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은 서울시 북악산,인왕산에서 발원하여, 시가지 중심부를 동쪽으로 가로 질러서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상류는 경봉궁 서북쪽의 백운동 부근을 흐르는 청풍계천(淸風溪川)이며, 지류인 옥류동천(玉流洞川;인왕산 동쪽에서 발원)), 누각동천(樓閣洞川;수성동 계곡에서 발원))과 남산에서 발원하는 3개의 지류가 있는데, 본류,지류 모두 합쳐서 청풍계천이라고 하던 것이 청계천이며, 그냥 개천(開川)이라고도 하였으며, 지금은 청계천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 청계천의 하천 길이는 약10km정도의 거리인데, 1부, 2부로 나누어서 사진을 올렸습니다.1부는 모전교에서 부터 오간수교까지 입니다.
▼ 청계광장에서 부터 청계천의 걷기를 시작하는데, 물이 상당히 많이 내려 가고 있습니다. 이물은 한강에서 취수하여 일반 상수도 수준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정수하여 흘려 보내고 있으며, 일부 물은 지하철에서 발생하는 지하수로 공급되고 있다고 합니다.
▼ 청계천이 시작되는 세종로 동아일보사 앞에 조성된 광장인 청계광장의 폭포는 우람한 물소리를 내며 청계천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 재두루미 한마리가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 모전교 밑에는 늦봄의 더위를 식히려고 다리밑에 모여서 더위를 식히고 있습니다만, 발을 담그면 불법(?)이라고 합니다.
▼ 과일을 팔았던 모전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모전교라고 하였습니다.하지만, 옛날의 일본인이 찍은 모전교 사진을 보면 전혀 맞지 않습니다.
▼ 모전교 다음으로는 광통교인데, 원래의 다리를 복원하여 놓고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이용되고, 물길은 옆으로 따로 흘러 갑니다.
▼ 광통교 벽면에는 다리에 얽힌사연을 적어 놓았는데, 읽어 보면 태종(이방원)이 계모(신덕왕후)가 엄청 미웠던것 같습니다.
▼ 일반적인 조선의 돌다리에서는 없는 당초무늬의 받침대가 보입니다.
▼ 이 받침돌은 신덕왕후의 무덤을 둘러싸던 병풍석이었습니다. 태종(방원)이 지시했는지, 석공이 쌓다 보니 뒤집어진것인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태종(방원)의 계모 신덕왕후의 묘지석을 전부 다리를 만드는데, 쓰라고 한것은 분명하므로 처절한 복수를 한셈입니다
▼ 광통교 하부에는 여기저기 당초무늬의 병풍석이 많이 보입니다.
▼ 광통교 교각에 새겨진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자료를 찾아 봤더니, 영조36년(경진년)에 각 지방에서 장정 20만명을 동원하여 57일간 냇바닦을 파내고 물길을 넓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교각에 새긴 것 같습니다.
▼ 계사갱준(癸巳更濬;계사년에 다시 준천하였다)이라고 새긴 교각에는 계사년이라고 음각이 되어 있는데, 영조49년(1773년)에 개천을 다시 파내었다는 기록으로 보입니다.
▼ 하여간 정치는 무서운 것 이다 라고 가르쳐 주는 다리입니다.
▼ 원래의 광통교가 있었던 자리에 만들어진 광교라는 다리입니다. 원래의 광통교는 현재 위치에서 155m 위로 옮겨서 복원 되었는데, 이유는 광통교를 석교로 복원하면 차량이 다닐 수 가 없기 때문에 사람만 다니는 다리로 옯겨서 복원하고, 대신 그자리에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철교를 놓아서 광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의 하나인 장통방(長通坊)이 있던 자리의 다리라고 해서 장통교라고 합니다.
▼ 장통교와 삼일교 사이의 워터브라인드입니다. 그런데 저 물은 어디서 공급되는지 모르겟습니다.
▼ 장통교와 삼일교 사이에 도자기 타일로 만들어진 정조반차도(정조의 화성행차도)가 멋지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 삼일대로를 남북으로 잇는 다리라서 삼일교라고 하였습니다
▼ 삼일교 밑에는 청계천을 복원한 후에 최고의 물높이를 표시하여 놓았습니다. 홍수때는 정말 물이 엄청 많이 흐르는 것 을 알 수 잇습니다.
▼ 지금의 수표교는 이름만 수표교이며, 청계천 복개공사(1959년)를 하면서 장충단 공원 앞으로 옮겨졌습니다. 다리를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MB서울시장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 한다는 약속은 청계천에 묻어버리고 밀어 붙이식 공사에 그나마 남아 있던 전통의 흔적은 사라졌습니다.
▼ 하랑교터 부근입니다
▼ 하랑교는 1958~1961년 시행된 청계천 복개공사때 철거되서 석교 구조물등은 일부 현재 위치에 묻혀있다고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때 눈앞의 치적 때문에 옛날 문화재들이 복원 안되고 그나마 대부분 흔적도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참 가슴이 아픕니다.
▼ 정확히 관수교터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10년 가설되었던 관수교는 1961년 복개공사때 철거 되었습니다
▼ 세운교는 세운상가와 청게상가 사이에 놓여진 다리인데, 조선시대때는 이곳에 효경교(孝經橋)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부근에 소경(시각장애인)들이 많이 살아서 맹교라고도 했으며, 지금은 터만 남아 있고, 그위에 세운교가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 종로4거리에 있던 배오개 고개에서 유래한 다리 입니다. 배오개고개는 원래 한자의 이름이 이현(梨峴)이어서 이곳이 배나무가 많아서 배고개의 음이 변하여 배오개라고 변하였습니다.
▼ 배오개다리에서 새벽다리 방향으로 보면 석축에 안전 사다리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홍수때 급작스럽게 물이 불어 났을때 탈출용입니다.
▼ 종로구 예지동과 중구 주교동 사이의 다리로서, 시장 천막의 이미지를 적용하여 동대문 시장의 역사성과 향수를 연출하여 놓여졌습니다. 원래 여기에 다리가 있었는지는 불분명 합니다
▼ 앞에 마전교가 보입니다.
▼ 마전교는 성종때는 태평교(太平橋), 영조때 마전교(馬廛橋)라고 했는데, 인근의 방산시장 근처에 소와 말을 사고 팔던 마전(馬廛)이 있어서 붙은 이름입니다.
▼ 청계천5가 교차로와 을지로6가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연결하는 신축된 다리입니다.
▼ 나비날개처럼 벌어진 현수교의 모습입니다.
▼ 버들다리가 보입니다. 북쪽의 동대문종합시장과 남쪽의 평화시장 사이에 놓인 다리입니다
▼ 버들다리는 전태일다리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습니다.
▼ 다리위뿐만 아니라 근처에는 수많은 오토바이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 동대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고자 몸부림쳤지만, 22살의 나이에 분신자살한 전태일 열사의 동상입니다. 한국 노동계의 전환점을 제시한 사건이었으며, 2010년 11월 전태일 열사 분신 40주기에 맞춰서 전태일다리라고 하였습니다.
▼ 전태일다리위에서 오간수교를 바라봅니다.
▼ 청계천 옆으로는 동대문종합시장입니다.
▼ 오간수문 앞에는 분수가 시원스럽게 뿜어져 나옵니다
▼ 한양도성이 지나는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의 문이 5개인 수문으로 오간수문이라고 하던 다리였는데, 대한제국 말기에 청계천의 배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오간수문을 철거하고 오간수교를 세웠다고 합니다.
▼ 아래 그림은 영조36년(1760)에 청계천의 바닦을 퍼내는 경진준천(庚辰濬川)을 실시하던 모습을 남긴 '준천시사열무도'라는 그림입니다.
▼ 원래의 오간수문의 모습입니다만, 오간수문의 유구는 현재 종랑하수종말처리장 구석에서 방치되고 있다고 합니다. 청계천에 원래의 오간수문을 복원하는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홍수때 청계천의 물을 감당하기에는 수문이 너무 작은것 같습니다.
▼ 오간수문의 모형을 재현하여 놓았습니다만, 보는 맛이 안납니다.
▼ 준천공기(濬川功記)라는 영조의 어필입니다. 그옆에는 준천가(濬川歌)라는 시는 문신이었던 번암 채재공이 영조의 업적을 찬양하는 시라고 합니다
▼ 이렇게 오간수교를 지나갑니다
- 1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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