잘 되는 금속보다는 자기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금속은 열전도가 잘되기 때문에 뜨거운 음료보다는 차거나 미지근한 음료를 마시는 데 사용했을 것입니다.
▼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1899호) 은제도금탁잔은 꽃잎이 6개 달린 꽃 모양 받침과 잔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윗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탁은 아래에 6개의 꽃잎 모양의 굽이 달려 있으며, 굽 아랫부분에는 음각으로 꽃무늬를 새겼습니다.
전 윗면에는 연화당초무늬를 음각으로 새겼고, 안쪽으로 파인 잔 받침 주위로는 짧아진 연화당초무늬가 같은 방식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잔을 올려놓는 괴임에는 가장 화려한 무늬가 다양한 기법으로 새겨졌는데, 괴임의 측면은 돌출된 릉(稜)으로 꽃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돋을새김[打出]으로 꽃송이를 화려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괴임의 윗면은 돋을새김 한 연판무늬를 외곽에 두고 그 안에 연꽃무늬를 표현하였습니다. 6개 꽃잎 모양의 잔은 굽과 몸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굽의 아랫부분에는 받침과 같은 꽃무늬가 새겨져 있어 무늬의 통일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잔의 몸체는 바깥 면에 음각으로 모란무늬를 표현하였고, 꽃 모양을 만들기 위해 음각으로 만든 골에도 대칭으로 절지무늬를 새겼으며, 입 부분에도 꽃무늬를 새겼습니다. 잔의 안쪽 바닥에는 중앙에 연꽃무늬를 새기고 그 주위를 잎무늬로 감쌌습니다.
▼ 고려 숙종(고려 15대)의 넷째 딸인 복령궁주(福寧宮主)가 사용하던 은그릇입니다.
복령궁주는 38세에 사망(1096~1133년)하였으며, 은그릇은 복령궁주가 궁중에서 사용하던 그릇이 아니고, 혼인하던 집에서 사용하던 그릇일 수 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 거울걸이에 거울을 걸어놓은 그림
▼ 거울을 걸어놓는 걸이로 타출, 음각, 도금 등 다양한 기법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대표적인 생활 공예품이다. 긴 막대모양의 나무로 심을 만들고 겉을 도금한 은판으로 감쌌으며, 한글 자음의 ′ㅍ′자 모양으로 두 개의 막대를 크고 작게 하나씩 만들어서 작은 것을 큰 것 안에 넣어 못으로 고정시켰는데 연결 부분이 움직이게 되어 있어 높이와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
목심을 둘러싼 은제 도금판은 모란 넝쿨무늬를 선으로 새겨 장식했고, 막대의 가로세로 양끝은 은제 도금판을 덧대어 장식하였다. 구름 속을 날아다니는 새들이 표현된 부분은 안에서 바깥쪽으로 두드려 무늬를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타출(打出) 기법을 이용하여 정교한 입체감과 화려함을 더해준다. 걸이의 맨 위를 보면 연꽃 위 구름 사이로 봉황새가 앉아 있는데 이는 거울을 거는 고리이다._국립중앙박물관
※ 통일신라시기의 작품인 금은평탈거울(金銀裝平脫鏡)입니다.
평탈기법은 금속판을 문양대로 오려서 옻칠바탕에 붙여 장식하는 기법으로 나전패 대신에 금속판을 사용했을 뿐 그 원리는 나전기법과 동일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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