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사 대웅전은 기록에 의하면 갑사가 창건될때에는 지금의 대적전 주위가 금당자리였으나, 정유재란때 불에 타 버려서 다시 지을때 지금의 위치로 변경하여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대웅전은 정유재란 이후 선조 37년(1604)에 갑사에서 가장 먼저 재건된 건축물 중 하나로서 이후 그 형식을 대체로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때 진해당도 지어졌습니다.

 

효종 5년(1654년)에, 고종12년(1875년)에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조선 광무3년 (고종36년,1899년)에는 적묵당이 신축되었습니다.

 

※ 갑사 대웅전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이 되었습니다

▼ 대웅전 앞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모습이며, 건물의 크기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입니다.

 

▼ 대웅전 우측의 진해당은 선조 37년(1604)에 대웅전과 함께 지어졌고, 고종 12년(1875년)에 중수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요사채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ㄴ자형으로 남쪽과 전면인 서쪽에 툇마루를 두었으며, 스님들의 처소 겸 선방으로 사용되는 온돌방과 대방(大房)을 두고 있습니다.

 

대방에는 약사여래불과 후불탱을 봉안하여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진해당(振海堂)은 바다에서 중생을 건지는 집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 [자료:문화재청] 갑사 진해당에 봉안되었다고 알려진 석조보살입상입니다 . 이 불상은 본래 대웅전 뒤편 수정봉 중턱의 하사자암(下獅子庵)에 있었던 것을 1920년대에 갑사 진해당(振海堂)으로 옮겨온 것이라 하며, 목 부분이 절단된 것을 복원한 상태입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 1.25m로 197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 진해당과 마주보고 있는 적묵당(寂默堂입니다. ㄴ자형 건물로 종무소겸 승방으로 쓰여지고 있고, 고종 36년 (1899년)에 지어졌습니다. 

 

▼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 강당이며, 지금은 지장전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 대웅전앞에 보이는 괘불지주는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주로 대형탱화를 걸고 법회를 열때 사용 합니다.

 

 

[자료:불교신문] 괘불지주가 쓰이는 용도는 괘불을 거는데 필요한 2개의 기둥을 고정하는데 쓰이는 돌기둥이며 자료사진은 국보 갑사 삼신불괘불탱화(야단법석삼신불화)이며, 매년 가을 기허당 영규대사 추모다례재때 대웅전앞에 걸어 놓고 야외에서 삼신불을 친견하게 됩니다.

 

이 삼신불괘불탱은 조선 후기의 불화이며, 1650년(효종 1)에 경잠(敬岑), 화운(華雲), 응열(應悅)  8명의 화원(畵員)이 그렸습니다.


▼ [자료:공공누리] 갑사 대웅전의 옛모습을 자료사진으로 몇장 보겠습니다.  1957년 이승만 전대통령이 갑사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대웅전의 계단은 정 중앙에 있었습니다.

 

▼ [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80년대의 사진으로 추정이 되는 자료사진인데, 갑사의 옛 모습은 이랬습니다. 좁아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보다도 훨씬 보기 좋습니다.

 

강당 기준으로 앞에는 해탈문이며, 뒤는 대웅전입니다만, 대웅전 앞마당을 넓힌다고 해탈문을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강당을 옯겼습니다

 

▼ 2000년대 전후로 보이는데, 대웅전의 글씨가 검은 바탕에 흰색이었습니다.

 

▼ 2000년대 초로 추정이 되는 자료사진인데, 마당에 5층석탑이 보이고 새로 주조된 듯한 범종이 보입니다. 석탑은 부여정림사지 오층석탑을축소하여  COPY하였습니다. 지금은 삼성각옆으로 올겨졌습니다.

 

▼ 2000년대 초로 추정되는 자료사진인데, 갑사는 대웅전 앞마당에 관심이 많았었나 봅니다. 마당에 잔디를 깔아서 정원처럼 만들었는데, 스님들도, 신도들도, 좀 불편했을것 같습니다.

 

▼ [자료: 갑사]  오층석탑 없어지고 잔디밭의 경계석이 추가되었습니다.

 

▼ 넓은 마당이 깨끗해진 현재의 모습입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잔디밭을 없앴을것으로 보이는데, 마사토를 깔은 지금 상태가 최선인 듯합니다. 정면으로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것은 강당이며, 지금은 지장전으로 되어 있습니다

 

▼ 대웅전 현판의 글씨는 康熙八年己酉六月日書(강희8년기유6월서), 즉 1669년(조선현종 10년) 기유년 6월에 썼습니다.


[자료:문화재청] 갑사 대웅전의 내부를 자료사진으로 보겠습니다. 

 

흔하지 않은 대형 삼존불과 사보살입상의 정확한 명칭은 '공주 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ㆍ사보살입상(公州 甲寺 塑造釋迦如來三佛坐像ㆍ四菩薩立像)’입니다

 

삼존좌불과 사보살입상은 1617년(광해군 9)에 행사(幸思) 등 9명의 조각승이 제작한 총 7존(尊)으로 구성된 대단위 작품이며, 특징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 불상이며 평균 높이가 2.5m, 보살상은 평균 높이가 2m 이상으로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7존불 중 현존 최대작(最大作)이자 최고작(最高作)이라고 합니다.

 

갑사의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사보살입상에서 발경된 복장유물과 복장전적(불경)이  7건 263점이며,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제작 시기와 제작자 정보가 명확해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7존불과 함께 유물과 복장전적(불경)분리되어  각각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어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 갑사 소조삼세불은 1617(광해군 9)에 행사(幸思) 9명의 조각승이 진흙으로 제작한 총 7()중에서  중앙에 위치한 상당히 큰 작품입니다.

 

▼ 삼세불앞에 있는 화려한 이것은 불패(佛牌)라고 하며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존호가 적인 패입니다. 일반적인 민가에서는 위패라고 하며, 왕실의 존호가 들어 가면 전패(殿牌)라고 합니다.

 

▼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중앙에 봉안하고 우측에 아미타불, 좌측에 약사불을 봉안하여 삼세불의 봉안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협시불(脇侍佛)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의 4대보살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 2015년 우측보살의 복장에서 유물과 전적(불경)이 나왔습니다.

 

▼ 소조관세음보살입상에서 발견된 전적류 8건 8점으로, 전체적으로 상당히 양호한 상태이다.고려본을 포함해 조선시대 16세기 중반까지 간행된 서적들이며 필사본으로는 백지에 묵서로 서사한 금강반야바라밀경 1점이 있고, 나머지 7점은 모두 목판본이다.지난 2015년 6월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조사를 실시했고,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 보존돼 있습니다.

 

▼ 갑사의 대웅전에서 쓰이는 금고(金鼓) 및 금고거(金鼓?거)

실제 보지는 못해서 자료사진으로 알아 보겠습니다

갑사 대웅전에는 쇠북(금고)와 그것을 매달고 있는 목조 금고거가 있는데, 이 금고의 용도는 스님들이 불경을 외울때 꼭 쓰이는 불전법구입니다.

 

가끔 사찰에서 보이는데, 다른 법구에 비해서 많은 유물이 전해 오는데,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금고는 865년(경문왕 5)에 제작한 금고이며, 모두 약 70여 종이 알려져 있습니다.

 

갑사의 금고는 그 제작연대는 18세기 중반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검은 빛이 감도는 금고의 정면 당좌에는 동심원을 표현하였고, 그 바깥에는 범자(梵字)가운데 ‘옴’자 4개만이 간략하게 표현된 원권(圓圈)의 범자를 장식하였으며, 측면에는 금고가 거에 매달릴 수 있도록 연결하는 3개의 반원형 고리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갑사의 금고(金鼓)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금고와는 다르게 서수(瑞獸)와 용(龍)을 화려하게 조각한 거(虡)에 연결된 형태이다. 금고거는 금고를 걸 수 있는 몸체부분과 그것을 지지하는 대좌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몸체부분은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위로 날아 올라서 붉은 색 여의주를 앞발로 부여잡는 형상이다.

 

대좌부분은 서수의 형상을 하였고, 등에는 양련과 복련의 연잎을 사용하여 몸체부분과 결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금고거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거’ 가운데 조형적으로 가장 우수하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그 중요성을 인식하여 복제, 전시하고 있다.-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자료사진] 일반적으로 간략한 형태의 금고입니다. 크기는 소형부터 대형까지 다양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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