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에 북한 실향민을 위해 당시에 1번 국도를 따라 민간인이 갈 수 있는 가장 끝 지점에 임진각이 세워졌다. 이후 다양한 시설들이 속속 들어서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군사분계선에서 7km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판문점과는 다르게 복잡한 허가절차를 필요로 하지 않아 경기도 내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휴일 일평균 1만여 명 이상, 평일에도 일평균 수천 명씩 방문하는 파주시의 대표적인 유명 관광지이다. 연간 방문객은 200만 명 이상. 개관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동절기는 5시)까지이며, 일부 시설을 제외하고는 연중무휴로 개방한다.

1,500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주차장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운영한다. 유모차는 대여하지 않는다._나무누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임진각 관광지 전체를 임진각평화누리라고도 하는 것 같습니다.

 

▼ 주차장앞의 조각 작품을 담아 보았습니다.

 

장단·사천강지구 전투는 1952년 3월 17일부터 이듬해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때까지 495일간 임진강 북쪽 장단 지역에서 해병대가 미 해병 제1사단(1연대)과 함께 4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서부전선을 방어, 수도권을 사수한 전투입니다.
당시 해병대는 5천여 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중공군 4개 사단 4만2천여 명과 맞섰으며,  이 치열한 전투로 아군은 776명이 전사, 3천214명이 부상했습니다. 중공군은 전사 14,017명, 부상 11,011명, 포로 42명인데, 피아의 인명손실이 엄청난 소모적인 전투였지만, 결국은 임진강 북쪽 장단지역을 지켜냈습니다.( 이 전승기념비는 2014년 11월 13일에 만들어졌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사회적 거리를 두라는 지침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임진각관장지에 놀러 오시는 분들은 많았습니다. 사진 가운데 건물이 임진각입니다.

 

▼ 평화누리공원으로 가면서 바라보는 설치조형미술품입니다. 무엇인가 깊은 뜻이 있겠지요?

 

평화누리공원의 수상카페 "안녕"의 건물이 보이고 바람의언덕에는 수많은 바람개비가 돌아가는데, 약 3000개의 바람개비라고 합니다.

 

평화누리공원 입구에 있는 전투기는 팬텀기라고 하는 미국 맥도날더글라스(지금의 보잉)에서 만든 F-4D 대형 쌍발 복좌 전투기이며, 폭장량도 커서 다목적 전투기로 1961년부터 배치되기 시작하여 한때는 베트남전에서 활약하였으며, 성능을 인정받아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전투기였습니다. 대한민국 공군에서는 현재 퇴역하였습니다.

 

평화누리공원은 드넓은 잔디밭 전체가 공연장이어서, 2만명을 수용할 수 있어서 커다란 행사도 몇 번 하였다고 합니다. 미술작품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으며, 탁 트인 공연장이어서 산책하기 참 좋은 곳입니다.

 

통일부르기(최평곤작가)라는 설치미술작품이며,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작가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바람의 언덕에 통일을 부르는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습니다.

 

설치작품인 빨깐색 핀인데 작품명은 피스핀(PEAC_PIN;평화의핀)이며, 연기자인 이광기님의 작품입니다.

 

바람의언덕을 돌아서 임진각으로 가는 길에 바라보는 작품들입니다. 여기 임진각 평화누리는 파주시(시설관리공단)에서 관리합니다.

 

임진각 평화 곤돌라가 운행하고 있고, 저 멀리 임진각 다리가 보입니다. 저 하얀색 다리를 건너면 도라산역입니다.

 

장단역 독개다리 입구에서 보는 안내판입니다. 주된 내용은 전쟁이 휴전이 되었지만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행방을 알지 못하는 전사자들의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안내입니다. 전쟁에서 죽어서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영령의 유해를 찾아주는 일은 국가의 책임이자, 후손들의 의무입니다. 

 

세계 64개국 86개 전장에서 돌들을 모아서 민족화합과 인류평화의 디딤돌로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돌입니다.

 

임진강변 생태탐방 안내소 앞에서 바라보는 임진각입니다.

 

2000년 1월 1일에 평화종을 건립하였습니다.

 

고향을 두고 온 애잔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벙커 전시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 사진들인데, 휴전회담 때의 미군과 북한군의 사진이며, 맥아더 기념관의 사진이라고 합니다

 

벙커 내부는 볼게 많지는 않지만, 땅속에 콘크리트 건물이라서 좁은 공간이 통로로 이어져 있습니다. 전시되어 있는 군용 장비가 몇 점이 있는데, 참 익숙한 장비는 무전기 P-77입니다(6.25전쟁때 쓰이던 군용 물자가 아니고, 월남전 이후 때 쓰이던 장비를 전시하였습니다). 타자기 뒤로 보이는 사진의 105mm 야포 부대에서 무전병일 때 저것을 지고 33개월 근무했는데,  벌써 40년이나 지났습니다...

 

지하벙커를 나와 독개다리 앞의 철로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소녀상과 기차가 다닐 수 없는 철로를 보니 일제강점기로 인한 민족의 분단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의 굴레를 보는 듯합니다.

 

일본 놈들의 식민지만 아니었다면, 소련이나,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민족분단이라는 비극도 없었을 것인데, 결국은 막강한 군사력만이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하게 하는 최고의 방패인 것입니다.

철로의 침목에는 임진 역에서부터 신의역까지의 역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때는 각각의 우체통에 편지가 가득했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증기기관차가 옮겨져서 수리를 하고 다시 이동해서 현재의 위치에 설치되는 모습이 보입니다. 원래 증기기관차는 장단역에 있었는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노후된 기관차를 포항제철로 옮겨서 보존처리 후에 현재의 임진각 앞 독개다리에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BEAT 131이라는 벙커의 출구입니다. 비트 옆에 임진강 독개다리라는 입간판이 보이는데, 독개다리는 임진강 남쪽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 강 북쪽 장단면 노상리를 잇는 경의선 상행선 철도교량입니다만, 6.25 전쟁 때 파괴되었으며, 최근에 스카이워크를 설치해서 관광객이 임진강을 자유롭게 조망할 수 있습니다. 독개다리는 원래 노상리의 옛 마을 이름인 독개마을에서 따 왔습니다. 

 

통일의 염원이 담긴 리본이 전시되어 있어서 분담의 아픔이 더욱더 진하게 느껴지는 모습이 연출되어 있습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DMZ 넘어 저곳으로...

 

언뜻 보면 독개다리에 역이 있었던 것처럼 임진각이라고 세워 놓았고, 개성과 서울까지의 거리를 표시하였는데, 실제로는 경의선에 임진강역은 없었습니다. 다만 임진 역이 있었는데, 현재 위치에서 뒤쪽으로 임진 역을 재현해 놓은 건물과 기차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독개다리 철교 모습을 재현하고 스카이워크를 설치해서 관광객이 쉽게 임진강을 조망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78호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京義線 長湍驛 蒸氣機關車)입니다. 1950년 12월 31일에 당시 이 열차를 운전하던 한준기 기관사에 의하면 밤 10시쯤 장단역에 우리 기관차가 도착하자 미군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미 그때 북한군이 기관차를 쓰지 못하게 모든 차량을 불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장단역에 기관차를 버리고 우리를 태우러 온 다른 기차를 이용해 후퇴했다고 합니다.  이후 이 증기 기관차 화통이 약 2년간의 보존처리를 거쳐 2009년 6월 24일부터임진각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 증기관차의 모델은 마터형 증기기관차이며, 미국 Baldwin의 제품으로 1939년~1945년 사이에 생산되었으며 무게는 116Ton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철도의 상업운영에 투입되었으며, 산악지형이 많은 조선에서 성능이 좋아서 최고의 증기관차였다고 합니다.

 

보존처리 후에 전시 초기에는 차양 지붕이 없었는데, 증기기관차의 보호 차원에서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열차 내부처럼 만들어 놓았는데, 마치 아주 오랫적에 기차를 타고 시골을 지나는 풍경이 연출됩니다.

 

경의선 임진각 철교의 모습을 보면 복선으로 되어 있습니다. 1906년 경의선이 개통될때에는 단선이었다가 1943년 복선화 되면서 2개의 교량이 되었는데, 좌측이 경의선 신의주방향 상행선이고, 우측이 서울방향 하행선입니다. 철교는 6.25때 파괴되었는데, 북측이 했는지, 미군측이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좌측의 하얀색 철교는 2000년대 경의선 복원공사때 교량이 복원되어 기차가 다니게 되었습니다.

 

독개다리 스카이워크에서 바라보는 모습이며, 스카이워크는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유의다리입니다. 현재 자유의 다리는 기존의 다리를 철거하고 새로 만든 다리라고 하며, 끝 부분은 막혀 있어서 6.25 전쟁후 포로교환때 국군이 이 다리를 건너왔다는 사실만을 생각하며 되 돌아 나왔습니다. 자유의 다리는 신의주행 상행선 철교까지만 이어진 임시교량이었지만 완전히 철거되지 않고 오늘날 까지 남아서 역사적인 사실들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1953년에 포로를 교환 할때 이 다리를 건너서 돌아온 포로가 1만2773명이라고 합니다. 그때 부터 자유의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자유의 다리에서 바라보는 임진각입니다

 

다리아래에서 보는 자유의다리입니다

 

자유의 다리는 83미터의 목재와 철골로 만들어진 다리이며, 현재 복원된 경의선철교도 자유의다리라고 하는것은 잘못된것입니다.  포로교환을 위해 상행선 철교를 보수 할 때 임시로 만들어진 83미터의 다리만 자유의다리라고 하는것이 맞습니다.

판문점의 돌아오지않는다리와 임진각의 자유의다리는 6.25전쟁의 상흔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다리입니다.

 

 ▼ 경의선 철도는 서울(당시 경성)과 신의주사이의 518.5Km의 복선철도로서 1904년에 착공하여 1906년 4월3일 단선으로 개통되었으며, 1943년에 복선화 되었습니다. 경의선 철도는 일제의 조선의 지배강화와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지금은 서울과 문산간 52.5Km만 운행하고 있습니다.

 

망향의 노래비는 잃어버린 삼십년이라는 가요가 적혀 있습니다 1983년 6월에 KBS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에서 당시 무명가수였던 설운도씨가 잃어버린 삼십년을 불러 크게 유행시켰습니다. 그 당시 이산가족의 마음을 대변하는 가사와 곡조로 전국민을 울렸던 기억이 납니다.

 

북한에서 내려오신 이산가족들의 차례장소로 만들어졌는데, 꼭 명절이 아니어도 아무때나 제사를 지내는듯 합니다

 

임진각 옥상이 전망대입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임진강과 철교등을 바라보는 마음은 분단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아쉬움만 가득합니다

 

사진 중앙에 자유의다리가 자세히 보입니다. 휴전후에 포로 교환때 저 다리를 통해서 북으로, 또는 남으로 각자의 고향을 찾아서 다리를 건넜습니다

 

임진강을 앞에 두고 들판에는 모심기가 한창입니다.

 

임진각 주변에는 여러가지 조형물이 많이 보입니다. 이 조형물은 6.25전쟁때 참전한 미군참전기념비 입니다. 그 당시 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던 트루먼 대통령의 동상이 앞에 있습니다.

 

관광용 열차입니다. 승객이 탑승하면 출발 합니다.

 

임진역은 1938년 9 9월 1일 영업을 시작하여 1941년10월 31일에 폐지하였습니다.

 

  ▼ 임진역 철도 종단점에 증기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는데, 장단역 증기기관차와 모델이 다른 미카3모델입니다. 어렸을때 살던 집이 철로 옆이라서 자주 보던 증기기관차 입니다. 일본어로 황제(Mikado)를 뜻하는 단어의 첫 두 음절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하며, 1967년 디젤기관차의 등장으로 운행이 중단되었고 북한에서는 2003년까지도 운행하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전시용으로 10여대 정도가 있습니다.

 

다음은 6.25전쟁 밥북자기념관입니다. 여기는 후문인데, 건물 안에 조형물 사진좀 찍었습니다.

 

조형물 상단에 밧줄에 묶여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니 그 당시 처참했던 모습을 보는듯 합니다. 석재 표면에는 납북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기념관 정문으로 들어갑니다. 입장료는 없습니다. 내부에는 영상관이 있고, 전시실에는 납북자들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983년 미얀마에서의 전두환대통령의 암살미수사건과 희생된 수행원들의 추모탑입니다. 그런데 그때 꼭 미얀마에 갔어야 했나요?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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