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화폐의 유통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나름대로 시장경제에 부응하여, 화폐를 정착시키려 여러 가지 화폐를 발행하고  노력하였지만, 대체로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 자료는 한국은행 박물관, 우리역사넷, 위키백과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서 발행한 자료에서 고려시대의 화폐에 대한 설명을 인용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쌀, 베(布)등 물품화폐를 대신하여 다양한 재질의 금속화폐를 발행하였으나,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였다. 중국 당나라 때 동전이 발행되어 활발히 사용된 데 영향을 받은 고려는 성종 15년(996년) 우리나라 최초의 철전(鐵錢)인 건원중보(乾元重寶)를 발행하였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고 생각했던 동양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둥근 형태에 네모난 구멍이 있는 모야이었는데, 조선시대까지 발행된 대부분의 주화도 이 모양을 띠었다.

이후 998년(고려 목종 원년)에는 동국중보(東國重寶)와 동국통보(東國通寶)가 1102년(고려 숙종 7년)에는 해동통보(海東通寶)가, 1103년(고려 숙종 8년)에는 해동중보(海東重寶), 삼한중보(三韓重寶)가 각각 발행되었다.

거액 거래에 사용할 목적으로 은화도 발행되었는데, 1101년(고려 숙종 6년)에 1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을 본 뜬 은병(銀甁) 발행된 데 이어 1287년(고려 충렬왕 13년)에는 은 덩어리를 쪼개어 쓸 수 있게 만든 쇄은(碎銀)이 화폐로 유통되었다. 한편 은병은 가치가 너무 높아서 소액거래에 사용하기 불편하였으므로 1331년(고려 충혜왕 원년)에는 은병보다 작은 소은병(小銀甁)이 만들어졌다.

고려 말에는 원나라에서 지페가 발행되어 성공적으로 유통되고 국내에서 원나라 지폐인 보초(寶鈔)가 유통된 데 영향을 받아 저화(楮貨)라는 지폐를 발행하려고 하였으나,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 고려시대의 화폐를 시대별로 알아 보면, 고려 성종 15년(996년)에 당나라의 화폐 건원중보를 모방하여 철로 만든 주전(鑄錢)을 발행하였으며, 이 땅 최초의 화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시중에서 재화로써 가치가 높은 은(銀)을 장기간 화폐로  유통시켰다는 것입니다

996년(고려 성종 15년) 998년(고려 목종 1년)
건원중보(철전) 건원중보(동전) 무문전(철전) 동국통보 동국중보
1101년(고려 숙종6년) 1102년(고려 숙종7년) 1103년(고려 숙종 8년)
은병화 해동통보 해동중보 삼한중보 삼한통
1287년(고려 충렬왕13) 1331년(고려 충혜왕1)      
쇄은 소은병      
     

 

1) 고려시대 최초의 화폐인 건원중보(乾元重寶)에 알아보겠습니다.

 

당나라와 고려의 건원중보의 자료사진을 보면, 앞에는 공통으로 건원중보(乾元重寶)라고 새겨져 있지만, 뒷면을 보면 고려의 건원중보에만 동국(東國)이 새겨져 있습니다.

 

모양을 보면, 동그란 형태에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이 있는 형태인데, 중국(주나라)적인 우주의 개념을 적용해서 하늘은 둥굴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학설을 적용한 것입니다.

 

※ 건원(乾元)은 중국 당(唐)나라 숙종(肅宗;758~760)의 연호이며, 이때 발행된 주전(鑄錢)이 건원중보입니다.

 

건원중보는 철로 만든 철전(鐵錢)과 구리로 만든 동전(銅錢)이 있었는데, 당나라의 건원중보와 달리 고려의 건원중보는 뒷면에 동국(東國)이라 표기하였습니다.

 

건원증보는 996년(고려성종 15)에 처음으로 주조되어 이듬해(997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나, 개경(開京) 등 상업이  번창한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다른 지역은 화폐의 기능이 별로 필요치 않은 물물교환이 더 편리한 농업 사회였

으므로 얼마 사용되지 못하고 목종때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1910년대초에 개성부근의 고려 고분(일본인 발굴)에서 건원중보 철전과 건원증보 동전, 동국통보(東國通寶), 동국중보(東國重寶)가 함께 출토되었는데,  996년 건원중보 철전이 주조된 이후 구리로 만든 건원중보가 추가로 주조, 발행되었다고 추정되어집니다.

 

또한 함께 발굴된 무문전(無文錢:철전)은 신라에서 화폐로 사용됬다는 기록이 있지만, 고려에서는 화폐로서의 기능이 없이 주술적 화폐로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2) 동국중보(東國重寶), 동국통보(東國通寶)
동국중보(東國重寶)는 고려 시대(목종 2년:998년)에 구리로 만든 동전의 일종으로서. 모양은 건원중보와 같으며, 고려에서 발행한 건원중보가 당나라의 건원중보와 구분이 어렵게 되자, 처음으로 우리나라 이름으로 발행한 화폐이며, 동국통보((東國通寶)와 함께 발행되었습니다.

 

3) 삼한통보(三韓通寶), 삼한중보(三韓重寶)
삼한통보와 삼한중보는 고려 때 주전도감에서 만들었으며, 모양은 일반 주전(鑄錢)과 같습니다. 다만, 삼한통보와 삼한중보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삼한통보와 삼한중보의 글씨체

 

4) 은병화(銀甁貨)
은병(銀甁)은 고려 숙종 6년(1101년)에 유통시킨 고려의 은화(銀貨)입니다. 1101년(숙종 6) 처음으로 발행하였으며, 동전화폐(銅錢貨幣)와 함께 사용하였습니다.

 

은병화의 무게는 1근(지금의 600그램, 16냥)이었으며, 은병화(銀甁貨)의 가치는 포(布) 100필, 쌀은 15석~50석(1석은 보통 쌀 두가마로 합니다)이므로 무척 높은 가격의 화폐였습니다.

1105년(고려 숙종 10년)에는 무게는 같지만 은의 함량을 줄여 은 12.5兩, 동 2.5兩을 혼합하여 주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은병은 일반 백성보다는 권세가들이 좋아하던 화폐였으며, 지금의 금덩어리 정도의 가치를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짜 은병(은에 동을 많이 섞어 만든 가짜 은병)이 유통되어 시장에서 화폐로서의 신뢰가 낮아지다가 조선 태종 8년(1408년)에 유통이 금지되었습니다만, 그래도 300년 이상 화폐로서 유통되었습니다.

 

5)해동통보(海東通寶)
해동통보(海東通寶)는 1102년(고려숙종 7)에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건의에 따라 주전관(鑄錢官)을 임명하여 주전도감에서 만든 동전(銅錢)으로서, 고려 조정에서는 해동통보 15,000관을 만든 후에 이를 적극 유통시키기 위해 관리들에게 급여로 지급하였으며, 개경의 음식점에서 쌀이나, 포목 대신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실제적인 효과는 없었습니다

 

※ 주전도감(鑄錢都監)은 고려 시대에 돈을 만들기 위해 새로 세운 관청으로서 지금의 한국조폐공사와 같은 곳입니다.

고려 숙종 6년(1101년)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주전 제작소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설치하였습니다.

 

주전도감이 설치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돈을 만들게 되었는데, 주전도감이 설치된 이듬해인 1102년(숙종 7년)부터 처음으로 해동통보를 만들어내고, 이어 해동중보·삼한통보·삼한중보·동국통보·동국중보 및 은병을 만들었습니다.

 

※ 여라가지의 해동통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해동중보(海東重寶)

해동중보(海東重寶)는 고려 숙종 8년(1103년)에 철로 만들어진 철전(鐵錢)이며, 계림유사에서 1103년(고려 숙종 8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해동통보와 해동중보의 글씨체 비교

 

7)쇄은(碎銀)

고려시대에 쇄은이 언제부터 사용되었지는 알 수 없으나, 충렬왕 13년(1287) 쇄은에 구리를 합주하는 것을 금한 사실에서 이미 충렬왕 이전 부터 널리 유통되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쇄은은 은병 한 개 무게의 은괴로서, 절단하여 사용할 수 있는 보조화폐였는데, 은병의 주조때 구리의 함량이 높은 저질의 은병이 유통되고, 또한 대외무역에도 은병이 결제수단으로 다량 유통되다 보니, 국가에서 보유한 은이 부족하게 되자 쇄은을 국가화폐로 유통시키게 되었습니다.

 

쇄은은 무게가 일정하여 저울의 저울추와 같은 기능을 하던 칭량화폐(秤量貨幣)였으며, 상업활동을 하던 부호들은 쇄은 축적하기도 하였지만, 거래때마다 순도와 중량을 검사를 하든 번거러움이 커서 점차 화폐로서의 기능이 약화 되었습니다.

 

8)소은병(小銀甁)

고려 숙종 6년(1101년)에 제조. 유통되던 은병이 불법주조로 인해 은의 순도가 적고 구리의 함량이 높은 불량 은병이 유통되고, 원나라 간섭기에 높은 순도의 은병화가 대외유출이 심해지자, 고려 충혜왕 원년(1331년)에 크기는 작지만 은의 순도가 높은 작은 은병을 화페로서 유통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불법주조로 인해 순도가 떨어지면서 화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일부 지방에서만 유통되다가 고려 공민왕때 이미 화폐로서의 기능이 없어졌고, 1408년(조선 태종8년)에는 유통이 완전히 금지되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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