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는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각 지방에 설립되었던 관립교육기관입니다.

 

이 향교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건립여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설립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된 결성향교는 여러차례의 중개수가 있었습니다.

 

1674년(현종 15년) 현감 남종표가 중수하였으며, 1699년(숙종 25년)의 중건과, 1763년(영조 39)의 개수, 1828년(순조 28년)의 개수, 1841년(헌종 7년)의 개수, 1865년(고종 2년)의 개수가 있었습니다.

 

1914년과 1922년에는 결성지역의 유림이 모은 기금에 의한 개수가 있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1959년 당시 홍성군수 이원양에 의해서 개수가 있었고, 1976년 결성지역 유림 115명의 성금으로 개수가 있었으며, 1983년 군수 김선규에 의한 개수, 1987년의 개수, 1995년 전교(典校;향교책임자) 최동호에 의한 개수가 있었습니다

_홍성군 홈폐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자료사진은 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지방도로에서 바라보면 결성향교의 전체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향교는 나라에서 설립한 중등교육기관입니다. 성균관은 향교 보다 상위의 국립대학격인 교육기관이며, 사립교육기관으로는 서당과 서원이 있습니다.

 

『향교란 시골에 있는 문묘(文廟)와 그곳에 부속된 옛날의 학교, 일명 교궁(校宮), 재궁(齋宮), 학궁(學宮), 향학(鄕學)이라 하고,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에 계승된 관학으로서의 지방교육기관이다』라고 사전적 의미로 정의하고 있으며, 『牧民心書』에는 “옛날의 소위 학교는 예(禮)를 익히고 락(樂)을 익히는 것이다…”라고 의미를 두고 있다.
향교의 향(鄕)은 서울을 제외한 행정구역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고 교(校)는 학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즉 ‘지방의 학교’라고 할 수 있다._서원연합회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지금의 결성향교는 2011년 9월에 개축이 있었는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 홍살문이 있습니다. 홍살문은 주로 제향시설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우는데, 향교는 제향및 교육기관의 복합이므로 홍살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 향교란 무엇인가?

지방향교의 설립은 고려 태조 13년(930)에 평양에 학교를 세워 6부생을 가르치고 문묘(文廟)를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것이 시초라고 합니다.

 

향교라고 하는 명칭을 사용한 시기는 1220년(고려 고종 8)에 창건한 백령향교(白翎鄕校) 처음이라고 하고 이후 대체적인 이름으로 불리어 왔으나 학서(學序), 상숙(庠塾), 주학(州學), 학교(學校), 이상(里庠), 향학(鄕學), 학궁(學宮) 등으로 불리워 지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교육의 중앙집권적 경향은 향교 운영에서도 나타나는데, 수령에게 향교의 교수와 학생에 대한 감독권을 부여함으로써 교육의 중앙 집권화를 기도하였습니다

 

양반들에게는 향교의 미미한 교육수준에 그닺 인기가 없었으나, 중인이나 평민에 해당하는 비양반 계층에게 향교는 신분상승의 통로로 적극 활용되었으며, 교육 외에 향교의 주요 기능이었던 의례적 기능 역시 꾸준히 유지되었습니다

 

향교의 교생에게는 군역면제(軍役免除)라는 커다란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중인이나 평민들은 군역 면제를 통한 신분 상승을 목적으로 향교 교생이 되고자 하였는데, 반면, 양반들은 굳이 향교 교생이 되지 않더라도 군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육의 질도 담보되지 않으며, 비양반 계층이 교생으로 들어오면서 향교의 구성원의 신분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향교가 태조부터 세종조 사이에 건립을 보게 되었는데, 세종 17년(1488)까지는 전국에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체제를 갖추어 8개도에 329개소의 향교가 설립되어 거의 모든 군·현에 향교가 분포되고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1918년에는 335개소의 향교가 기록되고 있다.

 

목사가 부임을 하면 3일 안에 향교의 대성전에 참배하고 명륜당에 선비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관찰사가 주·현을 순시할 때도 향교에 들려 강론을 하였습니다.

 

현대의 향교는 아직도 유교이념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전국에 231개의 향교가 운영되고 있습니다._이상은 매일종교신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향교와 서원은 근 800여년간 국가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습니다


▼ 결성향교는 설립초기부터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 결성향교의 외삼문입니다. 문의 상태로 보면 최근에 지은듯한 모습으로 아주 깨끗합니다.

[자료사진]

 

▼ 외삼문으로 들어 서면 정면으로 명륜당이 보입니다. 명륜당 현판은 건물 앞 정면에 걸려 있습니다.

 

▼ 명륜당은 유생들이 강학을 하던곳이며, 고을의 크기에 따라 학생 수 가 정해져 있었는데, 부(府)· 대도후부(大都護府)·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郡)에는 50명, 현(縣)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였는데, 결성향교는 30명의 정원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향교에는 기본적인 구성이 명륜당, 동재,서재, 대성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모에 따라서 더 많은 건물들이 추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 가운데가 명륜당이며, 우측이 동재(東齋), 좌측이 서재(西齋)이며, 용도는 유생들의 기숙사로 쓰이는 방이며, 동재에는 위계질서에 따라서 선배유생들이 사용하고, 후배유생들은 서재에서 기숙합니다.

현재 명륜당에는 결성향교를 관리 하시분들이 기거하는 중 입니다.

 

▼ 동쪽의 동재로 들어 가는 문입니다.

 

▼ 명륜당과 동재의 공간 입니다. 북이 걸려 있는데, 종 대신 수업의 시간을 알리는 북 인 듯 합니다

 

▼ 명륜당과 마주 보는 내삼문이며, 내삼문을 지나 가면 제향공간인 대성전 입니다.

 

▼ 명륜당 좌측으로 서재가 보이고,

 

▼ 명륜당 우측으로는 동재가 보입니다

 

▼ 서재와 명륜당과의 공간입니다

 

▼ 명륜당 앞에서 바라보는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입니다

 

▼ [자료사진] 내삼문에서 보는 명륜당입니다.

 

▼ 내삼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보이는 제기고 입니다. 제향 할때 쓰이는 제기들을 보관하는 곳 입니다

 

▼ 대성전입니다. 보통은 대성전을 개방하지 않는데, 결성향교는 개방하고 있어서 내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자료사진] 대성전

 

▼ 대성전은 내부에는 공자와 4명의 제자인 5성(五聖)과 송조4현(宋朝四賢) 및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고 합니다

 

매년 2회 제사를 지내는데, 아직도 우리 나라에는 유교의 흔적은 상당히 견고 합니다.

 

▼ 대성전 앞에서 바라보는 내삼문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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