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는 조선시대에 한때 지금의 도청 격인 행정기관인 강원감영이 있었습니다. 조선후기(1896년)에 행정조직 개편으로 감영(監營)의 기능이 춘천으로 이전되었지만, 과거 강원감영의 터를 발굴하고, 선화당 및 후원과 일부 건물을 복원하여 개방하고 있습니다.

 

선화당의 좌측에는 행각(行閣)을 복원하면서 강원감영의 역사를 알려주는 각종자료를 전시하고 있어서 중요한 자료만 촬영하여 페이지를 꾸며 보았습니다.

 

※ 인용한 자료는 전통문화포털, 원주역사박물관에서 가져왔습니다.


▼ 원주역사사료관으로 이용 중인 행각입니다

 

 

▼ 잠깐 일제강점기(1918년)때 완공된 원주교를 일본군들이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진이며, 아마도 지금의 원주교의 시초일 것으로 보입니다.

 

▼ 다리(원주교)뒤로 보이는 산은 봉산입니다. 1918년인데 일본애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원주에도 이 시기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 관동지(1830년)를 보고 그린듯한 강원감영의 모습입니다만, 점선 부분만 복원이 되었으며, 나머지 강원감영의 건물들은 복원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 관동지(1830년)에서 강원감영도(江原監營圖)를 보면, 약 45개의 행정기관의 건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강원감영의 크기를 짐작하게 합니다.

 

현재의 복원된 강원감영은 극히 일부만 복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원주에는 읍성의 흔적도 없었는데, 동서남북으로 4대 문이 있었습니다.

 

▼ 조선시대에는 강원감영으로 보려면 4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원주에는 읍성의 흔적이  없는데도, 4대 문이 있었다니, 의아스러운데, 4대 문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 동문(수명문(水明門))

- 서문(취적문(翠滴門))

- 남문(진남문(鎭南聞))

- 북문(공북문(拱北門))

 

▼ 관찰사의 주된 업무는 각도에 파견되어 행정을 감사하고, 살펴보는 일이 주된 임무였는데, 재임 기간이 1년(조선후기에는 2년) 정도로 극히 짧았습니다.

 

▼ 관찰사는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조선시대의 관찰사는 국왕이 직접 임명하였으며, 오늘날의 도지사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칭은 영감(令監), 감사(監司) 도백(道伯), 방백(方伯), 도수(道首) 등으로 불리었습니다

 

관찰사는 국왕의 임명하에 각 도의 행정과 병무, 법무, 농무, 교무 등을 책임졌으며 각 도에 속한 지방관아 수령들에 대한 감찰과 명령을 내리는 권한도 갖고 있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지방관리 중 최고의 관리였습니다.

 

▼ 관찰사가 해야 할 일을 휴대용으로 만든 업무편람인데, 지금으로 보면, 휴대용 업무 매뉴얼입니다.

 

▼ 관찰사 업무편람의 일부분을 확대해서 보면, 각 지방의 조세항목인듯한 내용이 보입니다.

 

▼ 행각의 한쪽면에 세워진 병풍을 보면 역대 강원감영으로 재임하였던 관찰사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수백 명의 관찰사가 부임하고, 이임하고 그렇게 조선 오백 년은 거의 완벽한 행정조직을 꾸려 왔습니다만, 일제강점기에 감영은 도청으로 관찰사는 도지사로 바뀌었습니다.

 

▼ 조선시대 숙종 때 강원감영의 관찰사의 재임기간을 보면, 1년 이상 근무한 관찰사는 거의 없으며 대다수가 1년 또는 6개월로 근무기간이 매우 짧았는데, 1년에 관찰사가 3번이 바뀌는 때도 있었습니다.

관찰사의 발령사항을 보면 수강원도관찰사는 관찰사 직무대리, 강양도,강춘도는 숙종 때 잠시 지명이 바뀌었을 때입니다.


▼ 강원감영의 중심건물인 선화당과 후원에 대한 설명이며, 조선 8도의 감영의 집무실은 모두 선화당(宣化堂)이라는 편액을 걸었습니다.


▼ 관찰사를 도와주는 사람들을 알아보았습니다.


▼ 정미의병은 정미년(1907년)에 강원감영에 주둔 중인 원주 진위대(대한제국 군대)를 일본군들이 해산하려 하자 무기를 들고 일본군에 대항한 의병들을 일컫습니다만, 일본군들이 하는 일에 가만히 있지 왜 대들었냐고 신친일민족반역자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눈을 부라릴까 봐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세계 어는나라든지 나라를 빼앗기면, 칼이나 총을 들고, 독립투쟁을 하였던 역사는 부지기수인데, 우리나라만 일제강점기 때가 자랑스러웠고, 독립투쟁한 영웅들을 사상의 굴레를 씌워서 반역자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관이나 공직의 우두머리로 앉아서 자신의 조국의 역사를 지워버리려고 하는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습니다.

 

학자라는 껍데기를 쓰고 공공연히 자기가 태어난 조국을 두고 공공연히 일본제국시대를 찬양하고 있는 이 세상을 우리는 지금 제2의 일제강점기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의병사진은 경기양평에서 영국의 종군기자인 멕켄지가 발간한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소개한 사진입니다. 맥켄지는 지평의병장에게,  일본을 이길 수 있나?라는 질문을 하였는데, 의병장은 "어차피 죽겠지만, 일본의 노예가 되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게 낫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의병장의 씩씩함과 군인으로서의 절개가 느껴집니다.


▼ 전시되어 있는 유물 중에 처음 보는 작은 나무조각들이 있어서 자세하게 쓰임새를 알아보았습니다. 쌍륙말이라는 성인놀이도구였습니다만, 지금은 자료만 남아 있고, 놀이 자체는 없어졌습니다.

 

자료에서 보면 백제시대에도 있었던 놀이기구였습니다. 놀이기구가 있으면 한번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 조선시대에도 쌍륙마놀이는 전해졌는데, 신윤복의 '쌍륙마삼매'의 그림에서 놀이방법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 쌍륙마(雙六馬) 놀기 기구인데요... 모양을 보면 놀이기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기다란 막대모양이고 색갈이 다릅니다.(자료는 전통문화포털에서 가져왔습니다)

쌍육마의 뜻은 주사위를 던져서 각각의 주사위가 숫자 6(六)이 모두 나오면 육(六)_이 두 개이므로 쌍육이라고 합니다

 

▼ 특이한 것은 주사위가 두 개입니다. 가운데에는 말들을 모아 놓는 장군 칸이 있습니다. (자료는 전통문화포털에서 가져왔습니다)

 

▼ 쌍륙마의 놀이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자료는 전통문화포털에서 가져왔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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