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고려)에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하였으며, 갑곶이라 이름은 원래 갑고지라고 전해오는 곳에 있는 갑곶돈대는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숙종5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때는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갑곶나루터를 통하여 강화성을 점령하였습니다.
김포의 문수산성이 있는 문수진(文殊鎭)의 나루터와 강화 제물진의 갑곶나루터는 배를 이용한 왕래가 있었던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지금의 갑곶돈대는 멸실되어 흔적을 찾기 어려우며 그나마 갑곶돈대의 일부만 치성을 복원하여 갑곶돈대라고 하고 있습니다._ 사진※ 자료는 강화군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갑곶돈대라고 소개하는 곳 입니다만, 사실은 갑곶돈대와 연결된 강화외성의 치성일 뿐 인 곳 입니다. 갑곶돈대는 (구)강화대교를 건설하면서 멸실되어 억지로 지금의 치성을 갑곶돈대라고 홍보하고 있습니다만, 좀 낮 간지러운 현실입니다.
▼ 강화의 부분적인 지도에 제물진의 소속돈대를 나타낸 지도이며, 갑곶돈대, 염주돈대, 제승돈대, 망해돈대등 4개의 돈대로 이루어진 제물진이며, 지금의 강화내성(강화유수,강화읍)과 아주 가까워 위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갑곶돈대는 강화대교를 건설하면서 멸실되어 없어졌고, 나머지 3개의 돈대도 훼손상태가 심하여 흔적만 있다고 합니다.
▼ 갑곶돈대를 보려면 강화전쟁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먼저 안내판에 쓰여진 갑곶돈대의 내용을 읽어보고 들어 갑니다
▼ 매표소입니다. 강화의 유명한 관광지를 두루두루 보는 경우에는, 통합발매를 하면 장소마다 번거럽게 표를 사지 않아도 됩니다
▼ 금속활자의 종류마다 글씨체를 비교하여 만들어 놓았습니다. 1,450년 독일의 구텐베르그가 만든것이 최초의 금속활자라지만 강화는 그보다 216년이나 앞선 1,234(고려 고종21년) 전란중이던 이곳 강화에서 당시 무신정권의 권신, 최이가 주자로 만들어 고금상정예문 50권 28부를 찍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화에서는 이를 입증하고자 비석을 새워 자랑스런 역사를 후대에 남기고자 하였습니다. 글씨를 자세히 보면 활자의 종류마다 글씨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강화도 여기 저기에 세워져 있던 여러 종류의 비석들을 한 곳 에 모아 놓은 곳 입니다
▼ 맨 앞에 보이는 비석이 금표 인데, 금표는 한마디로 주로 자연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으려고 일정한 지역을 지정한 지금의 그린벨트 안내표시입니다.
금강소나무가 많은 지역은 궁궐의 보수나, 신축등에 소나무를 사용하려고 일정한 지역에 금표를 설치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일반들이 나무를 베거나 무단 출입을 할 경우 엄벌에 처했다고 합니다.
▼ 하늘에서 보는 비석군의 모습입니다._자료사진은 강화군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다른 비석도 보이는데, 강화순국선열비 입니다. 좌측에는 병자호란, 신미양요때의 충신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는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데, 강화 출신 6.25전사자들의 이름입니다. 오른쪽에는 아무 이름도 없는데, 미래에 강화의 애국자들의 이름이 새겨질 공간이라고 합니다.
▼ 강화전쟁박물관은 2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부에서 사진을 찍기가 불편해서 리플릿을 Scan해서 자세하게 알아 보았습니다.
▼ 돈대를 발굴하는 사업응 지금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건평돈대를 발굴하면서 나온 불강기포와 기타 유물들의 사진이며, 건평돈대는 지금(2019.10현재)도 복원공사중 입니다.
▼ 2층 난간위에 설치된 검차는 처음 보는 검차라는 희한한 무기였습니다.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긍금한 놈이었습니다. 오른쪽의 포는 중포라고 하는데, 조선 후기때 사용하던 포이며 일반적인 홍이포 입니다.
▼ 조선의 개인용 무기는 크게 검, 활, 화승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활은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 활은 조선시대때 중요한 무기중의 하나였는데,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어느 정도 위력을 보여줬습니다. 그 중에서도 활은 정말 중요한 무기였습니다.
▼ 1901년 강화에서 제작된 화승총이며, 약 10만정 이상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 3층에서의 촬영 사진들을 올려보았는데, 신미양요때의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 어재연 사명기는 처음보는 유물인데, 병마절도사의 위엄이 느껴지는 깃발이었고 특이한 것이 오방색 꼬리가 달려있었습니다.
▼ 갑곶돈대에서 사용하던 포로 보이는, 구경 100mm의 대포가 하나 전시되어 있습니다만, 자료에는 갑곶진에 대포부대가 있었다는 자료는 없었습니다. 다만 인터넷 자료에는 대포8문이 배치되어 있다고 설명이 있습니다.
▼ 이섭정(利涉亭)이 최초로 건축된 것은 고려 때 몽고와의 협상에서 우리측이 이롭게 되기를 염원하고 외교 사신들을 영접, 환송하기 위해 지은 강화도 관문의 팔각정이었다고 합니다. 무너진 정자를 1398년(태조 7년) 강화부사 이성(李晟)이 옛 진해루 옆에 세웠다고 합니다. 현재의 이섭정은 1976년 다시 지은 것 입니다.
▼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성벽은 원래의 갑곶돈대와 이어진 강화외성의 성벽을 복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 강화 갑곶돈대로 소개 되고 잇는 곳 입니다만, 사실은 원래의 갑곶돈대는 지금의 (구)강화대교가 깔고 있습니다.
▼ (구)강화대교의 모습입니다. 이 다리는 1967년 12월 완공 되었지만, 갑곶돈대를 훼손하며 지어졌습니다
▼ 강화옛지도에서 보는 갑곶돈대가 소속되어 있는 제물진의 모습입니다. 제물진은 특이하게 자체의 성곽이 있었습니다
▼ 1876년 일본인이 강화해협의 배안에서 찍은 갑곶돈대의 치성(지금의 갑곶돈대)의 사진입니다._국립중앙박물관
▼ 강화옛지도에서 제물진의 갑곶돈대와 기타 진해루,복파루, 염주돈대가 그려져 있는 사진을 인용해 보았습니다. (구)강화대교가 갑곶돈대를 훼손하며 지나가고 있습니다.
▼ 일제시기 사진엽서로 발행된 갑곶나루의 모습이며, 진해루와 오른쪽 산 끝에 염주돈대가 희미하게 보입니다.
▼ 일제 강점기때의 진해루 모습입니다.
▼ (구)강화대교가 개통되기전인 1960년대의 상륙정을 개조하여 김포에서 강화 갑곶나루까지 차량들을 실어 나르는 모습입니다. 뒤에 보이는 산 정상에는 염주돈대가 있었습니다만, 이미 많이 훼손된듯한 모습입니다.-경기도청 멀티미디어
▼ 강화대교조감도 입니다. 1965년~1967년의 공사기간이 있었습니다_경기도청 멀티미디어
▼ 강화군청에서 인용한 갑곶돈대 주변의 사진들을 참고로 올려보았습니다.
▼ 강화전쟁박물관의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돈대현황을 올려보았습니다. 붉은색은 숙종이후에 추가로 만들어진 돈대(5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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